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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림과 집필 로봇

여러분에게 필요한 로봇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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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집필 포맷을 프로그램화 하여 로봇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이 배신을 당하면 마치 에피소드 은행처럼 프로그램은 그 이유를 열 가지 정도 제시한다. 그럼 하나의 이유를 선택하면, 그 선택 결과에 따라 복수 방법이 열 가지 정도 제시된다. 이렇게 로봇이 말해주는 대로 선택을 하면 전체적인 사건의 개요가 짜진다. 다음은 캐릭터를 고르고, 문장을 고르고, 형용사를 고르는 식으로 로봇에게 일을 맡기면 얼추 소설의 전반적인 얼개가 짜진다.

소설가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예전에 무언가에 혹해서 주식을 산 적이 있다. 내가 산 주식은 회사가 부도나서 완전히 휴지 조각이 돼버렸지만, 증권회사는 어쩐지 휴지 조각밖에 안 남은 내게 아직 서비스 메일을 보내고 있다. 주식투자 역시 머리를 쓴다면 쓰는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누군가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돈을 잃어야 하는 사행성 사업이라 생각되어 나는 그 뒤로 주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서비스 메일은 종종 쳐다보는데, 그게 나름의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투자증권사의 메일 발송자는 꽤나 문학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 주식 동향 같은 메일에도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나 문학적 표현을 은근슬쩍 집어넣는데 최근엔 ‘퍼시픽 림’이란 제목으로 메일을 보냈다. 내용인즉, 영화 퍼시픽 림이 개봉했고, 자신은 못 말릴 정도의 로봇 광이어서 영화를 무척 보고 싶은데, 평이 별로라서 볼지 말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거였다. 어째서 애널리스트가 증권투자 메일에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의아했는데, 따져보니 내 영화칼럼도 그런 것 같아서 나는 그만 동류의식을 느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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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퍼시픽 림에 등장하는 전투용 로봇


그나저나 메일의 핵심은 영화에선 전투용 로봇이 많이 등장하지만, 현실세계에선 청소용 로봇이나, 의료용 도우미 정도가 로봇 역할의 전부이며, 가장 두드러진 최근의 로봇은 이른바 ‘상추 봇(lettuce bot)'이라는 농사꾼 로봇이란 것이다. 거 참. 여하튼 이 로봇은 스무 명 분의 일을 날씨에 상관없이 혼자 척척 처리해내기 때문에, 향후 농민들의 일자리 감소와 생산력 증대에 따른 투자 동향을 분석해 메일을 보낸 것이다. 나는 ‘으음’ 그럴 듯한 우려구먼, 하며 메일을 읽었는데, 이게 묘한 전염성이 있는지 그만 글 쓰는 로봇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영화 퍼시픽 림의 개봉 탓인데, 어찌됐든 <영사기>의 독자들도 자기 일을 대신하는 로봇을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나만의 글쓰기 공식’이 있다. 즉, 단편의 경우 200자 원고지 몇 장이 넘어가면 사건의 실마리가 넌지시 나오고, 장편의 경우 역시 200자 원고지 몇 장이 넘어가면 반드시 일기 예보관처럼 날씨 이야기를 스윽 꺼낸다. 무슨 날씨가 공식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몹시 중요한 요소인데 대문호 헤밍웨이도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자네가 쓸 데 없다고 여기는 그 날씨 이야기를 빼뜨리지 말게! 날씨는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니 말일세.” 왜 그러냐면 지하 셋방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절감하겠지만 해를 보지 못하는 일상은 음울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에 해가 뜨지 않는 소설 역시 우울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내 영업 비밀이 드러나므로 이쯤에서 감추고, 본론을 말하겠다. 그것은 무리해서 해보자면 나만의 집필 포맷을 프로그램화 하여 로봇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이 배신을 당하면 마치 에피소드 은행처럼 프로그램은 그 이유를 열 가지 정도 제시한다. 그럼 하나의 이유를 선택하면, 그 선택 결과에 따라 복수 방법이 열 가지 정도 제시된다. 이렇게 로봇이 말해주는 대로 선택을 하면 전체적인 사건의 개요가 짜진다. 다음은 캐릭터를 고르고, 문장을 고르고, 형용사를 고르는 식으로 로봇에게 일을 맡기면 얼추 소설의 전반적인 얼개가 짜진다. 작가는 ‘으음’ 하며 얼개 사이를 매끄럽게 수습하듯 단어와 접속사를 채워나간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그럼 거의 모든 소설이 너무 똑같아지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를 할 수 있지만, 내가 쓰고 있는 소설들은 원래 다 비슷해서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초고 짜는 로봇’, ‘퇴고하는 로봇’, ‘문장 다듬는 로봇’, ‘편집자와 가격 협상하는 로봇’, ‘인터뷰 대신 하는 로봇’을 대충 콘셉트에 맞게 설계할 수 있는 데, 예컨대 이 로봇들에겐 이런 대사를 입력해놓을 수 있다. 


 “입금 전에는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격이 절충되면 결말 바꿔 드립니다.”                       - 원고료 협상 로봇

 “(신작이 나올 때마다) 제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입니다.”

 “이 글에 제 혼을 담아내 전 지금 얼얼합니다. 어버버.”         - 인터뷰 로봇

 

이런 식으로 어투와 어조, 음량 등을 조절해서 작동할 수 있는데, 이게 과연 내게 무슨 도움이 될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여러분의 로봇은 어떤지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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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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