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 공책 핸드폰을 샀을 때,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림 그리기였다. 핸드폰 광고에도 나오는 창작력을 자극시키는 알록달록한 결과물들은 일상 생활에서의 그림 그리기라는 부푼 꿈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미대출신인 동생들의 작품이 새 핸드폰에 처음으로 담긴 그림들이 되었고, 그녀들은 정말이지 쓱싹쓱싹 단번에 주저함 없이 그려내었다. 어찌했든 나도 집 쇼파 쿠션의 그림을 따라 그렸으나, 그리는 것만 해도 힘겨웠었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보고 또 보고 해서 부단히 노력해서 그렸지만 훌륭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의 첫 장을 펼치면, 주인공인 데이비드 호크니가 저자에게 ‘오늘 새벽을 당신에게 보내줄께요.’ 라는 메시지와 함께 보낸 아이폰으로 그린 그림이 나온다. 아이폰이라면 갤럭시 공책에 있었던 펜도 없었을 텐데, 하나의 멋진 작품이라고 할 만한 자줏빛 새벽이 아이폰 속에 담겨 있었다. 이래서 화가라는 직업이 있나 보다 라는 절망감이 바로 이 책의 첫 장을 펼쳤을 때의 소감이다.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명이다. 그가 그렸던 수영장 시리즈의 그림 한 컷은 내 메신저의 프로필 이미지며, 각종 블로그나 SNS상의 이미지는 그의 그림으로 대표되어 있다. 물론 유명한 회화 작품들도 있지만, 다른 방면으로도 많은 활동을 해내고 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도 자주 소개되는 ‘피어블로섬 하이웨이’ 와 같은 포토콜라주 작품이나 <마적>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같은 오페라의 무대 디자인,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한 과거 거장들의 그림 기법을 하나의 이론으로 제안하여 미술계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명화의 비밀』 (한길아트) 이라는 책으로 변역되었다.) 이렇듯 왕성한 호기심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이 화가를 저자이자 오랜 친구인 ‘마틴 게이퍼드’가 인터뷰한 내용을 모은 것으로, 호크니의 작품 활동과 견해를 상세하게 소개해 준다.
드라마나 소설의 작가들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동, 말투 등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또한 이와 같았다. 호크니는 ‘나는 항상 그림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림이 없다면, 누가 무엇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며, 그렇기에 이를 담아내는 화가들 또한 세상을 보는 견해나 방법에 따라, 그림의 표현방법이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작업실이 있는 영국의 브리들링턴에 머물면서 주위에 있는 숲과 나무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려낸 호크니의 작품들이 있다. 어느 날은 바람의 변화, 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나무나 풀잎들을 하루 종일 관찰만 하다가 머리 속에 담아두고는 그리지도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관찰하는 작업을 통해 남들은 평범하게 여겨 지나칠 수 있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을 우리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비 오는 밤의 브리들링턴 산책로, 2008
클락 부부와 퍼시, 1970-71
호크니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등의 최신 기기로 실험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편견이 없다. 보통 회화 화가들은 사진이나 디지털화된 작업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기 마련인데 호크니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패드를 최적의 스케치북으로 애용하며 일상생활 속에서의 장면들을 즉각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편리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포토콜라주 기법과 같이 사진이나 영상에도 많은 관심이 있어서 이를 이용한 작품 활동을 했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가장 끌었던 것은 바로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고 사진과 같은 이음매를 발견하고는 이를 하나의 이론으로 확장해 나가는 그의 넓은 지식과 실험정신이었다. 그는 실제로 페르메이르(베르메르), 카라바조, 레오나르도 등의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한 결과 ‘카메라 옵스큐라’ 라는 렌즈를 이용한 광학도구를 그림을 그릴 때 이용했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이 이론은 물론 미술계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관련도서 ‘명화의 비밀’) 찬반 양론이 뜨거웠던 하나의 이론이었지만, 책 속에서 호크니가 말한 카라바조의 그림 <로마의 천재>라는 작품을 감상하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심하군 (C’est terrible)!” 이라고 말했다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과의 일화는 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위트있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물론 이렇듯 그림을 그리는 기술적인 방법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림과 사람, 그림과 세상에 대한 생각들도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카메라, 아이패드 등의 캔버스와 물감이 아닌 최신장비들로도 작품을 만드는 호크니지만, 사진과 3D TV 와 같은 기술의 발전이 이룩해낸 결과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크니의 많은 생각과 단면을 통해서 감탄하는 부분은 늘 끊임없이 연구하고, 궁금해하고, 도전하는 젊은이보다 더한 열정이었다. 지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삶에 대한 기쁨을 작품으로 표현해 내고자 하는 어느 노화가의 열정이 책 표지에는 오렌지색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멜빵 바지를 입고 있는 76세의 할아버지를 15세의 호기심 많은 소년으로 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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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그림이다 마틴 게이퍼드 저/주은정 역 | 디자인하우스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저자가 10여 년에 걸쳐 1960년대 영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이자 포토 콜라주의 창시자, 일러스트레이터, 한화가, 무대 미술가 등 영국 최고의 화가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데이비드 호크니와 만난 대화한 내용을 기록해 출간하였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수영장 그림 시리즈나 거대한 풍경화, 포토 콜라주 작품 등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매체를 통해 미술작품의 실험을 계속해서 시도해왔다. ‘사람과 그림’이라는 평생의 화두를 가지고 그림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그의 내밀한 작품 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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