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수, 강신주에게 클래식이란?
클래식, 처음에는 그냥 듣고 나중에는 알고 들어라
추상적인 음악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은 정상이다. 처음에는 공부를 많이 하지 말고 들어라. 누구의 무슨 곡인지만 인지한 채 나름대로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꾸 듣다 보면 언젠가는 작곡가가 생각한 대로 이끌린다. 그래서 음악이 강력한 것이다. 결국엔 음악이 이긴다.
주법을 지시하는 빠르기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gio sostenuto)’는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생경한 단어다. 하지만 그 언어를 선율로 옮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의 1악장은 대다수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음악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집중해서 듣기만 해도 우리는 음악과 만날 수 있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 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돌베개)』의 저자 문학수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30여 년간 클래식을 마음에 두고 경향신문에 다양한 문화 칼럼을 써왔다. 최근에는 채널예스에도 ‘내 인생의 클래식 101’이라는 칼럼을 연재 중이다.
그의 첫 단행본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기념하기 위해 신교동의 ‘오르겔하우스’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와 유쾌한 대화가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 자리에는 그와 같은 집필실을 쓰며 동고동락한다는 철학박사 강신주도 함께했다.
‘피아노와 언어는 몇 개의 알파벳과 건반을 조합해서 전달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글은 머리를 동원하는 반면, 음악은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음악이 마음에 확 들어올 것이다.’는 강신주의 말은 저자 사인회보다 작은 음악회 같은 이 자리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었다. 한편 행사의 주인공인 문학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오늘은 책을 팔려고 마련한 자리다. (웃음) 이 자리에 어떤 분이 오실까 궁금해 신청 댓글을 봤다. 대개 음악에 빠진 사람보다는 듣고 싶은 사람들이 90%였다. 클래식은 바로크 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클래식은 특정한 양식의 음악이다. 이 음악을 듣고 싶다는 분들께 묻곤 한다. ‘정말 듣고 싶으세요?’ 초장에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지만 클래식을 듣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니다. 클래식을 들으면 멋있어 보이고, 유식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선 클래식이 문화적 상징자본 역할을 한다.”
저자에게,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는 첫 책이다. 기자생활을 오래했고, 칼럼 연재도 많이 했지만 책으로 자신의 글을 내기는 부담스러웠다. 이때 용기를 준 사람이 철학박사 강신주. 그는 책 출간에 얽힌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집필의 어려움, 책을 쓰면서 어금니가 빠졌다
“책을 쓰면서 어금니가 한 개가 빠졌다.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토해냈으면 이 하나쯤은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 창작 등의 여러 가지를 하느라 진력을 쏟는 분들은 어딘가 하나 고장이 나야 정상이다. 처음에 책 제목으로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라는 말을 썼다고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모르면 어떤가. 책을 읽으면서 알면 된다. 이 제목을 지은 사람이 강신주다. 강선생에 대한 믿음과 철학자의 직관을 믿는 터라 이 제목으로 결정했다.”
아다지오는 안단테보다 더 느린 박자다. 소스테누토는 건반을 깊이 누르면 여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에게 중요한 말이고, 그는 앞으로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처럼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정신없이 들떠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깃발 같은 언어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날 행사에 동석한 강신주도 음악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펼쳤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리듬을 맞추지 못해서다. 음악을 잘 들으면 타인도 잘 듣게 된다. 음악을 많이 들으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 또박또박 진지하게 걸어나가면 꽃도 보이고 노숙자들도 보이고 여러 가지가 보인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처음으로 오르겔하우스의 작은 홀을 가득 메운 음악은 쇼팽의 발라드 1번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통해 많이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더 피아니스트’ 영화는 음악 그 자체다.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라는 실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나치를 피해 빈집에서 칩거하다가 독일군을 만나고 그의 명령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때 더듬더듬 일곱 마디를 치는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의 의미가 담겨있다. 연주가 중반을 넘어가면 스필만이 가진 피아니스트로서의 열정이 터져 나온다.
이어서 그는 발라드를 청중에게 설명했다. 발라드는 12세기 중세 프랑스에서 생기기 시작했다. 음유시인들이 류트같은 기타 하나를 들고 연주하던 것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로 퍼졌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음유시인이 유행했다. 발라드는 중세부터 낭만주의 시대까지 넘어와 시인들이 쓰는 담시(이야기시)형태로 자리잡는다. 노래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전설이나 서민들이 좋아하는 마님과 마당쇠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낭만주의시대를 지나, 문학작품에서 발라드 형태가 나온다.
쇼팽의 음악도 역시 이야기가 포인트다. 처음 시작하는 일곱 마디에는 어떤 뉘앙스가 있다. 폴란드의 민족시의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일곱 마디 후에는 아름답고 여성적인 선율과 격정적이고 남성적인 선율, 애원하고 호소하는 듯한 선율과 열정적이고 폭발하는 선율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된다.
이날 행사는 대담과 함께 클래식 감상도 병행했다. 러시아의 작곡가 무소로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었다. 이 작품은 묘사로서의 음악. 추상적인 관념을 형상화하는 표제음악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물이나 풍경을 묘사한다. 묘사음악의 대표작으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비발디의 ‘사계’가 있다. ‘전람회의 그림’은 원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1874년에 작곡된 것이다. 1920년대 초반 라벨이라는 작곡가가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문학수는 피아노 버전이 더 좋다고 밝혔다.
무소로그스키의 친구 빅토르 하르트만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는데 39살에 나이에 죽었다. 상심이 컸을 것이다. 그들의 친구들이 연 하르트만의 유작전시회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것이 ‘전람회의 그림’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드뷔시 등 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준 곡이다. 맨 처음 들은 곡은 프롬나드로 화자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현했다. 첫 번째 곡인 난쟁이(Gnomus)는 하르트만의 동명의 그림을 표현한 전형적인 묘사음악이다. 난쟁이가 뒤뚱거리는 듯한 비극적인 선율이 나온다. 다음에 나오는 프롬나드는 첫 번 째보다는 여린 느낌이다. 이렇게 회화작품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전시장 안에서 움직이는 나와 다른 관람객의 동선을 프롬나드라는 간주로 나타냈다.
두 번째 트랙 ‘고성’은 이탈리아의 옛 성 앞에서 음유시인이 대화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전체 열 곡 중 2곡 ‘고성’이 가장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기 편하다. 선율적으로 귀에 감기는 음악이다. 7번 트랙은 프랑스 도시 리모주의 시장의 활기를 표현한 곡이다. 관현악 버전보다 피아노 솔로가 느낌이 덜 하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이들은 20대부터 저자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50, 60대까지 다양했다. 음악에 대한 이들의 질문 역시 다채로웠다.
질의응답
Q : 이 책에 다양한 작곡가들이 나오는데 베토벤이 없다. 이유가 궁금하다.
문 : 굉장히 많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준비가 안 되었다고 느꼈다. 체계를 더 잡아야 하고 본이나 빈 근교, 초연 장소와 무덤도 한번 가보고 심정적으로 느낌을 더 받아야 쓸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베토벤만으로 한 권을 쓰고 싶다.
강 : 개인적으로 슈만, 베토벤이 빠져서 안타깝다. 마치 기차가 서울역을 그냥 지나친 것 같다. 써보라고 자꾸 권유했는데 그 무렵 문 부장님의 어금니가 빠졌다. 실제로 베토벤을 굉장히 좋아한다. 전쟁 났을 때 어떤 음반을 가져갈지 물었는데 베토벤 콘체르토 5번이라고 대답할 정도다.
Q. 강연을 듣고 음악을 정리하며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생활하면서 화가 올라올 때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은가?
문 : 그냥 화를 내라. 음악으로는 화를 삭히기 어렵다. 지금 독자분은 클래식애호의 2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 세상에 많은 음악과 음악가들이 있으므로 나와 코드가 맞는 음악과 레퍼토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 내 책은 결국 음악을 하는 ‘사람’의 얘기다. 토마스 만, 하루키 소설도 나름대로 그다움이 있듯이. 즐길 수 있는 코드를 찾아라.
Q. 음악가의 터를 따라간 경험이 있으신지?
문 : 베토벤은 의식적으로 그러고 싶은 계획이 있지만 사실 외국에 가서 찾아다니진 않다. 빈에 간 적이 있는데 묘지는 안 갔다. 다른 볼 것들이 너무 많더라. 시장풍경, 등등. 뵈르겐에도 일주일 있었는데 그리그 생가를 못 갔다.
Q. 클래식 제목을 외우기 쉽지 않다. 꼭 알고 들어야 하나?
문 : 알아야 한다. 지나가다 음악이 들어올 때 그냥 넘기면 인간의 저장장치에 한계가 발생한다. 기억하기가 점점 힘든 시기다. 시간, 에너지, 돈을 써야 기억에 더 남는다. LP를 5,000장 정도 소장하고 있지만 그 중 300장 정도 즐겨 듣는다. 300장의 레파토리를 찾기 위해 5,000장 투자를 한 것이다. 가급적 작곡가를 기억하고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작곡을 했는지 등의 전우좌우의 맥락을 이해하면 감동이 더 커질 것이다.
강 : 김춘수 시인의 시에서 ‘이름’을 불러줘야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고 했다. 이름을 모르면 식별이 잘 안 된다. 한 단계 진도를 나가려고 하면 이름붙이기가 중요하다. 언어라는 이렇게 묘하다. 지금 독자분은 음악을 치매상태에서 듣는 것 같다. 사랑했던 남자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음악에 진지하게 접근해봐라. 사랑하게 되듯 직면하면 외우게 된다.
Q. 소설과 달리, 음악은 설득이나 공감이 잘 안 된다. 리듬이나 선율이 좋아서 듣게 되는 것 같다. 두 번 째 들은 ‘전람회의 그림’ 역시 선율만 들으면 동물의 왕국인 줄 알았다.
문 : 추상적인 음악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은 정상이다. 처음에는 공부를 많이 하지 말고 들어라. 누구의 무슨 곡인지만 인지한 채 나름대로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꾸 듣다 보면 언젠가는 작곡가가 생각한 대로 이끌린다. 그래서 음악이 강력한 것이다. 결국엔 음악이 이긴다.
강 : 각 분야마다 평론가들이 있다. 절대적으로 옳은 평론이란 없지만 그 예술가에 근접한 건 있다. 다양한 해석은 있지만 더 나은 건 있다는 말이다. 쇼팽을 네모난 항아리라고 한다면 우리가 네모지게 만들어져야 끝난다. 음악이 이긴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바흐, 모차르트, 쇼팽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음악가부터 20세기를 빛낸 클래식 지휘자, 연주자들까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는 클래식 음악을 이룩한 이들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 “음악의 힘이란 강력하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말은 같았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곱씹어가며 느리게 읽는다면 수수께끼 같은 이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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