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저자를 만난 것은 장마철 와중, 무척이나 무덥고 습한 날이었다. 충무로에서도 한참을 걸어 서서히 오르막길로 접어들면서 더위는 한층 심해졌다. 저자가 강연과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는 감이당, 남산 강학원이 있는 깨봉빌딩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땀방울이 얼굴을 모두 적시고 난 뒤였다.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듣는 다는 것, 또 배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니,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이처럼 고즈넉한 곳이 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일면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인사를 건네는 고미숙 저자의 모습은 그가 머무는 공간과 다르지 않았다. 수수한 옷차림에 학자적인 풍모를 느낄 수 있는 꼿꼿함, 그리고 간간이 내비치는 여유에서 남다른 내공이 느껴진다. 여성학자가 많지 않은 고전인문학 분야에서 저자는 10여 년이 넘게 파고 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해 허준의 『동의보감』, 다산과 임꺽정, 윤선도 등을 재해석했다. 또한 사주명리학으로도 영역을 넓혀 인간의 몸과 마음, 운명에 관해서도 깊은 고찰을 이어갔다. 정작 그 모든 작업을 이어 온 본인은 자신의 자취를 ‘리라이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각각의 결과물들은 여성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고전의 새로운 이면, 디테일한 인물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전혀 다른 스타일로 고전 이야기하는 저자의 필체와 위트는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고전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키우게 했고, 또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런 저자가 최근 자신의 역량을 집대성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바로 다산과 연암의 극명하게 교차되는 삶과 작품을 다룬 평전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가 그것이다. 수많은 저서를 집필해 온 저자였지만 작품이 영글기까지 쏟아야했던 고민과 갈등의 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듯했다. 앞으로 수년 간 간격을 두고 이어질 작품이기에 그 시작은 무엇보다 중요한 탓이었으리라.
유쾌한 노마드 연암, 치열한 앙가주망 다산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조선의 마지막 황금기를 살았던 두 선인은 우리 시대에까지 그 명망이 이어지고 있는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는 이는 드물다. 더구나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고미숙 저자의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바로 이 점에 집중했다. 특히 저자는 사주명리학적으로 두 사람의 타고난 운명을 알아보고 그 삶의 궤적을 짚어보는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 본 두 인물의 모든 것은 놀랍게도 정 반대의 성향을 드러냈다. 저자는 이를 마치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한 평행선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사주명리학상으로도 다산은 불과 같지만 연암은 물에 해당됐다. 그 삶 역시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보통의 인문학적 접근과 다르게 위트 넘치는 필체와 관점으로 두 인물이 어떻게 삶의 파고에 대처했는지를 풀어낸 것이다. 두 인물의 삶 속에서 발견해 낸 새로운 흔적들 이야기하는 저자의 눈빛에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이유다.
이번에 펴낸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2017년까지 이어질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데요. 집필을 결심하신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10년 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를 썼을 당시 마지막 부록이 연암과 다산의 이야기였어요. 그러면서 문득 연암과 다산이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죠. 그렇게 화두가 생겼지만 한 동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났어요. 그런데 지난해에 OBS와 <신新 열하일기>라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다산과 연암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준비를 했는데 처음에는 시리즈로 쓸 생각을 못하고 그저 모든 걸 종합해 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곧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깨달았죠.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고 그걸 압축한다는 건 결국 이미 알고 있는 내용만 반복하게 되거나 많은 걸 버려야 한다는 의미였거든요. 그런 식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진정한 그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탐사를 하며 느끼는 감흥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렇게 하려면 시리즈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굳힌 거고요.
연암과 다산을 물과 불, 우도와 효제, 유목민과 목자, 포스트모던 지식인과 근대적 혁명가풍 지식인, 유쾌한 노마드와 치열한 앙가주망으로 풀이하셨습니다. 굉장히 새로우면서도 재미있는 비교인데요.
근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두 사람이 똑같이 보여요. 차이가 나는 것들을 미봉할 수 있는 장치가 여러 가지 있는 거죠. 그런데 큰 그림을 다르다는 것으로 전제로 하고 시작하니까 디테일하게 비교하면 할수록 깜짝 깜짝 놀라게 되더군요. 말 하나, 눈짓 하나에도 두 인물이 전혀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근본적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 학문을 대하는 태도, 주변 관계, 심성까지 모든 것이 달랐죠. 그걸 알게 되니 두 인물의 전 생애를 두고 대칭게임놀이에 빠질 정도로 발견이 계속 되었어요.
책 서두에서 지난해 겨울부터 올 봄까지 이번 책을 집필하면서 아주 특별한 신체적 감응을 맛볼 수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경험이었는지요.
처음에는 심적으로 짓눌렸어요. 심지어는 가위에 눌리기까지 했죠. 연암의 자료는 많지는 않은데 비해 그 사유는 굉장히 유동성이 강해 그걸 장악하는 게 힘들었고, 다산은 너무 압도적으로 자료의 양이 많았어요. 그걸 완전히 읽고 쓴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쓸 수가 없겠더군요. 처음에는 ‘내가 이정도 갖고 써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아는 것만큼이라도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요. 그 갈등을 신체적으로 느꼈어요. 포기했다가 절망했다가 다시 일어섰다가 하면서 전체를 세 파트로 나누고 아는 만큼이라도 말하자는 결심을 했죠. 그 다음부터는 신기하게도 내가 아는 만큼 즐거워지는 거예요. 그 전에는 내가 이만큼 알아야 하는데 요것 밖에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싹 버리니까 아주 디테일한 걸 발견할 때마다 즐거워지더군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자료를 찾고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가 어떤 수행을 하는 구도자와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정말 전문가라도 해도 두 인물의 삶에 디테일한 곡면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는데, 그런 걸 알았을 때의 오는 감격이 컸죠. 새삼 글쓰기란 기가 막힌 작업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내 책을 읽어주세요’가 아니라 ‘이런 글을 써보세요’라고 권하고 싶어지더군요. 그 시대의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그 인물들을 만나는 느낌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 것을 느끼면서 ‘아, 이걸 진정한 지성의 기쁨이라고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연암과 다산의 삶을 비교하며 저자께서도 글 쓰는 사람, 학자로써 그들과 같이 공명하신 듯 하네요. 저자 본인은 두 인물의 스타일 중 누구와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정말 외람된 생각이에요(웃음). 저는 다산 식으로 절대 살수도, 글을 쓸 수 없어요. 연암 식으로도 마찬가지로 외람되고요. 그럼에도 굳이 말하자면 저에게 많은 감발을 주는 건 연암이죠. 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연암처럼 빛나려면 다산식의 공부가 뒤에 있어야 함을 느껴요. 저는 다산 식으로 공부를 할 수 없지만 대신 다산 식으로 공부하시는 분들, 박학다식하고 박람강기(博覽强記, 동서고금의 서적을 널리 읽고 내용을 기억하는 것) 하신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분들이 없으면 연암식 글쓰기로 굉장히 치우치게 될 뻔 했죠.
다산과 연암 외에도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인물의 성격 외에 새롭게 발견하신 부분이 많을 듯 한데요.
동의보감이 그래요. 사람들은 단순히 의학서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배울 생각을 안했는데 의대를 안 나온 사람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올해 초까지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몸과 인문학』 등 3권의 책을 통해 이야기했죠. 아직도 강의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와요. 저는 의대를 나온 것도 아니지만 몸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걸 얘기해 주면 사람들은 참 열심히 들어요. 제 글 작업은 교과서적인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텍스트나 인물에 대해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오늘날의 현상과 접목시키는 것이에요.
배움과 깨달음으로 이어진 삶
스스로 칭하듯 유일한 고전평론가로서, 또 학자이자 작가로서 저자가 추구하는 것은 역사 속 인물의 삶을 디테일하게 바라보며 새로운 발견을 이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교육이 부실한 요즘 상황에서 사극마저도 퓨전을 표방하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작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어, 분위기를 조금 바꾸어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과 함께 개인적인 이야기 속에 녹아 든 학자의 열정을 들여다보았다.
요즘 사극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요. 인문고전학자이자 작가로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으실 듯 합니다.
사실 사극이 모든 진실을 담을 수 없고 대체로 조작된다고 보는 게 맞는데, 문제는 어떻게 조작되느냐는 거죠. 요즘 사극에서 제일 문제는 현대적 멜로물에다가 단순히 인물들에게 옛날 옷을 입혀 놓았다는 거예요. 인물들의 성격이나 정서가 현대인하고 똑같아요. 문명권이 다르다는 건 삶의 양식이 다른 거고 그러면 감정의 흐름이 다른 것이거든요. 옛날엔 일부다처제고, 15, 16살이면 혼인이 이뤄졌어요. 그런 때에 지금처럼 연애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을 리는 없잖아요. 요즘 멜로드라마에서 보듯 오늘날은 너무 연애하기 힘들어요. 일종의 문명이 주는 재앙인 셈이죠. 게다가 그렇게 힘주어서 결혼하고 곧 왕창 깨지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사극에다가 옮겨놓고 시기, 질투, 첫사랑을 덧입히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너무 질곡 시키는 거예요. 다른 시대를 엿본다는 건 지금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삶에 대해서 뭔가 탐사할 수 있어야 되요. ‘역사적 사실에 맞나, 틀리냐’가 아니에요. 역사적 사실로는 디테일한 부분을 알 수 없으니 다 틀리다고 봐야죠.
중요한 건 그렇게 재구성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줘야 하는데 요즘 사극은 너무 답답할 정도로 똑같은 패턴이라는 거죠. 자기가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면 남성들도 순결을 지킨다는 설정은 범국민적 사기극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그 시대에 그런 남자가, 그것도 왕이 그럴 수는 없거든요. 완전히 20세기 핵가족의 순결 이데올로기를 저 중세의 왕에게 씌운 셈이죠. 그렇게 했을 때 결국 ‘성’에 대한 엄청난 도덕적인 검열이 생기는 거예요. 그건 정말 폭력이죠. 그래서 저는 멜로 사극이 세상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금지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사회적 적응력을 키우는데도 방해될 뿐이고요. 밖의 현실은 포르노인데, 드라마에서는 금욕을 강요하는 상황이죠.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식의 연애가 가능하지도 않고 좋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퓨전 사극은 몸의 논리도 아니고 운명이나 풍속의 논리에도 맞지 않아요. 제대로 된 사극을 만들려면 사극의 상상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문고전 분야는 대개 여성들의 관심사와는 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인데요. 저자께서는 어떻게 입문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우연하게 시작했어요. 대학원을 갈 때 지도교수님을 보며 ‘저 선생님처럼 글을 써야 돼’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배우고자 했더니 선생님의 담당이 고전문학이셨던 거죠. 그 전까지 저는 준비가 없었어요. 선생님께 배우려면 고전문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죠. 그 밑에 있는 선배들 역시 고전으로 승부를 내겠다고 각오가 대단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쟁쟁했던 선배들은 간곳없고 저와 한 회 위의 여자 선배만이 남더군요. 고전공부는 끈기가 있어야 되거든요. 고전분야에 여성이 없다는 말은 맞는 소리에요. 여성은 시나 소설 쪽으로 관심을 두는게 보통인데 전 그런 것은 영 관심이 없었어요. 이미 그 분야에 여류작가는 많기도 했고요. 저는 그저 꾸준히 지속적으로 공부했을 뿐이고 어느 순간부터 재미를 느꼈죠. 그러면서 고전을 재미있게 쓰고 사람들과 소통한다면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박사 학위를 마칠 때 『고전문학 이야기 주머니』라는 대중 고전 문학서를 냈고, 그 뒤에도 고전문학을 통해 자립한다는 생각을 하며 ‘열하일기’를 만나게 된 거죠. 그렇게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남들도 고전문학을 좋아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 온 거고요.
오늘날 고전문학은 현대인들이 다시 배우고 알아야 할 지혜가 담겨있다고 하지만 사실, <열하일기>나 <동의보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로 읽어 본 사람 드물 듯 한데요. 고전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해 볼만한 일은 지성을 통해서 세계와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공부고, 수행이고, 구도이자 진리에 대한 열정이죠.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먹고 살기 힘들고, 가족을 부양한다고들 했죠. 하지만 지금은 이유가 점점 없어지는 시대가 아닐까요. 어쩌면 전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진리의 구도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것 말고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가 없거든요.
오히려 전 요즘 부자들이 안됐어요. 어떻게 자기를 표현해야 되죠? 어떻게 해야 이 가난한 사람과 달라져요? 요즘에 달라지는 건 감옥에 가는 거 말고는 없을 것 같은데요(웃음). 부자들이 차별화했던 그 화려한 것이 스마트폰에 다 들어가 버렸잖아요.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진짜로 나만의 고유한 인생을 사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다산과 연암은 학문과 지성을 통해서 자기 인생을 구원한 인물들이에요. 그들 역시 자기 운명의 코스를 바꾸지는 못했어요. 유배지에 가는 걸 막을 수 없었죠. 사람들은 운명을 개척하는 걸 길흉을 바꾸는 거라고 착각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다산이 유배를 가지 않으려면 주변 인간의 삶이 다 바뀌었어야 했어요. 그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걸 통달한 사람도 자신에게 오는 인연은 단 하나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걸 어떻게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달린 거죠. 유배 생활 18년을 현명하게 사용한 것이 다산을 만든 거예요. 누군가는 분통이 터져 죽고 누군가는 사약을 받고 누군가는 폐인이 됐어요.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이때 비로소 학자로 거듭났어요. 연암 역시 그 무엇도 평생의 가난함을 바꿀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연암 자신은 그 가난을 수행의 장으로 삼았죠. 당시에는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됐어요. 누구도 불가능하지 않죠. 이제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 고유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여부는 스스로가 얼마나 진리를 열망하는가에 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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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어택 이벤트
본 기사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채널예스> 독자 2분을 선정해 『갑자서당』의 저자인 류시성, 손영달 선생님이 사주 풀이를 해드립니다. (행사 날짜: 7월 23일(화) 저녁 7시 30분~8시 30분) 장소는 당첨자 분들께 개별 연락해 드립니다. (7월 21일까지 올라온 댓글 한에서 당첨자 발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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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고미숙 저 | 북드라망
이 책은 고미숙이 다산과 연암을 주인공으로, 정조를 주연급 조연으로, ‘문체반정’과 ‘서학’(천주교)를 중심 사건으로 삼아 쓴 새로운 형식의 평전이다. 평전이되 인물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리지 않고, 두 인물의 사유와 글쓰기가 부딪치고 흩어지는 지점들을 포착해 다산과 연암의 스타일 대별해 구축해 내고 있다. 연암이 좁쌀 한 알에서 우주적 징후를 간파하고자 한다면, 다산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담아내겠다는 결기로 충만하다.” 고 말한다. 연암과 다산, 그리고 18세기 조선을 ‘함께’ 읽을 때 만날 수 있는 별들의 지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 이제, 읽는 이들의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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