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었다. 지금, 어딘가에 간다면 그것은 북유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료를 찾고 계획을 세우면서 점점 확신이 짙어졌다. 북유럽을 선택하길 잘 했다고. 하나둘 명확한 이유가 생겨났다.
먼저, 북유럽 정도는 갈 때가 되었다는 것. 딱 까놓고 말하자면 다른 곳은 지루했다. 이제 웬만한 곳은 나도 주변인도 다들 다녀와버렸다.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바르셀로나, 로마, 홍콩…. 어디를 간다고 해도 “응, 거기 좋지~ 어디어디 가봐. 어디어디는 별로던데” 정도의 반응밖에 기대할 수가 없다. 나부터가 그러하고. 어딜 가면 부러움을 사면서도 로망이 가득하고 적당히 놀며 쉬며 완전 멋진 여행을 했다고 소문이 날까, 하고 생각한 끝에 떠오른 곳이 북유럽이라고 말하면 “이 여자, 엄청난 속물이군”이란 말을 들을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뭐, 사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제대로 된 속물이고 내가 열심히 번 돈 써서 내가 가는 여행 다녀와서 질투를 좀 사고 싶었다. 쉽게 하는 여행이 아닌데, 기회비용이 훌륭해야 될 것이 아닌가. 내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아직 여행객들의 때가 덜 묻은 청아하고 고급스러운 그곳에 발을 들여놓고 싶었다.
그리고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어느 유럽이 우리나라보다 여유롭지 않겠는가마는 그중에서도 북유럽이 갖고 있는 여유는 느낌이 다르게 다가왔다. 적도 가까이에 있는 나라들이 지닌, 좋은 날씨로 인한 태생적 게으름과는 또 다른 여유 말이다. 아둥바둥 버둥대지 않아도 기본적인 삶을 보장받은 자들의 여유. 거대한 자연에 적응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여유. 복작대는 인간들 속을 헤집고 다닐 필요가 없는 공간의 여유.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릴까 초조해하며 가방을 움켜쥘 필요가 없는 여행자로서의 여유. 그저 적당한 곳에 앉으면 좋은 공기를 마시며 편안히 쉴 수 있는 여유. 그런 여러 가지 여유로움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의 삶이란 얼마나 품격이 넘쳐 보이는가. 이 정도 나이에 몇 년 사회생활을 해보았으면 나도 모르게 점점 회색으로 썩어가는 내 젊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잠시나마 그 상쾌한 곳에서 지구 북쪽의 파란색 숨을 들이마시며 그들의 여유만만한 라이프스타일을 구경해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삶에도 조금의 휴식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공부하듯 종종걸음을 치는 고행 말고 마음의 정화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말이다.
그쪽 나라들이 온통 훌륭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멋진 구석이다. 몇 년 전부터 우후죽순 눈에 띄는 북유럽 관련 책들과 북유럽 디자인 전시회들과 북유럽에서 온 예쁘장하지만 과하지 않은 물건들을 보며 침을 흘린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말이다. 여행 준비를 하느라 이런저런 북유럽의 관광정보 관련 사이트와 유명 브랜드들의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도 흡족하기가 그지없었다. 어찌 그리 사이트들도 감각 있게 잘들 만들어놓았는지 원. 게다가 그들은 예쁜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동시에 스스로 우월한 외모까지 가지고 있다! 나처럼 아름다운 인간을 관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그 종족과 가까이 해볼 이유가 충분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다녀온 후에 나의 심상은 매우 흡족했다. 그곳은 신기하고 희한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과 날씨를 가졌으며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외모를 가진 인간들이 넘쳐났다. 생각 이상으로 충실한 볼거리들과 기대를 충족시키는 여유로운 분위기가 여행을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다. 유명 관광지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쾌한 문제점들이 아직 스며들지 않았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복작대는 곳을 방어적인 자세로 돌아다니는 행태를 보이지 않아도 되었다(복대를 차고 겨드랑이에 가방을 끼어 메고 지퍼를 잡고 다니는 그런 것 말이다). 굳은 마음과 엄청난 결심으로 이를 악물고 무언가에 도전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북유럽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부러움을 한껏 살 수 있었고, 다녀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친구들의 빛나는 눈을 보며 흐뭇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가고 싶어졌다.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서 세련된 여유 한 조각을 더 훔쳐오기 위해.
사실, 나는 그들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멋져 보이는 삶을 잠시나마 구경한 것에 만족한다. 어차피 며칠, 몇 달, 몇 년 여행한다고 현지인이 될 수는 없다. 그저 타인이고 여행자일 뿐. 굳이 그들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현지인처럼 여행하기? 현지인이 되는 순간 나의 평소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들에게도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지루한 삶이 분명 있을 터인데. 나는 여행을 통해 인류애를 느끼고, 깊은 사유를 하며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숭고한 철학자가 아니다. 그저 여행자의 입장으로 새롭고 신선한 것을 당당히 즐기고 와서 나의 삶에 적당한 활력을 불어넣고 싶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도 여행자인 나의 신분을 부러워할 것이다. 내가 자신들에게서 무엇을 훔쳐가려는지 모른 채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뒤집어서, 나에게 돌아갈 삶이 없다면? 그것만큼 슬픈 것이 또 있을까? 어차피 모든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떤 루트로, 어디에 가고, 무엇을 보아야 할까? 자신의 취향에 맞게 끈덕지게 찾아 헤매면 어느 순간 적당한 여행의 길을 만나고 자신만의 여행을 디자인하게 된다. 누군가가 말해주는 보아야 하고 가야 하는 것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들의 말을 스리슬쩍 흘려들은 후 마음을 잡아당겨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에 가면 될 일이다. 북유럽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 100선,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20개의 명소. 뭐 이런 건 없다는 말이다. 적당한 곳을 쌔끈하게 보고 와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 장땡이라 생각한다.
아마 우리에게 대단한 여행이란 없지 않을까.
적당하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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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유럽처럼 김나율 저/이임경 사진 | 네시간
디자이너이며 보통의 여행자인 두 저자가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스톡홀름, 덴마크 코펜하겐 세 도시로 북유럽 여행을 떠났다. 여정에 얽힌 유쾌한 이야기, 먹고 즐기고 쉬기에 유익한 정보 등 여행지로서의 북유럽을 담으며 그들의 공간뿐만 아니라 디자인을 필두로 독특한 문화와 날씨, 물가 등 다양한 관심 키워드를 다룬다. 보통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적당히 놀며 쉬며 접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통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북유럽 스타일의 감성으로 삶을 덜어내고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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