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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기억의 존재 - <건축한개론> 수지에서 <굿 닥터> 주원까지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잠시 잊혀질 뿐이다.
누구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소주 한 잔에 털어버리고 싶지만 그때뿐이다. 기억이란 놈은 한 번 박히면 굳은 살처럼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기억에서 <굿 닥터>의 병적인 기억력까지 그 실체를 파헤쳐보자.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2004년 한 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정우성과 손예진이 주연한 <내 머리속에 지우개>다. <연애소설>, <클래식>, <첫사랑사수 궐기대회>의 영화를 보고 손예진에 흠뻑 빠져있었을 때였다. 가끔 꿈에 손예진이 나타났다. 손예진은 내 머리 속에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 <내 머리속에 지우개>의 포장마차 장면은 정우성이 아닌 내가 있었다. 영화 속 알츠하이머병의 걸린 손예진이 안타까웠다. 극적인 전개와 결말을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지만 보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영화 <내 머리 속에 지우개>의 한 장면. 영화 속 정우성이 부러웠다.
알츠하이머병은 퇴행성 뇌질환이다. 점진적으로 증세가 악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최근 기억의 문제만 있지만 결국 모든 일상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치매의 한 종류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도 같은 선상에 있었다. 영화는 교통사고 이후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루시(드류배리모어 역)와 핸리(아담 샌들러 역)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둘의 사랑에는 단 하루의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곰만한 남자의 감성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핸리는 추억이 담긴 비디오를 루시에게 보여준다. 비디오의 내용은 매일 업데이트 된다. 루시는 비디오를 통해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 비디오는 루시의 기억을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를 통해서 가슴 찢어지는 사랑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생각보다 로맨틱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영화 속 남자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 내 기억이 잊혀진다면 어떨까?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은 왜 지워지지 않는가?
MISS A의 수지를 국민 첫사랑으로 만든 ‘건축학개론’은 많은 이슈를 만들었다. 첫사랑의 추억을 담은 영화로 연인들의 기피 대상 1호였다. 영화가 끝나고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안주 삼아 소주 한 잔 했다. 핸드폰은 여자친구의 협박 메시지로 가득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첫사랑이 생각났다. ‘건축학 개론’수업을 듣고 싶어졌다. 학교 강의계획서를 보는 순간 건축학과 없는 학교에 불만이 생겼다. 학점교류로 타 학교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한 쪽 이어폰으로 <기억의 습작>을 하루 종일 들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있는다” 는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 두 개의 심장이 있고 하나의 심장에는 첫사랑을 품고 살아간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미래의 아내가 될 사람이 들으면 서운해할지 모르겠다. 멋진 프로포즈로 서운함을 달랠 생각이다.
첫사랑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처음으로 경험한 일들은 뇌 속에 강렬하게 기억된다. 처음이 주는 설렘 때문이다. 하지만 설렘의 문제일까?
인간의 기억 원리를 이해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억이란 과거를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그릇이 뭉쳐 거대한 그릇을 만들기도 한다. 분류가 가능하고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 <메멘토>를 생각하면 쉽다.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 역)는 순행성 기억상실증 환자다. 10분 이상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다.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없으며 과거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과거를 담고 있는 그릇이 사라지는 것이다.
첫 경험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를 담고 있는 그릇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릇이 존재하는 한 계속 생각이 난다. 찻장 안에 넣어 둔 채 필요할 때 쓰는 그릇과 같다. 필요할 때 꺼내 쓰고 다시 집어 넣는다. 첫사랑의 기억은 남자들의 찻장 안에 있는 하나의 그릇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첫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자들을 위한 립서비스로 생각된다. 찻장에서 그릇을 꺼내지 않을 뿐이다.
한 번 보면 끝. 병적인 기억력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종영하고 <굿 닥터>가 그 뒤를 이어 받았다. 본격적인 ‘주원 앓이’가 시작이 된 셈이다. 서번트증후군을 앓고 있는 박시온(주원 역)은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회진 때도 차트 작성을 하지 않고 모두 기억한다. 입이 딱 벌어진다.
KBS드라마 <굿 닥터>의 한 장면. 시온은 한 번에 모든 것을 기억한다.
시온은 특정 전문 분야와 관심 분야에 대한 기억력이 뛰어나다. SBS 드라마 <출생의 비밀>에서 어린 정이현(김소현 역)과 대비된다. 어린 정이현은 보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둘은 기억에 관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감각저장소를 거쳐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이동한다. 각 단계를 거치는 것은 주의(집중)와 암송(반복)의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감각저장소에서 주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단기 기억으로 가지 못하는 원리다. 단기 기억은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밀러의 ‘매직넘버7’ 이론이 이를 설명해준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아이템의 숫자는 7개에 국한되어 있다. 그 이상의 아이템은 단기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단기 기억에 저장된 아이템은 암송을 통해서 장기 기억으로 이동한다. 기억이 고착화되고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굿 닥터>의 시온과 <출생의 비밀>의 이현은 두 가지 과정을 안 거친다. 단기 기억에서 바로 장기 기억으로 이동한다. 장기기억의 고착화를 위한 반복은 그들에게 사치일 뿐이다. 비록 뇌질환으로 인해서 일반인과 다른 비정상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만, 발병원인과 치료법을 찾는다면 인간의 기억과 관련해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잊혀질 뿐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저장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많은 정보를 저장한다. 많은 정보를 저장하는 문제에 있어서 뇌의 저장 용량을 걱정하지 않는다. 성능 좋은 압축프로그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처럼 삭제버튼 하나로 지워지길 바란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한 번 저장되면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새로운 기억이 들어오고 순위에서 밀릴 뿐이다.
지우려고 애쓰지 말자. 나쁜 기억을 지우려고 과음도 하지 말자.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잊혀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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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야죠. 다 같이 행복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