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만 하던 남자가 육아에 빠진 사연
『하찌의 육아일기』 저자 이창식, 외손주 재영이와 함께한 나날
보통 육아일기라면 아이의 성장과 발달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다. 『하찌의 육아일기』는 아이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수필처럼 썼다. 중심은 분명 손자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의 에피소드, 과거에 대한 회상 등도 가미했다. 현재 아이들 입으로 불리고 있는 동요들뿐만 아니라 이미 잊혀진 과거의 동요들까지 상황에 맞게 버무려넣은 전무후무한 육아일기가 될 것이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육아가 큰 부담이다. 한창 일해야 할 시기, 자녀 양육 때문에 사회 경력이 단절되면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심이 가장 많이 필요한 영아기에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기고라도 맞벌이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금쪽같은 내 아이를 생판 남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여건만 된다면 보통 친정어른이나 시댁어른이 손녀, 손자를 돌본다.
『하찌의 육아일기』는 외할아버지가 손자를 키우며 쓴 기록이다. 저자인 이창식은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성균관대 전문번역가 양성과정 겸임교수를 지냈다. 글과 씨름하던 그에게 어느 날, 글 대신 손자가 등장한다. 맞벌이 부부인 딸 내외의 사정을 보다 못해, 아내가 손자를 맡기로 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할아버지로 사는 즐거움’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저자는 외손자인 재영이와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그간 번역서는 많이 냈지만, 저자로 책을 낸 건 처음인 듯하다. 감회가 어떤지.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반갑고 기뻤지만, 막상 내 손으로 직접 쓴 책이 나오니 자식을 본 것처럼 희열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낀다. 손자를 위한 선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서 흡족하다.
‘하찌의 육아일기’, 제목이 푸근하다. 제목은 누가 지었나, 제목이 정해지기까지 사연이 있다면 말해달라.
저자로서 ‘한국에서 외할아버지로 산다는 것’이란 제목을 고집했는데, 출판사에서 ‘하찌의 육아일기’라는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제목을 달아줬다. 아주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보다는 출판사 사장님이 그쪽으로 센스가 있다.
외손자인 재영이를 돌보면서 1년 동안 기록한 육아일기를 책으로 냈다. 육아일기를 쓰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원래부터 책으로 내기로 생각한 건 아니다. 아내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특히 손자 녀석에게 밥 먹이는 일은 전쟁이더라. 기록해두면 나름 독특한 '전쟁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손자 녀석한테 할매가 이렇게 고생했다는 증거로 내밀려고 썼다. 녀석을 키우며 재롱떠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키웠는지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육아책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만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가 쓴 육아서는 생소하다. 이 책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보통 육아일기라면 아이의 성장과 발달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다. 『하찌의 육아일기』는 아이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수필처럼 썼다. 중심은 분명 손자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의 에피소드, 과거에 대한 회상 등도 가미했다. 현재 아이들 입으로 불리고 있는 동요들뿐만 아니라 이미 잊혀진 과거의 동요들까지 상황에 맞게 버무려넣은 전무후무한 육아일기가 될 것이다. 한국 할아버지들 중에서 나만큼 자장가와 동요를 잘 부르고 율동까지 할 줄 아는 할아버진 아마 드물 것이다. (웃음)
자식을 키우는 것과, 손주를 키우는 것은 조금 다를 것 같다. 어떤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르더라. 물론 딸을 키울 때도 예쁘고 귀여워서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지만 그땐 내가 아직 젊어 다른 세상 일에 호기심을 많이 빼앗겼다. 그런데 지금은 손자 녀석밖에 보이는 게 없다. 녀석이 내 친구이자 대화 상대자인 동시에 막강한 경쟁자니까 더 예쁘고 귀여울 수밖에.
지금 손주를 돌보는 세대 중에서 남자들은 보통 육아 경험이 많지 않다. 남자라서 힘들지는 않았나.
그래서 힘든 일은 아내한테 죄다 미루고 주로 쉽고 즐거운 일만 보조한다. (웃음) 손자 녀석이랑 동요 부르며 율동을 하거나, 졸린 기색을 보이면 자장가를 불러 재우거나,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놀기 등이다. 나의 정신연령이 아직 어려선지 그런 일은 힘들지 않다. 그리고 이건 남자라서 힘든 점은 아닌데, 사회적으로 육아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교육 여건이 너무 각박하고 살벌하다. 교육정책이 너무 꼬여 풀릴 전망이 안 보인다. 불필요한 공부까지 하느라고 아이들도 고생이고 부모들은 허리가 휜다.
조부모의 육아 방식과 부모가 바라는 육아 방식이 달라, 손주를 돌보면서 정작 자식과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다. 혹시 이런 문제는 없었나.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다. 심하지는 않다. 의견 충돌이 있다면, 나는 가끔 손자 녀석한테 사탕을 먹이려고 하고 아내와 딸은 반대하는 정도다. 딸 내외와 소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이해가 더 깊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자신들이 낳은 자식을 부모가 대신 키우며 고생하는 걸 보면서 딸이나 사위가 모두 미안해 한다. 또 자신을 키워준 부모에 대한 고마움도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부모 입장에서는 그게 더 고맙고 기특하다. 손자 키우느라 진은 좀 빠지지만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외 수업비를 아무리 들여 봐라. 자식들이 그런 걸 깨달아주나.
재영이를 기르면서 육아 철학, 이런 게 혹시 생겼나. 재영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는지 알려 달라.
녀석이 싫다는 건 가급적 하지 말자. 밥 먹는 일까지도. 꼭 시켜야만 할 일이라면, 무슨 수를 쓰든 녀석이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정도가 육아 철학이고, 재영이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너그러운 아이로 자랐으면 한다.
재영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어, 하찌 품을 떠났을 때 심경이 어땠나. 서운한 감정이 크면서도, 한편으로는 육아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지기도 했을 텐데.
서운하다기보다는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진 왕으로 군림했는데,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순간 평민이 되는 거다. 결국 적응은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나는 갑자기 실업자가 된 느낌이었고. 그래도 오후 4시 이후에는 재영이가 돌아온다.
그간 많은 책을 번역했다. 다른 일반 독자보다 책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날 듯하다. 채널예스 독자를 위해 책 3권 정도만 추천 부탁한다.
순수문학 독자께는 카잔차키스의 『수난』을, 추리소설 애독자께는 코넬리의 『라스트 코요테』를, 애정 소설 애독자께는 약간 유치한듯 재미있는 『병 속에 담긴 편지』를 추천한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