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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vN] |
요즘 회사원들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은 사표가 아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에도 선뜻 사표를 낼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갑’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항상 갑을 꿈꾸는 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낼 수 없는 사표 대신 가슴 한편에는 언제든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여행 티켓이 자리 잡고 있다. 해외여행도 별일이 아닌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흔히 여행은 좋은 곳에 가서 좋은 것을 먹고 푹 쉬다가 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 아니다. 여행의 목적은 낯선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낯선 자아와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혼자 가야 한다. 우리는 때로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규정지어질 때가 있다. 그 평가가 의도한 것보다 좋다면 그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고 낮다면 높이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타인에 의한 평판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에 의한 자신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이런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잘 살린 프로그램이 바로 tvN의 <꽃보다 할배>이다. 할배들의 맏형이자 동년배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순재와 “니들이 게 맛을 알아?”로 유명한 신구, 노년의 카리스마 박근형,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백일섭을 모르는 시청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속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캐릭터는 이제껏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것도 완벽한 현실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것만 걸러낸 모습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재미는 할아버지들이 여행을 간다는 데 있지 않다. 낯선 여행지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캐릭터에 있다. 한 시트콤을 통해서 ‘야동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순재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직진순재’로 통한다. 여든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멈추지 않고 걷는다. 그 걸음 또한 여느 젊은이보다 힘차다. 그리고 대쪽 같은 성품과 연륜이 더해진 총기는 아직도 그가 끊임없는 연기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반면에 신구는 여전히 푸근한 모습이다. 축 처진 눈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가 가끔 던지는 진솔한 말들은 아직 젊은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절대로 이 감동을 강요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무심히 툭 뱉는 말 한마디가 진짜 멋진 것이다.
반면 이와는 상반된 캐릭터인 박근형, 그 역시 연기에서의 카리스마가 여행지에서도 꼬장꼬장하고 장난기 많은 행동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형들에게 면박을 주면서도 묵묵히 챙겨주는 모습에서는 또 다른 면을 느낄 수가 있다. 가장 큰 재미를 주는 것은 막내 백일섭이다. 막내임에도 무릎이 안 좋아 걷기 싫어하고 특히 길이라도 제대로 못 찾는 순간에는 난리가 난다. 이 또한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캐릭터다. 할배 4명이 다 여행을 즐기기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어디가나 꼭 대세에 반하는 인물이 있는 법이다.
신의 한 수는 캐릭터가 다양한 네 할배의 캐스팅과 더불어 바로 이서진이었다고 생각한다. 할배들만 여행을 떠난다면 어딘지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들이 갈등을 겪을 때 이를 해결해줄만한 힘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그가 바로 이서진이다. 이서진 또한 우리가 생각했던 캐릭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그도 어느새 마흔이 넘었다. 하지만 할배들 앞에서는 까마득한 후배일 뿐이다. 그리고 유학파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엘리트의 이미지였지만 프로그램 속에서는 그저 짐꾼일 뿐이다.
특히 <1박2일>처럼 프로그램의 연출자인 나영석PD가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간다. 단순히 프로그램 밖에서 프레임 안의 상황만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연출자가 직접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면서 방송이지만 방송이 아닌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상황에 더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PD가 계속 이서진에게 가이드 같다느니 노예본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캐릭터를 부여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이서진을 보고 있으면 <1박2일>의 이승기가 생각난다. 프로그램 속에서 이승기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을 조화시키고 나아가 캐릭터들의 결합으로 재미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이제는 이서진이 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낯선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낯선 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여행이라고 볼 때 <꽃보다 할배>는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여행 리얼 버라이어티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젊음은 없지만 젊음을 다 거쳐 간 연륜이 있다. 물론 그 연륜이 권위적이고 무겁기만 하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청춘을 닮은 연륜 그리고 연륜만이 낼 수 있는 향기가 <꽃보다 할배>의 진정한 재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SNL에서 <꽃보다 할배>와 소재가 비슷한 <마마도>를 풍자한 코너가 방송되었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없어 보인다. 네 명의 할머니들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재는 비슷할지언정 그 속에는 캐릭터도 없고 여행의 진정한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말발 센 네 배우를 앞세워 감동을 주고자 한 연출자의 의도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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