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봉석의 하드보일드로 세상읽기
인간사란 애초에 모순으로 차 있다 -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운명이란 있을까? 없을까?
히라타도, 마스미도,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그것이 끔찍한 진실이건, 화사한 거짓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후회가 있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고.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단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과 태도가 더욱 중요한 것.
운명이란 있을까? 없을까?
아무리 철저하게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해도.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 그냥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감이란 게 있다. 이런 일들이 닥친 것은 단지 우연일 뿐, 이라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순간들이 가끔 있다.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좋겠지만, 그 사건들이 결국 나를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일본의 도호쿠 대지진 같은 사건은 어떨까? 해일이 닥친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런 미증유의 사건은 예측할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운명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걸 누구는 우연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허지만 누구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행로를 조정할 수도 있다.
지방 소도시의 대형 마트 보안책임자 히라타 마코토의 인생도 그랬다. 히라타는 본점에서도 잘 나가는 직원이었고, 곧 임원으로의 승진이 내정되어 있었다. 아내와 딸이 있는 가정에서도 문제가 없었다. 지나치게 일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가족과도 잘 지냈다. 그런데 사고가 생긴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던 딸 하루카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자책감에 빠진 아내는 정신이상에 빠지고, 히라타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억울하게 죽은 딸을 위해, 엉망진창이 된 아내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히라타는 이렇게 변한 인생을,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히라타 마코토의 ‘히라’는 평범을 뜻한다……이름이 평범하니 체격도 보통, 살집도 보통, 특별히 잘하는 과목도 없고 못하는 과목도 없는, 자기소개하기가 아주 난감한 학생이었다. 자신은 이대로 세상에 묻혀 나이를 먹어가겠구나, 하고 히라타는 평범한 장래를 상상했다....일본의 평범한 샐러리맨의 모습이었다. 열렬한 연애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적령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가정보다 일을 우선하는 아버지와 집안일을 야무지게 돌보며 취미생활에 바쁜 엄마, 엄마와는 나이차 있는 자매 같지만 아빠는 다소 무시하는 딸, 홈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전형적인 가정이었다. 히라타는 평범하게 나이를 먹어갔다. 그런데 딸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아내는 자살했다. 자신은 암 선고를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범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살아가던 히라타는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던 스에나가 마스미를 만난다. 딸과 같은 해에 태어난, 딸이 살아 있다면 같은 나이일 여인. 연정 같은 건 추호도 없다. 그저 마음이 흔들릴 뿐이다. 그래서 아무런 대가 없이 놓아주고, 가끔 만났을 때 호의를 베푼다. 그렇게 일은 시작된다. 마스미는 매 맞는 여자의 전형이었다. 어찌저찌 흘러들어온 소도시에서 남자를 만난다. 처음에는 다정하게 대해준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지만 곧 본색이 드러난다. 돈은 벌지도 않고, 마스미를 술집에 보낸다. 마음에 안 들면 폭력을 휘두른다. 다음 날이면 용서를 빌고, 더 다정하게 대해준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 그러면 여자는 생각한다. 이 남자는 참 다정한데, 욱하는 성질만이 문제야. 그러다가 또 생각한다. 이 다정한 남자가 욱하는 이유는 내가 잘못해서야. 내가 좀 더 잘해야지. 그렇게 마스미는 맞으며 살아가다가 히라타를 만난다.
히라타와 마스미의 만남은 운명이었을까? 우연이 겹쳐진 사건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결코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만났고, 히라타는 생각을 한다. 아니 마스미에게 제안을 한다. 운명을 바꿔볼 생각이 없냐고. 아마도 이대로 간다면 마스미는 평생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당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돈을 주겠다. 이 돈을 갖고 싶다면,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라. 어딘가로 도망쳐도 좋고, 다시 돌아와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단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던 마스미는, 과연 도망치는 것이라도 할 수 있을까?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가혹하다. 남과 여.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그들의 운명은 참 서글프다. 그들의 운명이란 걸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우타노 쇼고는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타노 쇼고는 치밀하게 비밀과 트릭을 감추어두는 본격 미스터리의 거장이기도 하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마지막 순간에 트릭을 알아내고는 정말로 멍해졌다. 선입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니. 우타노 쇼고가 숨겨둔 비밀을 알아낸 순간 이야기의 색깔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그러니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에서도 이야기가 오로지 직선으로 흐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전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지 저는 ‘언해피엔딩’ 작품이 많습니다만, 해피엔딩 스토리를 기대하는 독자분들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보는 각도에 따라 어느 쪽일 수도 있는 결말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여러 의미에서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것들을 고려한 작품입니다. 지금, 독자 여러분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저의 감정 역시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합니다. 저는 즐거운 것일까요, 두려운 것일까요? (우타노 쇼고의 인터뷰 중에서)
우타노 쇼고의 말처럼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하나의 의미로 단정하기 힘든 반전의 반전을 가지고 있다. ‘인간사란 애초에 모순으로 차 있다. 히라타 마코토와 스에나가 마스미에 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마찬가지다.’ 하지만 본격 미스터리란 그 모순을, 인간의 힘으로 해명해보기 위한 미스터리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우타노 쇼고의 특기도 그것이다. 히라타도, 마스미도,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그것이 끔찍한 진실이건, 화사한 거짓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후회가 있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고.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단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과 태도가 더욱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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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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