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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는 가운데 한국프로야구가 출범되고
출판, 대중음악,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가 양적으로 팽창하던 그 시절.
부동산 투기 열풍과 본격적 강남 개발로 사회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사회 모든 분야갸 격하게 요동치던 시대였습니다.
<채널예스>는 1990년대를 탐험하는 기획을 거쳐 이제는 1980년대를 호출해봅니다.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이제는 마음껏 누려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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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과 5.18 민주화 운동(1980년)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이 피살된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제 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민들은 최대통령을 매개로 하여 장차 유신체제와 군사 통치가 종식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최대통령이 등장한 지 6일만인 12월 12일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9사단장 노태우 소장, 그리고 보안사령부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이 벌어지고, 장차 권력을 잡으려는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1980년 5월 14일부터 서울에서는 ‘민주화 대행진’을 표방한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져 서울시내가 시위대로 가득찼다. 5월 15일에는 10만명이 서울역 앞에 모여 시위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시위는 4.19 이후 최대규모로서 ‘서울의 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정지시켰다. 서울의 봄이 무참히 끝났다. 대학에는 무장군인들이 진주하고,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체포되고, 야당총재인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되었다. 신군부는 이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두환이 위원장이 되었다.
민주화의 기대가 무산되자 국민들의 실망이 커가는 가운데 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신군부는 이를 진압시키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학생과 광주시민들은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과시가전을 벌이는 사태까지 나타나고, 다른 인근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결국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광주는 5월 27일 평온을 되찾았으나, 수백명의 사망자를 낸 비극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컬러TV 대한민국 내 시판 개시(1980년)
1959년에 미국의 주가 된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1965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했다. 아시아 최초로 컬러방송을 실시한 일본에서는, NHK, 도쿄 방송, 요미우리 TV에서 1960년 9월 10일부터 NTSC 체계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했다.(NTSC-J라 불린다.) 필리핀은 1966년 아시아에서 NTSC 기준에 있는 컬러 텔레비전을 방송하여 일본에 이어서 컬러방송을 하는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1977년부터 이미 칼라 텔레비전을 제조하여 수출하고 있었으며, 방송국들도 이미 1974년부터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로 방송하지 못하였지만, 제5공화국 3S정책 일환으로 시작하게 된다. 1980년 12월 1일에 KBS 1TV에서 (단,KBS 2TV 와 MBC는 1980년 12월 22일부터) 대한민국 최초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완전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은 1981년 1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뽀뽀뽀 방송(1981년)
《뽀뽀뽀 아이 조아》는 대한민국의 방송국인 MBC에서 제작ㆍ방송하는 유아 교육 프로그램이다. 원래 이름은 《뽀뽀뽀》였다가, 2007년 4월 9일부터 《뽀뽀뽀 아이 조아》로 바뀌었다. 1981년 5월 25일에 아침 방송을 시작하면서 첫 방송되어 2012년 12월 31일 현재 방송 횟수는 7665회이다.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로 시작하는 주제가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93년 봄에는 시청률 하락으로 종영되기도 했으나 시청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3주 만에 부활했다. 현재는 프로그램 명칭이 바뀌었지만 기존 주제가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자는 뽀미 언니라고 불렸는데, 지금까지 24명이 이 역할을 맡았다.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라고 시작하는 주제가는 체육행사 응원가, 심지어 시위대 운동가요로까지 변주됐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노래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는 뽀뽀뽀의 초대 PD 이재휘로 출근할 때 가지말라고 울던 자신의 딸에게 영감을 받아 작곡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뽀뽀뽀’ 노래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냐 하면, 유치원은 물론이고 군인들도 군대에서 군가로 부를 정도였어요. 심지어 북한에서 남파 간첩들 교육시킬 때 가장 먼저 가르친 노래가 ‘아리랑’과 ‘뽀뽀뽀’였다고 하더군요.”라고 밝혔다.
프로야구 출범(1982년)
한국 야구 선수권 대회(韓國野球選手權大會)는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 리그이며, 흔히 한국 프로 야구로 알려져 있다. 1981년 12월 11일 OB 베어스,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 , 삼성 라이온즈, 삼미 슈퍼스타즈, 롯데 자이언츠 등 총 6개 구단이 한국 프로 야구 창립 총회에 참가하여 프로 야구 출범을 공표하여 구체화되었고, 1982년 3월 27일 서울특별시의 동대문야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개막 경기로 시작되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하여, 소위 ‘3S 정책’(Screen, Sex, Sports) 을 이용했다. 1981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정서, 여가선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프로 스포츠 한번 해봐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실무를 담당한 이상주 당시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 비서관은 대통령의 지시대로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를 타진하고, 당시 야구인이었던 이호헌과 이용일이 18쪽 분량의 ‘프로야구창립계획서’를 만들게 되었다. 축구계가 프로화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보고한 것과 달리 야구계는 “정부 보조 한 푼 없이 프로 야구를 출범시킬 수 있다”라고 보고했고, 이 제안이 당시 집권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되었다. 이후 각 지역을 연고지별로 분할하고 창단 기업을 물색하게 되었다.
프로 야구에 참여할 기업을 선정할 때는 모기업의 조건은 재무구조가 건실한 상시노동자 3만명 이상의 대기업이었다. 초기 기획단계에서 연고지 배정은 서울은 럭키금성, 인천, 경기, 강원은 현대, 광주는 삼양사, 부산은 롯데, 대전은 동아건설이었다. 그러나 삼양과 동아건설은 서울 연고권을 계속 요구하다가 거절당했고, 현대와 럭키금성(현 LG)는 손실이 큰 프로 야구단 운영을 꺼렸다. 한국화약그룹에도 의사를 타진했으나 거절(1986년 충청에 돌아오게 된다). 프로 야구 창설이 위기에 봉착하자 정치인들은 자신의 혈연,지연, 학연들을 모조리 동원해 그룹총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그에 의해 두산그룹이 자사 주류 OB의 이름을 내걸고 충청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OB는 3년후 서울 연고이전을 약속 받은 상태로 프로 야구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정계인물들과 관계가 돈독했던 해태의 박건배 회장이 전라권에 해태를 참여시켰다. ‘사고지역’으로 분류되던 인천,경기,강원 지방은 의외의 신진기업인 삼미가 받게 되었다.
이산가족찾기(1983년)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KBS 텔레비전에서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를 프로그램 타이틀로 잡아 시작한 생방송을 말한다. 패티 김(본명 金惠子)의 애절한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KBS가 기획한 것으로, 애초에는 7월 1일 새벽 1시까지 3시간 정도 방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산가족을 찾는 행렬이 예상을 뛰어넘어 장사진을 이루자 KBS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5일 동안 ‘이산가족찾기’라는 단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를 찾은 이산가족만 5만여 명에 달했고, 총 500여 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을 하였다. 또 78%라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한편 전파를 타고 세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생방송 과정에서 에피소드는 물론,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아 접수를 하러 왔다가 공개홀에서 가족을 찾은 이가 있었는가 하면, 3번씩이나 동명이인으로 확인되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이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됨으로써 단일 주제 생방송 기록을 남겼고, 총 10만 952건의 신청건수가 접수되어 1만 180여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
1990년 1월에는 사할린방송국-서울-대구KBS를 연결하는 3각 위성방송을 통해 ‘사할린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간 사할린섬 동포와 국내 거주 18가족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극적으로 상봉하기도 하였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조성 완료(1987년)
1975년에 강남구가 탄생하고 1976년에는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 1973년 5만30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78년에는 21만6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공동주택 건설과 함께 민간업체에 의한 아파트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75년 4월, 제1차 사업이 시작됐다. 현대건설은 2년 전 서빙고아파트 건립에서 자신감을 얻어 본격적으로 주택 건립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주택사업부를 확대 발전시켜 1976년 3월, 현대산업개발의 전신(前身)인 한국도시개발을 설립했다. 이에 따라 1~3차 사업까지는 현대건설이 조성을 맡았고 4~14차는 현대산업개발이 사업을 주도하게 됐다. 1,2차 단지는 교통이 불편하고 기반시설이 부족한데다 홍보도 잘되지 않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건설’이라는 브랜드와 강남 아파트 열기를 타고 압구정으로 중산층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7차 단지까지 입주가 끝난 압구정 현대는 이미 ‘명품’ 아파트로 명성을 떨쳤다. 1977년에는 현대그룹 계열 직원에게 공급하기 위해 건립한 아파트를 사회 고위층에게 특혜 분양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현대아파트가 성공하자 압구정동 주변에는 라이프주택을 비롯해 한양과 우성, 삼익주택, 삼호, 미성 등 다른 건설사들도 잇따라 아파트를 건설했다. 이는 강남 아파트에 대한 투기 바람이 몰고 온 현상이기도 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87년 4월 14차까지 총 6,148가구의 대단지로 조성됐다. 주택공사가 건립했던 잠실이나 반포와 달리 중대형 면적이 많아 명실공히 중ㆍ상류층을 위한 대단지 고급 아파트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민간이 건립한 최대 고급 단지라는 것 외에 건축 기술 측면에서도 얘기할 사안이 많다. 1970년대엔 15층 아파트가 드물었다. 첨단 건축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고층 아파트를 건립하기 위해 새로운 설계와 구조, 시공기술을 모두 동원했다. 이런 공법들은 그 뒤 다른 건설사들이 모방해 한동안 아파트 건축 기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대산업개발은 30년 사사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파트 시공에서 (그 때까지)국내 보편적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 라멘 구조에서 탈피해 무량판(FLAT-SLAB)과 조립식(PRE-FAB) 구조 등 선진공법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인원 감축 작업의 표준화를 기하고 과학적 공정관리를 통해 낭비 요소를 제거했다.”
6월 항쟁 (1987년)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2007년 6월 10일 정부 차원의 첫 기념식이 열렸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大韓航空 858便 爆破事件, Korean Air Flight 858 Bombing)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가 1987년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 폭파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일으킨 마지막 항공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8년 9월까지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 하였으며,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한국정부의 수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회 일각에서는 블랙박스가 발견되지 않았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고 사망자의 시체와 유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등의 이유로 당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이 사건을 “7대 우선조사대상 사건”으로 선정하여 조사하였고 2006년 8월과 2007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이 사건에 대해 “조작이 아니다”라고 조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88 서울 올림픽(1988년)
1988년 하계 올림픽(영어: 1988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IV Olympiad)은 1988년 9월 17일-10월 2일의 16일 동안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12년 만에 IOC 회원국중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었다.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가 공식 주제곡이었으며,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이 있다. 현재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던 나라들의 국기들은 올림픽공원에 게양ㆍ보관되어 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놓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1980년 하계 올림픽과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놓고 각각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불참하면서 반쪽짜리 대회가 개최되었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단 국가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당시 공산 국가와 외교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은 이들 공산 국가의 참가를 막기 위한 활동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산국가중에서는 중국이 1984년 7월, 동독이 1985년 3월에 참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당시 소련과 별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공산국가였고, 이미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올림픽 보이콧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한편으로는 1990년 아시안 게임 유치 문제 등을 의식해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1984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자국 스포츠계 인사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2회 연속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동유럽 공산국가나 그 외의 친소(親蘇) 공산국가의 참가 역시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소련측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침내 소련의 참가 선언을 이끌어냈고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공산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외의 몽골ㆍ라오스ㆍ베트남 등의 아시아 공산국가와 친북한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면서 12년만에 동서 양 진영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면서 참가국 수는 사상 최대인 160개국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부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아 IOC 전 회원국 참가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서 끝까지 문호를 개방했고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참가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도리어 뻔뻔스럽게도 전 경기의 50%를 평양에서 개최할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쿠바, 마다가스카르, 세이셸 등의 일부 공산 국가가 동참하면서 보이콧했다. 고립 성향의 공산국가 알바니아 역시 불참하면서 알바니아는 4회 연속으로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캄보디아는 한국의 수교국이었으나 당시 혼란한 현지 사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IOC 회원국 중 7개 국가가 불참하였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IOC에서 축출된 상태였으므로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나미비아는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어 IOC에 가입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또, 독립국인데도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코모로,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나우루, 키리바시, 투발루, 세인트키츠 네비스, 도미니카, 세인트루시아는 당시 IOC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참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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