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 낳은 마을
아바이라는 말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일대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방언이다. 한국전쟁 당시 함경도 일대에 고립된 미군과 국군은 흥남철수작진을 펼치던 도중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난민을 함께 대피시키게 된다.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함경도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목인 강원도 속초에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다. 휴전선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남편과 부인, 친구와 이웃을 보러 가리라. 아바이, 아바이. 그들의 외침 속에 분명히, 아바이라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강원도는 산세가 험하고 땅이 척박했다. 저지대는 온통 갈대밭이었고, 그나마 비옥한 땅에는 토착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때는 혼돈의 시기, 누구도 그들을 돌봐줄 수 없었다. 6,000여 명의 실향민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배고파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는 뭐라도 입에 넣어줘야 했다. 하지만 사방은 물 한 모금 나지 않는 갈대밭이었다. 결국 갈대를 꺾어 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가족을 위해 설악산을 헤매며 물을 찾아 다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속초의 바다와 고향의 바다는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였다. 태어난 곳과 가장 닮은,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이 포구에서 머물기로 했다. 바다에 나가면 고향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스민 알 수 없는 냄새를, 가장 가깝고 엄청나게 먼 그곳의 냄새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갈대밭을 태우고 그 땅을 깊이 팠다. 바다와 가까운 곳은 온통 모래밭이었다. 창문과 출입구만 지상으로 내놓은 채 모래 속에 집을 지었다. 동해안의 해일이 거세게 몰아쳤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버티는 것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곳도 점차 집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골목이 사라져야 했다. 집과 집이 가깝게 붙어야 했다. 틈이 사라지고, 공간이 사라지고, 결국 개인이 사라졌다. 누구도 그들을 개인으로 대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실향민이라는 이름 아래 반세기를 지내야 했다. 그 좁은 틈, 어른 한명도 제대로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그 길을 비집은 것은 고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그곳에도 생은 존재했다.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 길에서 태어난 아이, 그 아이가 자라 뛰어노는 발걸음과 어느새 청년이 된 아이들의 묵직한 발자국이 그 길에 남았다.
종이컵의 온도
내가 아바이 마을을 찾은 것은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대포항으로 가기 위해선 미시령 터널을 지나야 했다. 고도가 높아 날씨가 변화무쌍 했다. 미시령고개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을 잘못 잡아서 제대로 된 포구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우려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펼쳐진 파란 하늘과 햇살이 부서지는 호수를 보았을 때, 탄성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산 하나를 관통했을 뿐인데도 하늘은 도무지 다르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쪽과 저쪽의 다름이 내가 찾아가게 될 포구가 가진 시간의 더께임을 그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바이 마을의 행정상 명칭은 청초호의 이름을 딴 청호동이었다. 마을 곳곳에는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돌아다녔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낮은 돌담 앞이나 처마 아래에서 한참을 서 있곤 했다. 식당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때는 휴가철, 속초의 아름다운 정취는 도시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드라마 <가을동화>와 예능 등의 TV방영으로 유명해진 갯배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청호동과 중앙동의 사이에 난 100여 미터의 바닷길을 운행하는 갯배는 일제 말기부터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했다. 갯배의 가격은 편도로 200원이었다. 인력으로 배를 움직였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직접 줄을 당길 수 있었다. 나 역시 줄 끌기에 동참하기도 했다. 배는 아주 천천히 물길을 갈랐다.
그곳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팬 그는 날렵한 선글라스를 쓴 채로 갯배의 이용료를 받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동전 통 앞에서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갯배 두 척을 바라보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아바이 마을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에게 손인사도 건네고, 손주 또래의 아이를 발견하면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오전이 끝나고 교대 시간이 되었다. 그는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쉬다가 해질녘에 다시 교대를 해주러 온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집으로 초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아바이 마을을 걸었다. 그는 다리가 조금 불편했다. 몇 발자국 걷다가 양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잠시 쉬어야 했다. 차로 이동을 하자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며 더운 바람을 맞았다. 앞서가던 그는 선글라스가 불편했는지 벗어선 가슴주머니에 테를 끼워 넣었다. 갯배 승강장에서 그의 집까지는 제법 멀었다.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로 내려 꽂혔지만 한 번씩 뒤로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온화했다.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벽에 걸린 표창장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신 효를 주위 사람들이 알려 국가에서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수줍은 듯 액자를 매만졌고, 얼른 주방으로 가서는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주전자에 김이 오르는 동안, 어르신은 안방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 작은 화분이 하나 보였고, 옷장, 침구류, 서랍장이 보였다. 서랍장 위에는 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 앞에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삐- 어느새 주전자에선 수증기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 왔다. 나는 얼른 마셔야 할지, 가만히 들고 있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연 이후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손으로 종이컵의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아바이 사람들이 전부 고향가고 싶지. 고향이 가차운데(가까운데)……. 이십 일 피난이라 했거든. 어머니는 그때도 연세가 많았어. 내가 열세 살 때인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며칠 밤낮을 걸었지…….”
아바이라는 큰 이름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빠져있던 시절,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들으며 처음으로 통일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당시 나는 10대에 막 들어서는 나이였고, 통일과는 먼, 더더군다나 전쟁과는 머나먼 아이였다. 어쩌면 나에게 북한이나 통일은 대중가사로만 와 닿게 되는 허상이었다.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국군 장병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나 민방위 사이렌이 울릴 때나 듣게 되는 단어들이 뒷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각인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바이 마을을 다녀온 이후, 실향민이라는 단어의 민감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들의 정체성과 역사를 새기기에는 중요한 말이지만 아바이 마을에서 태어날 아이에게 시대적 고통과 아픔을 그대로 이름 지어줘야 하는지, 여전히 나에겐 의문이다.
그렇다고 속단 할 순 없다. 대중 가사로 발해나 꿈꾸는 새파란 청년이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함부로 짓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바이 마을에는 오징어 순대가 유명하다고 하지만, 함흥식 냉면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내게는 아바이 마을에서 먹은 종이컵 커피가 이리도 씁쓸하게 남아 가끔은 혀끝이, 아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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