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노블이란?
만화책이다. 그럼 그냥 코믹북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그래픽노블이라 칭하는가?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장르라는 이미지를 벗고 싶어서? 코믹북이라는 이름 자체가 부끄러워서?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저 용어만 바꿔서 소설이라 우기는 차원도 아니다. 소설과도 다르고, 영화와도 다른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가진 것이 그래픽노블이다.
[출처 : marvel.com/images]
코믹북의 탄생
그래픽노블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만화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코믹북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생겨났는데, 한 비누 회사가 신문의 주간 연재만화들을 모아 판촉물로 나누어 준 것에서 비롯됐다. 이 판촉물에 대한 대중의 호감을 경험한 기업들이 기존 펄프 매거진 형식을 빌려 만화를 메인으로 삼고, 거기에 스포츠소식, 영화소식, 서부소설, 공상과학소설 등을 짤막하게 넣어 그다지 두껍지 않은 한 권의 잡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10센트라는 가격을 붙이고 최초로 판매되기 시작한 미국만화 1회분의 사양은 64페이지 풀컬러 형태였다.
이후 가장 적합한 사양을 찾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1938년에 슈퍼맨, 1939년에 배트맨이 탄생했다. 그들의 등장과 더불어 미국만화는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맞이했고 지금도 미국만화에서 슈퍼맨을 비롯한 슈퍼히어로 이야기가 차지하는 지분은 막강하다. 1941년 즈음 미국만화 1회분 사양은 현재와 같은 32페이지 혹은 64페이지 풀컬러로 규격화되었다. 한편 하나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포맷, 여러 캐릭터들이 형성한 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팀 포맷, 거기에 일 년 단위로 이야기를 정리하는 애뉴얼 포맷 등도 이 시기에 개발되었다. 이때부터 75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 바로 미국의 코믹북이다.
슈퍼맨 코믹북의 경우, 매달 20~30페이지의 내용에 광고 지면이 덧붙여져서 출판되는데, 언뜻 보면 우리나라 시사 주간지나 영화 주간지와 비슷한 생김새다. 이렇게 매달 한 권씩 나오는 슈퍼맨 코믹북에는 “슈퍼맨 #1”, “슈퍼맨 #2” 하는 식으로 번호가 매겨지고 이 한 권 한 권을 ‘이슈(issue)’라고 부른다. 간혹 더블 사이즈라고 해서 페이지 수가 일반 코믹북의 두 배에 달하는 60페이지 분량의 코믹북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모든 코믹북이 월 단위로 출판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코믹북은 두 달 간격으로 나오기도 하고, 이슈 한두 권을 월간으로 내고는 한참 뒤에 나머지 이슈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만화책이라고 하면 보통 100페이지가 넘는 단행본 형태에 익숙하다 보니 이런 얇은 만화책을 코믹북(책)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얇은 만화책에 코믹북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 미국에서 코믹북이라는 것이 태어날 때 그렇게 얇은 형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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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북과 그래픽노블의 차이 및 연관성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그래픽노블이란 용어는 전통적인 코믹북과의 구별을 위해 생겨났다. 그래픽노블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만화책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코믹북처럼 월간으로 출간되지도 않는다. 기본적으로 코믹북은 이슈의 마지막 부분이 다음 회에 대한 궁금증을 최대화하는 쪽으로 마무리되는 연재물이다. 반면 그래픽노블은 이야기가 완결된 구조다. 그래서 소설처럼 완결성을 지닌 이야기라는 뜻으로 그래픽노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블이라는 단어를, 수준 낮은 만화가 수준 높은 소설 흉내를 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완결성이라는 소설적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은 형태로 나오는 만화책을 코믹북. 이야기가 완결된 형태로 나오는 만화책을 그래픽노블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요즘은 코믹북도 꽤나 전략적으로 제작된다. 예를 들어 24페이지짜리 코믹북이 월간 단위로 6개월 동안 출간되면 24페이지?6개월=144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이 완성된다. 작가들은 그렇게 한 권으로 묶였을 때 내용이 완결될 수 있도록 6이슈, 혹은 8이슈, 혹은 12이슈 단위로 스토리를 쓴다. DC나 마블처럼 별도의 세계관이 있는 경우, 그 세계관의 큰 흐름을 따르면서 이야기를 완결시킨다. 이렇게 거대 세계관에 포함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스토리 아크’라고 한다. 정리하자면, 코믹북으로 출간되는 연재 이슈는 6개, 혹은 8개, 혹은 12개가 모인 시점에서 이야기가 완결되고 이 완결된 이야기를 별도로 스토리 아크라 칭하며, 이 하나의 스토리 아크를 책으로 묶어낸 것이 그래픽노블이다.
간혹 유럽 쪽에서 나온 만화책들에 대해 슈퍼히어로물 위주의 미국만화와 구별하기 위해 그래픽노블이란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완결성이라는 큰 범주에서 본다면 유럽의 만화들도 앞서 말한 그래픽노블 개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미국 온라인 서점은 코믹북 카테고리에 기존의 코믹북. 그래픽노블 카테고리에 스토리 아크를 묶은 책과 그 외에 책 형태의 만화책을 넣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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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그래픽노블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세계관이 방대해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던데, 대체 무슨 책부터 보지? 읽는 순서가 있다던데 뭣부터 봐야 하나? 같은 고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걱정들은 하지 않아도 된다. 즐길 마음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8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세계관을 하루아침에 마스터할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시대상황과 트렌드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 세계관이며, 결정적으로 어느 순간 초기화되는 게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미국만화 제작 시스템은 특이하게도, 캐릭터와 세계관이 회사 소유이고 그 안에서 수많은 작가들이 같은 캐릭터로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쓰는 탓에 시간이 지나면 이런저런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따라서 몇 년에 한 번씩 세계관을 왕창 뒤집어엎는 작업이 관례처럼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세계관에 연연할 필요가 줄어든 상황이 되었다. 읽는 순서라는 것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차례대로 읽으면 더 좋은 정도이지, 순서에 맞지 않게 읽는다고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 없는 수준은 아니다. 애초에 스토리 작가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그냥 일단은 편한 마음으로 책이 나오는 대로 보면 된다. 위에서 잠깐 말했듯이, 그러다 보면 작가들이 바뀌어 가는 세계관에 맞춰서 과거의 탄생기도 다시 정리해 주고, 지금까지의 줄거리도 정리해 주면서 친절하게 안내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대략적인 그림이 잡힌다.
다만 안타깝게도 감상의 난이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난이도가 생기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캐릭터가 너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크로스오버 이벤트이다. 미국만화에만 있는 독특한 이야기 진행 방식으로, 주연급 히어로들을 한데 모아 거대한 에피소드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 것이 ‘크로스오버 이벤트’이다. 크로스오버 이벤트가 진행될 때는 대개 그 이벤트의 메인 줄거리를 따로 만들고, 거기 맞춰 히어로 각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리즈들도 기존에 해 오던 이야기들을 잠시 중단한 채 메인 줄거리와 연관되는 이야기를 만든다.
결국 태생적으로 크로스 오버 이벤트는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게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 큰 스케일의 이야기들을 전부 다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당연히 아니다. 물론 다 읽으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 메인 스토리를 보고 거기서 관심 가는 캐릭터와 관련된 곁가지 이야기(‘타이인’이라고 한다.)들을 골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음 칼럼에서는 국내에 출간된 그래픽노블 위주로 감상 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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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그래픽노블 감상 팁에 대한 내용의 컬럼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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