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갸웃했다. 손예진이라는 배우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녀가 선택한 장르에 대한 낯섦 때문이었다. 솔직히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히로인으로서의 손예진이 화면 속에서 뛰고, 구르고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설경구, 김상경, 김인권, 안성기, 차인표까지 이어지는 믿을만한 캐스팅 사이에 선 손예진이라면 뭔가 그녀만의 매력을 발산하며 다른 배우들과의 조화를 통해 블록버스터를 관통하는 믿을만한 이야기 틀을 만들어주겠구나 하는 믿음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김지훈 감독의 이력은 <타워>를 기대하게 만들 만했다. 물론 광주라는 역사적 아픔을 상업적 영화의 틀 안에서 바라보았던 <화려한 휴가>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형을 보이기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7광구>는 기대보다는 김빠진 괴수영화였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와는 대응할 수 없는 자본과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많은 인물들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잔 에피소드와 웃음으로 공간을 메워온 것과 달리 <7광구>는 밀폐된 공간 속 괴수영화의 장르를 따르지도, 빈 곳을 조연들의 연기로 채워주지도 못한 조금은 어정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제작과 실패를 겪은 감독이라면 분명 새로운 대안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전형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타워>는 가족과 사랑의 가치를 이면에 숨겨놓은 할리우드의 크리스마스용 블록버스터의 틀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그래서 배경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주인공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행복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주상복합빌딩 타워스카이에서 일하는 대호(김상경)와 윤희(손예진)는 첫 번째 입주자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소방대장 영기(설경구)도 크리스마스를 즐길 처지가 아니다. 북적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 늘 발생하는 화재 사고 때문에 영기는 결혼 후 아내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지내본 적이 없다. 이런 캐릭터들의 현실을 안고 김지훈 감독은 108층 초고층 빌딩의 대형 화재 참사를 소재로 밀어 붙인다. 탈출구 없는 미궁 속 참사 속에서 배우들은 정확히 자신의 자리에서 소리치고, 싸워준다. 그런 사람과 불 사이의 아비규환은 한층 발전한 특수효과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하지만, 뛰어난 배우들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타워> 속 인물의 관계망은 촘촘하지 못한 편이다. 게다가 <해운대>와 <퀵>이 블록버스터의 한계와 지루함 사이를 효과적인 조연들의 배치로 메워놓은 효과를 노리고
<타워>에도 두 영화에서 맹활약하며 늘 기름진 연기를 선보이는 김인권이 등장하지만, 이 또한 다소 역부족이다. 다시 손예진으로 돌아가서
<타워>가 손예진이라는 배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영화인가 되짚어 보자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가 된다.
<타워> 속 윤희는 굳이 손예진이 아니어도 되는 평이하고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국민첫사랑 벗어나기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건축학개론>의 수지가 국민첫사랑이라는 칭호로 사랑받고 있지만, 돌이켜 보면 원조 국민첫사랑의 타이틀은 손예진의 몫이었다. 드라마
<맛있는 청혼>의 청순한 캐릭터로 출발해, 2002년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과 이은주, 차태현과 함께 한
<연애소설>, 2003년 성공적인 로맨틱 코미디
<첫사랑사수궐기대회>와 윤석호 PD의 계절 연작
<여름향기>까지 손예진은 늘 누군가의 첫사랑 혹은 짝사랑의 아련하고도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손예진이라는 배우는 2000년 <인터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심은하라는 배우와 오버랩 되며 멜로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다. 2004년 이재한 감독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젊은 치매에 걸린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 절절한 멜로였고, 손예진은 이 영화로 인기와 캐릭터의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 정점에 올랐다는 말의 또 다른 이면에 내리막길이 있다는 사실을 손예진이라는 배우는 명민하게도 알고 있었다.
<작업의 정석>
<연애시대>
2005년 멜로 장르 속에 불륜이라는 파격을 녹여낸 허진호 감독의
<외출>을 통해서 손예진은 불안하고 불행한 욕망을 다스리는 복잡한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같은 해
<작업의 정석>을 통해 내숭 100단의 여우 캐릭터를 선보인다.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적인 작품이지만, 그동안 청순한 외모에 눈물 흘리는 연약한 캐릭터로 각인된 손예진의 변신은 남성 팬들에게는 충격을, 그녀의 청순한 매력이 100프로 내숭이라고 믿어온 여성 관객들에게는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손예진이라는 배우에게 ‘코믹’한 이미지까지 더해준다. 그리고 손예진은 2006년 드라마
<연애시대>를 통해 멜로 속 캐릭터의 진화를 보여준다. 한지승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드라마를 통해서 손예진은 박제처럼 갇혀있던 좁은 캐릭터에서 벗어나 ‘삶’이 느껴지는 세련된 멜로 연기를 선보인다.
<백야행>
<개인의 취향>
<연애시대>의 후광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2007년 김명민과 함께 한
<무방비도시> 속 소매치기는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캐릭터와 연기 스펙트럼 범위 내에서 너무 많이 간 작품이었다. 2008년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열혈기자 역할을 맡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해
<아내가 결혼했다>는 손예진이라는 배우에게 크게 기댄 작품이었고, 두 명의 남편을 두려는 도발적인 캐릭터는 손예진을 만나 그 수위가 중화되면서도 더 자극적일 수 있는 캐릭터가 되었다. 2009년 박신우 감독의
<백야행>을 통해 손예진은 19금 성인역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고, 2010년
<개인의 취향>을 통해 고향과도 같은 드라마로 복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지만 ‘손예진’이라는 배우가 큰 이슈가 되거나 극찬을 받게 되는 일은 없었다. 2011년
<오싹한 연애>는 공포영화의 장르 속에 코믹, 멜로를 녹여놓은 새로운 작품이었지만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모습이 완전히 새롭진 않았다.
<공범>
살펴보면
<연애시대> 이후 크게 주목받은 작품은 없었지만, 손예진은 명민하게도 그 연기의 영역을 넓히고 변주하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흥행성적, 연출력의 성공을 논하기에 앞서 그런 손예진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숙성되고 있었고,
<타워>라는 다소 달뜬 작품에서도 손예진은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어 하는 욕심 많은 배우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손예진은
<공범>이라는 영화의 촬영을 마쳤다. 국동석 감독의 데뷔작
<공범>은 잘 알려진 내용은 없지만, 사랑하는 아버지가 유괴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진 딸의 추적극이며, 그 속에서 손예진은 힘든 감정을 표출하는 역할을 선보인다. 배우가 자신의 주특기인 멜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벗어나 블록버스터에 이어 감정선이 강한 영화를 선보이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우리가 삼십대 여배우에게 기대하는 건 ‘성숙’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30대의 손예진은 이제 국민첫사랑이 아니라 국민여배우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배우가 될지 모른다.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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