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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를 위하여 -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아, 개나 말, 쥐들도 살아 있는데 하르트만이 죽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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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르크스키는 친구의 유작 가운데 10작품을 음악으로 옮겨놓습니다. 따라서 이 곡은 묘사음악으로서의 성격이 짙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한 ‘프롬나드’는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소르크스키는 전시회장에 들어선 관람객의 느릿한 발걸음을 함께 묘사하면서, 단순히 그림을 음악으로 옮겨놓는 것 이상의 ‘입체적 공간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 다시 말해 관찰자의 주관성까지 아울러 묘사하면서 한층 커다란 음악적 울림을 만들어냈던 것이지요.

4월입니다. 미술관 가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나뭇가지들이 봄기운을 품은 채 초록색 움을 틔우고 있습니다. 시립미술관 앞을 지나치는데 나들이 나선 사람들이 모습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띕니다. 그 모습을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다가, 러시아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출처: 위키피디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군대에 지원,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청산하고 농노 해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뒤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 지식은 빈약하였으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이것을 채워서 좋은 작곡으로 프랑스 인상파 등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더 널리 알려진 교향시 《성 요한의 민둥산의 하룻밤》,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이 있다. 전람회의 그림은 후에 쓰여진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 편곡도 유명하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리스링룸에 당도해 음반 한 장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습니다. 제가 음악을 듣는 방은 세 평 남짓합니다. 오디오도 그닥 비싸지 않은 ‘거의 골동품’이지요.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음반은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빅토르 에레스코(Victor Eresko, Viktor Yeresko)의 LP입니다. 이 피아니스트는 1942년 옛소련의 키에프에서 태어난 사람이지요. 스물한 살이던 1963년에 롱 티보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이 서방에까지 알려집니다. 레퍼토리는 주로 무소르그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이었습니다. 한국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저는 종종 듣습니다. 무뚝뚝한 러시아 남자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반을 상당히 깊게 짚습니다. 하지만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피아노를 딱딱 끊어 치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음악적 화자(話者)의 ‘걸음걸이’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합니다.

아시다시피 <전람회의 그림>은 10개의 회화 작품을 10곡의 음악으로 묘사해내고 있지요. 그런데 곡의 사이사이에 간주(間奏)의 성격을 갖는 ‘프롬나드’를 배치해 놨습니다. 프롬나드(Promenade)라는 것은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를 뜻하지요. 옛날 우리 선비들이 조용히 시를 읊조리면서 천천히 걷는 것을 미음완보(微吟緩步)라고 했는데, 프롬나드는 바로 그 ‘완보’와 같은 의미입니다.

자, 때는 1873년입니다. 무소르크스키가 서른네 살 때의 일입니다. 가까운 친구였던 빅토르 하르트만(1834~1873)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화가이자 건축가,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하르트만은 무소르크스키보다 다섯 살 많았던 친구였지요. 마흔도 되기 전에 동맥류 파열로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이 친교를 맺은 것은 1870년부터였으니, 만난 지 오래 된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소르크스키는 하르트만의 예술적 식견과 재능을 매우 높게 평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하르트만의 부고를 전해 듣고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다고 하지요.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개나 말, 쥐들도 살아 있는데 하르트만이 죽다니!” 동물애호가들이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한데 ‘개나 말, 쥐들도 살아 있는데’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입니다. 일종의 풍유(諷諭)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듬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친구들의 주선으로 하르트만의 추모전이 열렸습니다. 상당히 규모가 컸던 전시회였습니다. 수채화, 유화, 건축 스케치 등 약 400점의 작품이 전시됐다고 합니다. 물론 무소르크스키도 그 전시회에 다녀왔겠지요. 당시의 그는 러시아 시인 푸슈킨의 대하역사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오페라를 작곡해 막 초연을 끝냈을 때였습니다. 연주시간이 3시간에 달하는 대작을 써냈던 무소르크스키가 곧바로 작곡에 돌입한 작품은 의외로 규모가 아담한 곡이었지요. 바로 친구의 추모전에 다녀온 직후에 작곡을 결심한 피아노 독주곡 <전람회의 그림>이었습니다.

무소르크스키는 친구의 유작 가운데 10작품을 음악으로 옮겨놓습니다. 따라서 이 곡은 묘사음악으로서의 성격이 짙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한 ‘프롬나드’는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소르크스키는 전시회장에 들어선 관람객의 느릿한 발걸음을 함께 묘사하면서, 단순히 그림을 음악으로 옮겨놓는 것 이상의 ‘입체적 공간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 다시 말해 관찰자의 주관성까지 아울러 묘사하면서 한층 커다란 음악적 울림을 만들어냈던 것이지요.


첫번째 프롬나드는 소박하면서도 힘찬 건반의 울림으로 전시회장에 들어선 느낌을 전해줍니다. 이어서 뒤뚱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과 서글픈 비애감이 어우러지는 1곡 ‘난장이’(그노무스, Gnomus)가 흘러나오지요. 그리고 또 한번의 프롬나드가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첫번째 프롬나드보다 좀더 부드럽고 느긋합니다. 이어지는 2곡 ‘옛성(古城)’(Il vecchio castello)은 <전람회의 그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입니다. 하르트만이 그린, 이탈리아의 오래된 성 밑에서 음유시인이 노래하는 모습을 음악으로 옮겨 놓은 곡인데 러시아적 음조가 매혹적으로 흘러나옵니다.

세번째 프롬나드는 단호하고 장엄합니다. 이어지는 3곡 ‘튈르리 궁전’(Tuileries)은 정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밝고 화사하게 묘사하고 있지요. 활달하고 귀여운 느낌의 악상이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4곡 ‘비들로’(Bydlo)에서 우울하게 가라앉습니다. 비들로는 소가 끄는 달구지를 뜻하지요. 애상적인 선율이 다소 무겁게 흘러가다가 마침내 클라이맥스, 그리고는 스르르 사라지듯이 곡이 끝납니다.

네번째 프롬나드는 그 애상적인 바통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섬세하고 느린 터치로 단조의 선율이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템포가 빨라지면서 5곡 ‘껍질을 덜 벗은 햇병아리들의 발레’(Ballet of unhatched fledglings)로 연결되지요. 병아리들이 삐악거리며 뛰노는 모습을 앙증맞고 귀엽게 묘사합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6곡 <사무엘 골덴베르크와 슈밀레>(Samuel Goldenberg and Schmuyle)는 연극적인 장면이 펼쳐지는 재미있는 음악입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한 사람은 가난뱅이인 두 유태인’을 묘사하고 있는 곡이지요. 부자 골덴베르크는 굵은 저음(低音)으로 건방을 떠는데 가난뱅이 슈밀레는 고음으로 뭔가를 애걸합니다. 뭘까요? 아마 돈을 꿔 달라는 것 같기도 하고, 이자를 못 내서 사정하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슈밀레의 애걸복걸은 효과가 없어 보입니다. 골덴베르크의 오만한 저음이 슈밀레의 안타까운 재잘거림을 순식간에 덮어버리고 말지요.

이어서 다섯번째 프롬나드. 한데 프랑스의 작곡가 라벨은 1922년에 이 피아노 독주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면서 바로 이 다섯번째 프롬나드를 생략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많이 듣는 관현악 버전의 <전람회의 그림>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7곡 ‘리모주의 시장’(Limoges)은 프랑스 리모주 시장에서 벌어지는 아낙네들의 다툼, 혹은 수다를 묘사합니다. 빠르고 리드미컬한 피아노 터치가 코믹하게 들려오지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배경음악으로 쓰여도 좋을 듯한 곡입니다.

하지만 8곡 ‘카타콤’(Catacombae)은 무겁고 엄숙합니다. 아시다시피 카타콤은 로마시대의 지하묘지이고,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묻혔던 곳이지요. 피아노가 화음을 묵직하게 짚으면서 신비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어서 등불을 들고 지하묘지에 서 있는 그림 속의 주인공 하르트만의 모습을 빠르게 반복되는 트릴 주법으로 묘사하지요. ‘죽은 자의 언어로 말하는 죽은 사람과 함께’라는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제목을 별도로 표기하지 않는 음반들도 많습니다. 8곡 ‘카타콤’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이지요.

9곡 ‘닭다리 위의 오두막’(The Hut on Fowl‘s Legs)은 ‘바바야가의 오두막’이라고도 불립니다. 바바야가는 러시아 민담에 등장하는 마녀 캐릭터지요. 하르트만이 그린 바바야가의 오두막 아랫쪽에는 닭의 다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원래는 독특한 모양의 시계를 디자인한 데생작품인데, 매우 만화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음악은 마녀 바바야가가 뭔가 화를 버럭 내는 듯한 분위기로 시작하지요. 빗자루를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습, 마녀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0곡 중에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곡은 마지막으로 연주되는 ‘키에프의 대문’(The Heroes’ Gate at Kiev)입니다. 당시 키에프시(市)는 도심에 웅장한 문(門)을 건설할 예정이었습니다.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화가 하르트만은 이 대문을 상상해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놓았지요. 러시아식의 둥근 지붕과 뾰족한 첨탑, 말을 타고 성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무소르그스키는 <전람회의 그림>의 마지막 방점답게 러시아적 선율미와 웅혼한 기백이 넘치는 스펙터클을 펼쳐내고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입니다. 전곡 연주시간은 약 35분. 앞서도 잠시 말했듯이, 이 곡은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 편곡의 두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이면 피아노 독주를 먼저 들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p.s.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음반들은 추천음반 목록에서 제외했습니다. 예컨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의 1958년 소피아 실황 같은 경우입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51년/SonyMusic

오래 전 녹음인 탓에 음질은 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호로비츠가 카네기홀에서 1951년 연주한 <전람회의 그림>은 빼놓고 갈 수 없는 녹음이다. 매우 호로비츠적인 연주다. 어떤 이들은 악보에 대한 자의적 해석, 말하자면 호로비츠 특유의 즉흥성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생각하자면 이 연주의 매력으로 직결된다. 이렇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호로비츠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젊은 시절의 그는 야생마처럼 질주하면서 음량과 테크닉의 절정을 보여준다. <전람회의 그림>이 함축한 극과 극의 스토리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초절기교의 연주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ㆍ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1982년/Decca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 편곡이 함께 담긴 음반이다. 일단 아쉬케나지의 피아노 독주. 호로비츠와 달리 매우 정석적인 코스를 고수한다. 피아노를 불태워 버릴 듯한 광기를 보여준다거나, 듣는 이에게 전율을 전해주는 연주는 아니다. 오래 들어도 물리지 않는 중립적인 연주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음반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다. 특히, <전람회의 그림>을 처음 구입하는 분들에게 이 음반을 권한다. 피아노 앞을 떠나 오케스트라 포디엄에 선 아쉬케나지는 라벨의 광채감 넘치는 편곡을 거부했다. 자신이 직접 편곡한 관현악으로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하면서 ‘러시아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미하일 플레트네프(Mikhail Pletnev)/1990년/EMIㆍVirgin

깔끔한 음질로 맛볼 수 있는 피아노 독주 버전이다. 플레트네프는 이 곡의 심리적 해석과 스펙터클한 표출을 모두 장악한 연주를 들려준다. 음반에 담긴 연주를 다 듣고 나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느낌에 빠질 수도 있겠다. 섬세한 부분은 물론이거니와, 마지막 곡 ‘키에프의 대문’에서 보여주는 장쾌한 타건은 온몸을 두드리는 음향적 쾌감을 전해준다. 2장의 CD에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op.66’와 ‘여섯개의 소품 op.21’, ‘사계 op.37’ 등이 커플링됐다. 가격도 착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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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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