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시인과 공선옥 작가, 그들이 글을 쓰는 이유
김성규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공선옥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서로 다른 호흡과 시선으로 쓴 두 권의 책이 봄날, 깊고 뜨거운 이야기를 담고 독자들을 찾았다. 지난 4월 25일, 시인과 소설가가 함께 낭독을 하는 독특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주인공은 얼마 전 책을 출간한 소설가 공선옥과 시인 김성규다. 낭독은 80년대 광주 이야기를 담은 공선옥 작가의 신작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와 김성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로 꾸려졌다. 낭독 사이사이에 이어진 질문을 통해 작가들의 일상과 고민의 흔적도 엿볼 수 있었다.
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지뢰밭 가운데서 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적도를 따라 걸어가는 중입니다 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 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 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 너는 왼쪽으로 걸어 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 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 ||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 가나 아무도 장님인 저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죠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방 한 칸, 누가 뭐래도 이 방은 우리의 왕국입 니다요 방바닥에는 분유통을 굴리고 노는 어린 동생들, 아 무도 우리의 기쁨을 눈치챌 수 없게, 얼른 문을 닫으라고 어머니는 소리 질렀습죠 방 아 가득 꿈틀거리는 비린내를 배 터지도록 들이마시면 주홍빛 꽃송이가 쏟아지는 하늘, 난쟁이들과 춤을 추는 동생들, 사과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처녀들, 안대를 벗겨 내 눈동자에 새겨진 왕국을 하늘에 펼쳐주세요 안대를 풀자 배를 가른 어머니와 장님인 다섯 동생들, 웃 으며 아무거나 해달라고 나에게 보챘습죠 눈 감아도 훤히 보이는 어둠 속에는 우리를 밟아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요 차라리 장님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요 커튼을 열고 눈을 떳습죠 유리창으로 가늘고 가는 빛이 쏟아져들어와 눈을 찔렀습 죠 온몸에 숨어 있던 열기가 두 눈으로 쏟아져나왔습죠 눈 동자에 새겨진 왕국이 하늘로 솟아올랐습죠 흙으로 묻어놓은 입구를 따라 병든 쥐들이 인도하는 길 을 걸으면 어머니는 간과 신장을 팔아 통증의 왕국을 선물 하셨네 기억은 언제나 뒤엉켜 꿈을 꾼 흔적들, 천국은 언제 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우리를 기다리는 고통이 있 다면 누가 뭐래도 이곳은 우리의 왕국이라네 깡통 속에서 서로를 밀치는 동전소리, 장님은 복도를 걸 어가며 노래하네 저 짐승 같은 사내에게도 우리처럼 작은 뇌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황된 왕국을 떠올리지 않았을 텐데 졸린 눈을 부 비며 나는 정거장에 내린 사내를 보내 놀란 여자들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복도 쪽으로 비켜서고 빛이 쏟아지는 지하 도 끝으로 사내는 지팡이를 두드리며 사라지고 있었네 | ||
소나기 할머니는 시집와서 아무도 모르는 산 너머에 나무를 심 었다 그 나무는 자라 하늘까지 닿았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나무위로 올라갔다 짐승은 죄를 지어 일만 한다 하지만 소가 일하지 않는 날에도 비를 맞으며 밭고랑에서 김을 매던 할머니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간다 하니 하늘 어딘가에도 마당이 있을 것이다 그 마당에서 아홉 잔의 술과 아홉 개의 떡을 먹으며 노래 부르면 호미는 말잔등으로 변해 달리고 타령조로 울다 웃고 목이 쉬면 까마귀를 달여 먹고 지상에서 추지 못한 춤을 출 것이다 산 너머에서부터 바람이 우는 소리 가죽나무가 팔을 허우적대며 흘러가는 공기를 입안에 우겨넣는다 고깃덩이가 제사상에서 냄새를 피우는 날 이르지 못한 간절함이 인간의 들판에 비를 부른다 | ||
그것은 몸이 없는 혼 같을 것이다. 아니면 몸에서 혼이 빠져나간 빈껍데기 같을 것이다. 몸이 없는 혼. 혼이 없는 몸. 둘 다 무서운 일이다. 사람들을 엄마를 혼 없는 몸이라고 했다. 혼 없는 몸은 몸 없는 혼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이제 순애도 엄마처럼 혼 없는 몸이거나, 몸 없는 혼 같다. 벌써 혼이 빠져나가버린 빈껍데기 같기도 했다. 순애야, 피이, 하자 흠칫 놀라 달아나는 순간, 나는 알아챘다. 순애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엿장수는 동네 솥단지, 고무신짝, 머리카락만 가져가지만 새마을 연쇄점 주인 김주사는 뭔가 다른 것도 가져가는 사람임을.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어서 나는 죽을 것만 같았다. 죽을 것만 같은 열다섯살의 나를 쉰살의 내가 업고 어두운 마당을 서성였다. 서른살의 나는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고 백살의 나는 뚤방에 앉아 골똘히 내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p.29) | ||
거센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고요한 저녁 위로 묘자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날아갔다. 나는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돼지 새끼를 박샌이 먹어버린 것도, 우물가에서 부로꾸 찍는 남자가 나에게 몹쓸 짓을 한 것도, 김주사가 순애 혼을 뺏어간 것도 다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말하고 나면 나도 엄마처럼 농해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겁났다. 나는 내 속에다 용을 한 마리 키우기로 했다. 그 용이 자라서 승천할 때 나는 세상을 향해 말하리라. 내 말이 빗물을 타고 내려서 세상을 적시리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나 때문에 울 것이다. 나한테 미안해서 울 것이다. 나한테 잘해주지 못해서 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하고 용이 아닌 내 말을 듣고 울어줄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내 말을 듣고 울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도 엄마처럼 우는 병에 걸리면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울면 엄마는 울지 못한다. 엄마는 울어야 살고 엄마를 살게 하려면 내가 울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느니 담배여. 묘자 할머니는 담배를 피운다. 묘자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고 울음을 우는 것이다. (p.36) | ||
대나무가 소소거렸다. 대나무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일렁거렸다 헛간의 생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정애는 제가 먹던 밥을 헛간의 생쥐들에게 먹이고 제 그림자에게도 먹였다. 그래서 정애는 점점 작아졌다. 정애가 방바닥인지 방바닥이 정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서 먼지 한 올만큼 작아졌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아주 없어져버린 순간부터 정애는 커지기 시작했다. (중략) 그렇게 정애는 다시 태어났다. 갓 태어난 정애가 세 살짜리 정애를 밀어 올렸다. 세 살짜리 정애가 열 살짜리 정애를 이끌었다. 열 살짜리 정애가 열다섯 정애한테 후우, 하고 더운 숨을 불어넣었다. 정애는 이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봉창 안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이 정애의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정애는 바람을 타고 너울거리는 달빛 속으로 사뿐히 들어갔다. 정애를 태운 달빛이 대나무 밭 위로 빠르게 솟구쳤다. 대나무들이 일제히 소소거렸다. 소서거리는 대나무들은 마치 진언을 외듯이 너울거렸다. (p.210) | ||
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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