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1949~)의 『콘트라베이스』라는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이 소설은 독일 작가 쥐스킨트가 무명 시절을 청산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어느 극단의 제의를 받아 모노드라마(1인극)을 염두에 두고 썼던 작품인데, 다행스럽게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쥐스킨트라는 네 글자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이듬해에 발표한 『향수』는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소설이었지요. 30개가 넘는 나라에 번역 소개되면서 그를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한데 엄밀하게 따지면 ‘콘트라베이스’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탈리아식으로는 ‘콘트라바쏘’, 영어식으로는 ‘더블베이스’로 써야 합니다. 쥐스킨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발음하자면 ‘콘트라바스’(Der Kontrabass)가 맞겠지요. 아마 출판사에서 편의상 ‘콘트라베이스’로 표기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는 사랑스러운 소설입니다. 일단 분량이 짧아서 단숨에 읽기에 좋구요, 다루고 있는 내용과 주제가 제법 묵직해서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마 쥐스킨트는 독일 작가답게 음악을 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 만(1875~1955)처럼 본격적으로 음악에 몰입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 곳곳에 음악적 표현이나 음악에 대한 언급들이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지요. 한데 하루키가 매우 표피적으로 음악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것과 달리, 쥐스킨트는 훨씬 본질적으로 음악에 접근합니다.
예컨대 『콘트라베이스』가 그렇습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몸집이 가장 커다란 악기인 콘트라베이스는 어떤 존재일까요? 사실 이 악기는 ‘오케스트라’라는 계급사회에서 매우 낮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권력 서열이 보잘 것 없다는 뜻이지요. 물론 저현(低絃)의 깊은 맛을 우려내기 위해 꼭 필요한 악기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늘 뒷전에 엉거주춤 서 있는 악기이기도 하지요. 오케스트라 피트의 전면에서 화려하게 조명을 받는 바이올린에 비하자면, 또 관악기들이 터뜨리는 우렁찬 팡파레에 견주자면, 콘트라베이스는 왠지 서글프고 안쓰러운 악기입니다. 그래선지 쥐스킨트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최후의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브람스(Johannes Brahms)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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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작곡가. 함부르크 출생.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신동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하노버에서 바이올린의 대가 요하임에게 인정(認定)을 받고 그의 소개로 리스트를 찾아 갔으나 도중에 오해가 생겨 슈만을 찾아갔다. 슈만의 인정을 받아 작가로서의 길이 트인 그는 다음 해 슈만이 투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한 후부터 그를 원조하기 시작, 사후에도 슈만의 집을 돌보아 주며 클라라 부인과의 애정이 싹텄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889년 함부르크 명예 시민에 추대되고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레오폴트(Leopold) 훈장을 받고 1896년 봄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121)》를 작곡했다. 그 해 5월 클라라의 중태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시체는 이미 본(Bonn)에 운반된 후였다. 실의에 병을 얻어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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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아버지인 요한 야코프 브람스가 바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습니다. 속된 말로 째지게 가난했습니다. 이곳저곳 떠돌며 작은 악단의 연주자로 살던 그는 스무살 무렵에 함부르크에 정착하지요. 하지만 그를 기다려주는 번듯한 오케스트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동네잔치에 불려가 경음악이나 연주하는 별 볼 일 없는 악단의 ‘오부리 악사’로 근근히 살아갑니다. 그리고 브람스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30년,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집 딸과 결혼합니다. 한데 그 ‘주인집’도 형편이 곤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울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브람스의 어머니인 크리스티아네 니센이 남편인 요한 야코프보다 17년 연상이었다는 점입니다. 브람스가 14년 연상의 클라라를 평생에 걸쳐 사모한 배경에는 그런 가족사도 깔려 있는 듯합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브람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열두살부터 열아홉살 때까지, 브람스는 가극장에서 가수들의 반주를 해준다거나 인형극의 배경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해주고 급료를 받았습니다. 밤에는 술집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함부르크는 항구도시입니다. 어린 브람스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술집은 취한 선원들로 북적거렸고 매매춘이 일상사였습니다. 그 어둡고 음습한 북부 독일의 항구도시에서, 브람스는 우울하고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그래선지 훗날 브람스가 작곡한 음악들은 대부분 무겁고 우울합니다.
1853년은 브람스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였지요. 뿐만 아니라 서양음악사에서도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해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해 9월 30일, 드디어 브람스가 슈만과 조우합니다. 브람스는 스무살 청년이었고 슈만은 마흔세살의 중년이었습니다. 브람스는 무명의 음악가 지망생에 불과했지만, 슈만은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잡지 <음악신보>의 발행인이었습니다. 스무살 청년은 자신이 직접 쓴 ‘피아노 소나타 C장조’를 떨리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그리고 1악장이 끝났을 때, 슈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잠깐 연주를 멈추게”라고 말하지요. 왜 그랬을까요? 연주가 시원치 않았던 걸까요?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였지요. 슈만은 서둘러 아내를 거실로 불러들입니다. 아내가 들어오자 슈만이 청년에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주게나.”
클라라(Clara Schumann)와 슈만((Robert Schumann) [출처: 위키피디아]
그날 슈만의 집 거실에서 펼쳐졌던 장면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슈만과 클라라는 청년 브람스의 연주에 감탄했지요. 슈만은 그날 일기에 “천재가 다녀갔다”고 씁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창간한 잡지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Neue Bahnen)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게재하지요. 그것은 슈만이 이 잡지에 절필을 선언한 후 10년 만에 쓴 글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브람스에 대한 극찬이었습니다. 한데 그것은 브람스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린 계기였던 동시에, ‘브람스의 적’을 만든 사건이기도 했지요. 슈만의 글이 너무 신랄했던 까닭입니다. 슈만은 브람스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면서 당시의 음악적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던 리스트와 바그너 풍의 음악을 거세게 비난합니다. 그 덕분에 훗날의 브람스는 반대파들의 공격에 직면하지요. 세상일이란 항상 그렇습니다. 좋은 게 있으면 힘든 것도 있는 법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op.15>는 청년 브람스의 대표작입니다. 브람스가 남긴 4곡의 협주곡들, 그러니까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더블 콘체르토) 중에서 가장 먼저 작곡된 음악이지요. 브람스가 최초로 작곡한 대규모 관현악곡이기도 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브람스를 옹호했던 슈만에게는 일종의 조울증이 있었는데, 그는 브람스를 첫 대면하고 약 5개월 뒤에 라인강에 몸을 던집니다. 간신히 구조돼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지요. 브람스는 슈만이 사망하기까지, 그러니까 약 2년간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슈만의 집안을 가족처럼 돌봅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바로 이 무렵에 작곡되지요. 작곡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1858년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1악장은 장엄하게 펼쳐지는 마에스토소(maestoso) 악장입니다. 팀파니가 으르렁거리며 돌진하는 서주에서부터 청년 브람스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비장하면서도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첫번째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불현듯 음악이 잦아들었다가 아름다운 선율의 바이올린으로 이어집니다. 관현악과 피아노가 두 개의 얼굴의 번갈아 보여주는 악장이지요. 때로는 격렬하게, 또 때로는 애틋하게. 마치 브람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악장입니다.
브람스는 아다지오(adagio)로 연주되는 2악장에 대해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초상(肖像)”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슈만을 잃은 클라라에 대한 위로, 아울러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애틋한 마음이 겹쳐지는 악장입니다. 현악기들이 잔잔하게 물결치고 목관 악기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피아노는 슬픔을 머금은 채 애잔한 선율을 연주합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3악장에서 음악은 다시 강렬해지지요.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피아노가 당당하게 상승 선율을 연주하고 관현악이 따라옵니다. 1악장에서 이미 들었던 주제가 재현되는 장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요. 피아노가 매우 화려한 패시지들을 연주하면서, 브람스 본인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요.
브람스는 1859년 1월 하노버에서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해 이 곡을 초연했습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1831~1907)이 지휘를 맡았지요. 결과는 ‘비교적 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닷새 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가졌던 연주회는 격렬한 비난에 부딪혔습니다. 브람스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악단도 청중도 무반응”이었고, “박수를 치려고 했던 사람은 고작 3명”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진영 논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봅니다. 라이프치히에는 유난히 ‘브람스의 적’이 많았습니다. 브람스는 자신에게 모욕을 줬던 도시 라이프치히를 이후에도 계속 불편해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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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포드 커즌(Clifford Curzon), 조지 셀ㆍ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62년/Decca
음악적으로 완벽주의자였던 커즌은 녹음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브람스의 협주곡 1번은 그의 명연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커즌의 특징은 역시 신중함과 섬세함이다. 특히 이 곡의 2악장에서 그의 서정적인 피아니즘이 빛난다. 그렇다고 1악장의 강주 부분과 3악장의 파워풀한 드라이브에서 힘이 부칠 것이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다. 의외로 힘차게 달려나간다. 물론 거기에는 오케스트라와의 한판 승부이라는 측면이 깔려 있다. 조지 셀은 런던 심포니를 상당히 강하게 몰아부친다. 영국 <그라모폰>은 아래에 소개하는 길렐스의 연주와 함께 커즌의 이 녹음을 20세기 ‘100대 명반’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데카에서 ‘레전드 시리즈’로 발매한 음반은 국내 구입이 어렵다. 대신 1ㆍ2번을 커플링한 음반을 구할 수 있다.
▶ 에밀 길렐스(Emil Gilels), 오이겐 요훔ㆍ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72년/DG
1순위로 추천하는 음반이다. 이 녹음에서 길렐스가 보여주는 힘과 테크닉은 ‘역시!’라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파워풀하게 밀어붙이는 1악장, 다감하고 아름다운 2악장, 피아니스틱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3악장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힘이 좋으면 자칫 무겁고 딱딱해질 수도 있지만, 길렐스의 연주는 그런 우려를 초장에 불식시킨다. 템포는 느린 편이다. 전체 연주시간이 53분에 달한다.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살짝 뒤로 물러난 자세로, 하지만 매우 견고하게 길렐스를 서포트한다. 격렬함과 애틋함을 빈번히 오가는 협주곡 1번을, 맥박이 고동치는 듯한 감흥으로 전해준다. 음악적 흥취가 물씬한 연주다.
▶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크리스티안 틸레만ㆍ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2011년/DG
2011년 6월 드레스덴에서 있었던 연주회 실황이다. 우리 시대의 명장 폴리니는 1970년대에 뵘이 지휘하는 빈필하모닉과, 1990년대에는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필하모닉과 브람스의 협주곡 1번을 녹음했다. 틸레만과 조우한 이번 음반은 세번째 녹음이다. 혹자는 이 음반의 녹음 상태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황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바로 그 ‘실황’이라는 점이 오늘 이 음반을 추천 목록에 올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음반 표지에 담긴 69세의 폴리니, 병치레 끝에 무대로 돌아온 그는 이제 늙은 모습이 완연하다. 틸레만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지휘하며 폴리니를 보필한다. 그것이 이 실황 속에 담긴 ‘또 하나의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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