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저녁, 홍대 상상마당에서 황석영 작가의 신작 『여울물 소리』의 출간을 기념하여 ‘향긋한 북살롱-작가와의 만남’이 열렸다. 한 겨울의 저녁 공기는 매서웠지만 ‘향긋한 북살롱’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비단 독자들에게 제공된 따뜻한 차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장은 올해로 문학 인생 반세기를 맞은 황석영 작가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씨의 소개로 독자들과 만남의 문을 연 황석영 작가는 올해로 문학인생 반세기를 맞았다. 역사의 한 축에서 소설가로 살면서 ‘예민한 안테나’를 갖고 있다는 그는 ‘자신의 작가적 세계관으로 낚시꾼이 찌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매 순간을 포착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이경재(이하 이) :
문학 인생 50주년에 나온 『여울물 소리』, 구한말 역사소설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
황석영(이하 황) : 1998년부터 십여 편의 장편을 썼다. 내 문학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는데, ‘여울물 소리’는 후반기 문학을 처음 시작한 것이라 보면 된다. 전반기에서 다룬 정통 리얼리즘을 확장하여 전통서사에 보편적 이야기를 담아봤다. 만년문학으로 넘어가, 내 땅에서 나온 민담, 전설 등 삶을 상징적으로 포괄하는 형식과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에도 100프로는 아니더라도 70프로는 해오던 일이다. 산문의 해체를 수용하면서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옮겨간다거나, 어긋난 시각을 현재시점에서 읽는다던가 하는 새로운 서술방법을 도입해왔다. 전통서사를 19세기 말 민족대이동의 관점으로 아시아가 제국주의 시장에 편입되는 과정을 여성의 몸을 통해 바라본
『심청』이나 북한 탈북난민의 이야기를 이념을 빼고 여성의 시각으로 그린
『바리데기』 같은 경우가 그렇다.
보통 보편성과 현대성을 지닌 외방 이야기꾼들이 밖의 이야기를 안에 전하는데,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를 전수하고 갈무리하는 토방이야기꾼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나는 외방이야기꾼이지만, 토방이야기꾼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있다.
우리는 지금 근대의 연속에 있다. 어떤 정치, 사회적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 내면에 숨어있던 근대 트라우마의 잔재가 한꺼번에 나온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래서 근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이야기꾼을 찾아갔더니 그 모습이 재밌다. 몰락지식, 신분상승이 불가한 독서 계층이지만 강담사, 전기수, 재담꾼 등의 역할을 넘나들며 작자미상의 작가가 된다. 그들이 만든 구한말 언패(諺稗)(한글소설)가 수백 장이라 책전이 생길 정도이다. 이 소설을 통해 전통서사와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울물 소리』 의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이야기꾼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라는 책에 보면, 거장의 말년문학은 젊은 시절의 완성이나 성숙이 아니라, 새로운 실험, 모험, 불완전성으로의 관심이라고 나와 있다. 황석영 작가도 비슷한 것인가?
황 : 좋은 말이다. 사이드의 책에 공감이 많이 간다. 말년에 원숙함과 평화를 얻는 게 아니다. 베토벤이나 바그너의 말년에 작곡된 현악 4중주를 들으면 청년기의 갈등과 모순, 치열함이 더 살아있다. 그동안 해온 작업과 또 다른 느낌이다.
누군가 다음 작품을 물어보면 그동안 못 쓴 중단편을 쓸 것이라 말한 것이다. 이번에는 당대의 이야기를 포착할 것이다. 그렇다고 ‘쌍용자동차’ 문제를 직접 서술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정규직, 청년들의 방황 등에 관심이 있다. 5년 정도 쓰면 젊은 시절 썼던 문학과 비슷하면서 형식은 더 진보된 글이 나올 것 같다.
이 :
지금 황 작가님은 『여울물 소리』를 홍보 중이다. 벌써 다음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작가적 직관과 순발력이 대단하다.
황 : 일 년만 지나도 내 작품의 등장인물, 구성을 다 잊어버린다. 책이 나오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나에게 가장 애착 가는 작품은 아직 쓰지 않은 작품이다. 혹자는 나보고 성미가 급하다 하는데 그렇다면 한두 달 정도는 관심을 갖겠다. (좌중 웃음)
이 :
망각의 힘도 대단하다.(웃음) 아까 농담처럼 ‘구라‘ 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황석영 작가의 별명이 황구라임을 밝히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황 작가야말로 이시대의 이야기꾼이 아닌가.
황 : 요즘 나보다도, 김어준이라는 사람이 더하다. 그는 ‘디지털 구라’더라. (웃음) 그 사람에게 인수인계하면 재밌겠다.
이 :
소설을 통해 재담꾼, 전기수, 혁명가 등등 다양한 직업군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신통은 황작가의 아바타인가? 그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황 : 그런 삶을 살았으면 그렇게 살다 죽어야 하는 게 맞다. 사실 만주 징용, 한국전쟁 등의 현대사 속에서 이와 같은 일들은 많이 벌어진다. 그를 잡으러 다니는 연옥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내가 가출하면 어머니가 잡으러 다녔다.(관객 웃음)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며 연옥을 그려냈다. 전지적 시점보다 제 3자, 여성인 연옥의 눈과 입으로 표현했다. 그랬더니 저절로 이신통에 대한 이야기는 살이 붙더라.
이 :
연옥이 또 하나의 진짜 이야기꾼이라는 의미 같다. 그녀는 오 동지 앞에서는 쌀쌀맞다.
황 : 그것도 어머니 같다. (좌중 폭소)
이 :
이런 여자랑 살면 참 좋을 것 같다.
황 : 결혼했나?
이 :
했다.(좌중 웃음) 이 소설에는 연옥 말고도 인상적인 인물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동이 어멈과 이신통이 헤어지는 대목에서 눈물이 났다. 또한 이준이라는 인물이나 보따리 장수도 인상적이었다. 다른 인물에 대한 말씀도 해달라.
황 : 이신통의 멘토가 서일수라는 인물인데 동학자료를 보며 동학운동가 서장옥을 모델로 했다. 스님 출신으로 입도한 후 관념적이면서 적막한 철학사상체계를 만들었다.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에 멘토로 그렸다.
이 :
이신통은 동학교도가 되는데, 실제로 식민지 초까지 동학의 영향력이 대단한 것으로 안다. 구한말 동학의 의미는?
황 : 동학은 서학의 대응책으로 나왔다. 당시 노론이 지배하던 성리학은 거부할 경우 삼족을 멸해야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천주 아래 인간 평등이라는 동학의 이념과 인식은 당시 세계관의 엄청난 변화이다. 종이나 며느리나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다는 말이니까. 물론 양반, 사대부들의 미움을 받았고 정면으로 대응했다.
『여울물 소리』에서는 동학사를 중심으로 다루지는 않고. 그 변두리에 있는 민초의 삶을 끌어냈다. 거대담론은 그들의 환경이나 상황에서 그렸다. 세계적 보편성을 다루되 동양적인 형식을 살렸다.
이 :
이 소설은 7개월 동안 인터넷에 연재한 것을 모은 것인데, 낯선 경험은 아니지 않나?
황 : 그렇다. 소설이 잘 안됐으면 나는 연극쟁이가 됐을 것 같다. 현장성이 좋다. 사실 소설쓰는 것보다 여러분이랑 이렇게 노는 게 좋다. (좌중 웃음) 그런데 왜 안하느냐 하면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좌중 폭소) 원래 연극, 연출, 각본을 했었다. 인터넷 연재는 현장성이 있다. 군중들과 함께 하는 느낌이라 재밌었다. 한 가지 에피소드는 글이 나오면 댓글을 길게 꼭 다는 사람이 있었다. 오타나 잘못된 표현을 댓글에 꼭 단다. 고지식하다 생각했는데 성실한 사람인 것 같다. 덕분에 귀찮았다. 완벽하게 하느라고 (웃음)
이 :
여기오신 분들 이점 명심하셨으면 좋겠다. 아까 독자들께서 황석영 작가님께 묻고 싶은 것을 포스트잇에 붙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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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50년동안 살면서 한 가지 후회하는 일과 잘한 일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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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 잘한 일은 없고 상처, 잘못투성이다. 밤에 혼자 작업하다가 부엌에서 뭐 만들어먹다가 문득 생각난다. 잘못한 게, 창피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러분도 있을 것이다. 겪은 게 많아서 그런지 나도 많다.
이 : 그런 식으로 넘어가지 말고 한 가지 말해달라.
황 : 잘못이 너무 많은데 창작의 좋은 점은 예술가는 그 과정을 통해 상처와 잘못을 넘어가게 된다. 직업 선택을 잘한 것 같다. 그래서 잘한 일은 작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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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을 ‘여울물 소리’로 지은 이유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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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 소싯적 방황 할 때, 산사 암자에 자려고 누우면 작게 냇가에 흐르는 여울물소리가 들린다. 꼭 그 소리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위로가 되기도 하고 충고가 되기도 하는, 시냇물에서 느껴지는 말들에서 이야기꾼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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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을 충청도로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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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 충청도는 북과 남의 중간 접점이고 실제 동학운동이 많이 일어났다. 공주 우금치가 대표적이다. (동학운동 때 관군과 싸워 동학 농민군 10만 명이 전사한 역사적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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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부터 황석영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좌중 놀람) 27년간 짝사랑하던 사람을 만난 기분이다. 대하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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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 나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은데 정말 오래된 팬이신 것 같아 감사하다. 대하소설은 서구에서는 19세기에 이미 없어진 양식이다. 1500매가 넘어가는 장편은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 1970-80년대는 검열의 시대였다. 대하소설이 『임꺽정』, 『장길산』, 그 다음에 김주영의 『객주』,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으로 이어지며 대중과 함께 했다. 아마 지금이라면 독자들 만여 명 정도 징역을 보내야 대하소설을 읽을 것이다. 요즘은 다른 볼거리나 재미있는 게 많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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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을 소설가로 꾸준히 활동을 했다. 70대에 접어들었는데 자기관리가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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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 소설가 부인 같은 질문이다. (웃음) 다행히 부인을 조련사, 간수 같은 사람을 만났다. 본인은 수호천사라고 하지만 말이다. 술은 끊었지만 담배 두 갑은 피웠다. 그것도 의사가 위협하기에 끊었다. 3,4년 전 혈압, 당뇨가 있어서 요즘은 월, 수, 금 운동을 열심히 한다. 와이프가 학교가는 식으로 헬스장에 보낸다. 돈 주고 기합 받는 것 같다. 식스팩도 생겼다. (순간 독자들 술렁임) 나이 들면서 총기를 유지하기엔 어학공부가 좋다. 일본어 공부한지 6개월 됐는데 책은 읽을 수 있다. 틈틈이 하는 중이다. 70년이 확 갔다. 뒷간 다녀왔더니 인생이 날라간 것 같다. 나를 환기시켜주는 질문 감사하다.
이신통의 재담에 즐거워하던 이들의 모습처럼 독자들의 얼굴에선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황석영 작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어떤 독자는 그를 오랜 짝사랑의 대상이라 지칭했다. 또 어떤 이들은 여전히 원고 10매를 채우기 위해 12시간을 앉아서 글을 쓰는 근성있는 작가로 그를 기억할 것이며, 일부에서는 정치,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그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시선들에도 교집합은 있다. 공감적인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다. 다양한 군집의 독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는 힘, 인간의 희노애락을 활자와 음성언어로 마음껏 표현하는 재간을 지닌 시대의 스토리텔러(이야기꾼) 황석영, 그는 여전히 당신과 공감하길 원하고 있다. 긴긴 겨울밤, 그가 들려주는 ‘여울물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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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울물 소리
- 황석영 저 | 자음과모음
『여울물 소리』는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자신을 돌아보며 19세기의 ‘이야기꾼’에 대해 집필한 자전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미 인터넷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기도 했다. 『여울물 소리』는 외세와 신문물이 들이치며 봉건적 신분 질서가 무너져가던 격변의 19세기를 배경으로 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을 뒤쫓는 내용으로 동학과 증산도, 이야기꾼이라는 존재를 큰 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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