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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티켓과 여권이 필요 없는 세계여행 떠나볼까?
지금 만약 여행을 떠난다면
나는 ‘책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비행기 티켓이 필요 없고, 여권과 비자가 필요 없는 여행. 그렇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읽었던 책들을 기억해냈다. 그것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만큼 오래된 책들이었고, 대부분 절판된 것들이었다. 재밌는 건 책의 대부분이 ‘공동체’와 관련된 책들이었다는 것이다.
식물과 이야기하는 개가 있었다. 그 개는 주인 없이 떠도는 나그네였는데, 낮잠을 자다가 지치면 길가에 핀 들꽃과 이야기했다. 개는 짓이겨진 잔디를 위로해주는 데 탁월했다. 바람이 개의 등허리를 보드랍게 만지면, 개는 그 바람을 몰아 자신의 털 뭉치로 잔디의 까실한 표면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그 개는 어떤 식물에게도 친절하다고 했다. 식물과 이야기하는 개 이야길 들은 건 일곱 살 먹은 여자 아이에게서였다.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식물은 상추다. 상추는 내성적인 편이다. 하지만 한번 입을 열면 중요한 이야길 귀뜸해 준다.
“사실 너희 텃밭의 오이에게는 거름보다는 물이 더 필요해!”
끊임없이 수다쟁이 배추에 대해 얘기 하는 아이를 보면서 “그래, 넌 시적 상상력이 참 뛰어 나구나”라고 이야기할 엄마는 몇이나 될까. 어떤 사람들은 다소 심란한 표정으로 과대망상이나 거짓말 증후군을 걱정하며 소아정신과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나무와 꽃과 이야기하는 법을 잊었다. 정확한 시간을 감지하던 섬세한 몸의 지문들을 12개의 숫자로 공간화 된 ‘시계’와 ‘핸드폰’이 일일이 지워버린 것처럼, 우리의 몸은 먼 과거에 비해 점점 고독한 방향으로 퇴화되어 왔다. 이런 방향대로라면 몸은 점점 본래의 감각들을 잃어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잃어버리고,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잊게 될 것이다. 담배, 알코올, 마약 같은 약물에 의지해 자연과의 교접이 아닌, 약물 간 화학 반응을 더 실제적인 것으로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나무나 꽃의 정령들과 이야기하는 얼마 남지 않은 소수 우량종들, 이런 어린 주술사들을 ‘비과학적’이라는 강력한 현대의 언어로 단죄할 것이다.
이병률의 여행 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다가, 문득 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냥 ‘떠나는’ 여행이어서는 곤란했다. 나는 꽤 많이 지쳐있었다.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았고, 그래서 위로가 필요했다. 하루에 1미터씩 눈이 쌓인다는 삿포로의 폭설만큼이나 아득하고 깊은 위로여야만 했다. 많은 책들이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혼자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지금은 혼자여서는 안됐다. 그건 ‘책’이 아니라 ‘경험’이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를 추억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를 떠나보내기 위한 여행이라면 그것은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야’하는 여행이어야 했다. 한 개인의 사소한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덮고도 남을 우주적인 사랑이어야 했다.
나는 ‘책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비행기 티켓이 필요 없고, 여권과 비자가 필요 없는 여행. 그렇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읽었던 책들을 기억해냈다. 그것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만큼 오래된 책들이었고, 대부분 절판된 것들이었다. 재밌는 건 책의 대부분이 ‘공동체’와 관련된 책들이었다는 것이다.
책 안에는 빼앗긴 것을 되찾아야겠다고 선언한 사람들, 자연과 가까이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걸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닌 함께 있을 때, 나와 너가 아닌 ‘우리’일 때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인구 5만 명이 생태학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건설된 도시 오로빌, 수력, 태양력 등 대체 에너지로 마을을 운영하는 영국의 메헨세스, 한 달에 딱 두 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오지 아젠타와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체험하기 위한 워킹액션 프로그램들을 읽어내려 갔다. 고요한 가운데 종소리가 울리면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현재를 생각하는 독특한 방법의 수행을 하는 ‘플럼 빌리지’의 한 풍경을 읽어내려갔다. 커다란 노트를 펴고 내가 가보고 싶은 공동체에 대한 정보들을 그렇게 적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 티켓이 필요 없고, 여권과 비자가 필요 없는 여행.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여행.
영혼의 마을 핀드혼
1962년에 설립되어 현재 연간 1만 4천명에 이르는 방문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핀드혼’은 대안적인 에코빌리지 프로젝트의 모범으로 손꼽힌다. 다섯 명의 신비가들이 스코틀랜드의 척박한 모래땅 핀드혼에서 풍요의 농장을 이루어낸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영감을 주고 있다. 특히 이들이 각 식물들의 정령, 즉 데바(deva)와 대화하며 그들의 긴밀한 도움을 받는 과정은 영농 기술의 집합이라기 보단 중세 시대의 연금술에 가깝다. 정령들이 마구 출몰하는 마르셀 에메의 동화 같은 몽환과 에콜로지철학의 문제의식이 뒤섞인 이 공동체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 어디까지 이루어질 수 있는지의 끝을 보여준다. 인간의 상상력이 어떻게 마을 공동체와 합체돼 작동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예시.
웰빙 마을 토트네스
영국의 ‘토트네스’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이유는 기업의 주요 마케팅 전략으로 추락한 ‘오가닉’과 ‘웰빙’이 이 마을에선 삶과 분리되지 않은 ‘생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직공 4명이 손작업만으로 만드는 ‘그린 슈즈’의 주인은 대도시의 영문학자였지만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두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마을에 작은 구두 가게를 차렸다. 그는 주민 한 명 한 명의 발본을 일일이 손으로 뜬다. 그는 당연히 마을 사람들의 발 모양새 모두를 기억하고 있다. 마치 증세를 환하게 꿰고 있어 진단 없이도 처방을 내릴 수 있었던 그 옛날 시골 약방 주인을 떠오르게 한다.
세상의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 쓰러지고, 세상의 마지막 강이 오염되고, 세상의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후에야 그때서야 그대는 돈은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겠는가. -어느 인디언 추장의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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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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