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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느끼는 고통도 인간과 같다

‘다르지 않아’ 이효리의 노래처럼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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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느낄 수 있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해도 여전히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히 종차별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른 점을 주목하려고 한다.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해도 여전히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히 종차별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른 점을 주목하려고 한다.

사람과 동물은 딱 보아도 다르다. 그런데 왜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원초적인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백인과 흑인도 딱 보면 다르다. 남자와 여자도 딱 보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가?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그런 감각적 반응 말고 뭔가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는 그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기에 정당성을 가질 수 없었다.

종차별주의자들은 사람에게는 있지만 동물에게는 없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강조하려 한다. 즉 인간만이 가진 이른바 ‘배타적 특성’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가 다름을 주장한다. 인간만이 가진 특성들 가운데 가장 자주 제시되는 것이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동물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언어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동물들도 인간과 같은 발성기관이 없어서 말소리를 내지 못할 뿐 나름대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많이 관찰되고 있다.

더욱이 고래나 돌고래의 경우는 자기들 나름의 ‘음성’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또한 좀 더 미개한 동물인 꿀벌도 춤을 통해 동료들에게 꿀이 있는 위치를 알려준다.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가 학습을 통해 수화를 배웠다는 보고도 있다. 배우 장미희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사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믿는 동물을 먹지 않고, 같은 이유로 생선 중에서는 특히 연어를 먹지 않아요.
 주로 채식을 즐기죠.” (『한겨레신문』 2001년 6월 29일자)
연어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것 같아서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감성이 풍부한 장미희 씨만의 생각일 뿐 그런 연구는 아직 없다.

인간을 정의할 때 ‘○○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많이 이용한다. ○○ 자리에 다른 동물에게는 없지만 인간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집어넣음으로써 동물과의 차별성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언어적 동물’이 대표적인 인간의 정의이다. 그러나 방금 보았듯이 인간 아닌 동물 중에도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동물이 있다. 반면 인간 중에도 언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인간이 있다. 우선 갓난아이가 그렇고 중증장애인 중에도 언어 사용이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 다른 특성도 마찬가지다. ○○ 자리에 언어 아닌 무엇을 집어넣어도 문젯거리이다. 인간을 ‘도구적 동물’이라고 해보자. 하지만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동물은 많다. 침팬지나 고릴라가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개미 등을 건져먹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수달도 조개를 깨트릴 때 돌을 이용한다. 이런 사례는 흔하디흔하다. 반면 갓난아이나 중증장애인은 도구를 사용할 줄 모른다.


나뭇가지를 이용해 개미를 잡아먹는 침팬지. 침팬지처럼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많다.

그렇다면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정의해보자. 단순히 군집 생활을 하는 것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그런 동물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서열을 이루고 살아야만 사회적 동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동물도 많다. 심지어 닭들에게도 쪼고 쪼이는 서열이 존재한다. 그러나 갓난아이나 중증장애인은 사회를 이루며 살지 못한다. ‘합리적 동물’의 경우는 어떨까? 동물은 합리적이지 못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특성인 듯하다. 그러나 ‘합리적’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인간 외에도 합리적인 동물은 많다. 합리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거꾸로 생각해서 갓난아이나 중증장애인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렇듯 인간만이 배타적으로 가진 특징이 무엇인지는 아무리 애를 써도 찾기가 어렵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마라.”라는 옛말이 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배신을 한다는 뜻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으로 머리가 검다는 점을 든 것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머리색이 검은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책 제목인 『털 없는 원숭이』도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인간 중에도 털북숭이는 많다. 인간을 ‘두 발 달린 동물’로 정의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닭을 들고서 이것도 인간이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 철학자는 궁한 나머지 이번에는 ‘날개가 없으면서 두 발 달린 동물’로 정의했다고 한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인간을 정의하는 특성이란 모두 유효하지 않게 되고,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로만 인간을 정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정의야말로 인간을 ‘딱 보면 동물과 다르다.’라고 정의하는 시각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정의가 통용된다면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인간에게만 있다고 생각되는 특징을 제시하기만 하면, 갓난아이와 중증장애인이 예외 사례로 등장하여 인간만의 고유한 정의를 찾는 사람을 난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이것은 ‘가장자리marginal 인간 논증’이라고 하여 앞으로 다른 문제를 논할 때도 여러 번 나오므로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가장자리’라고 해서 그들을 폄하하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갓난아이와 중증장애인의 경우는 비록 인간의 배타적 특징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그런 특징을 정상적으로 가진 인간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인간 고유의 특징 여부를 떠나서 그들이 인간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그들을 인간이 아닌 동물과 동급으로 취급하게 되면 그들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일이 된다는 준엄한 충고가 그 주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무반성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태도에 불과하다. 인간의 특징이 무엇이건 간에, 또 어떤 사람이 그 특징을 가지고 있건 없건 간에, 우리와 똑같이 생긴 인간이라면 무조건 동물과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태도를 여기서 보게 된다. 나와 똑같은 인종, 나와 똑같은 성별이라면 무조건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예전에 우리나라의 잘못된 지역차별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으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었다. 이런 의식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지만 지금은 분명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특징이 무엇이건 간에 동물과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태도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식만큼이나 윤리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제 백 번을 양보해서 갓난아이나 중증장애인과 같은 예외적인 사람까지 다 포괄하는 인간만의 특징을 찾았다고 가정해보자. 예컨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해보자. 그 특징이 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다시 떠올려볼 수 있다. 다른 성별이나 인종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언어를 사용할 줄 알기 때문이었나? 그 때문이 아니었다. 차별이 옳지 않은 것은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고통을 느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과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바람은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이 점은 동물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라면 모두 언어를 사용할 줄 알고 동물은 사용할 줄 모른다는 점이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두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과연 인간과 동물은 다른가? 물론 다르다. 그러나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점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인 태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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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최훈 저 | 사월의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채식주의, 정확하게 말해서 채식의 윤리적 측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식습관, 즉 ‘채식’이 도대체 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을까? 현직 철학교수인 저자는 이 질문을 심각한 철학적 난제로 다루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는 자신의 체험담에서 시작하여 채식의 윤리적 의미를 친절하게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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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의 유혹 ]
[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 ]
[ 육식의 종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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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호주 멜버른대학교, 캐나다 위니펙대학교,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했다. 현재 강원대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정에서 가르치고 있다.
전공분야인 논리학, 과학철학, 윤리학 등 철학의 응용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과 함께, 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대중적 눈높이에 맞는 철학서 집필에 꾸준히 힘쓰고 있다. 그런 결과물로 논리ㆍ논술 분야의 대표적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논리는 나의 힘』(2003)을 비롯하여 『데카르트 & 버클리: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벤담 & 싱어: 매사에 공평하라』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변호사 논증법』 『좋은 논증을 위한 오류 이론 연구』 등을 펴냈고, 청소년 교양도서로 『생각을 발견하는 토론학교, 철학』 『나는 합리적인 사람』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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