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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북살롱]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사춘기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개밥바라기별’ - 『개밥바라기별』의 저자 황석영

과거와 현재, 세대는 달라도 공감은 같은 사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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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부터 삶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일컬을 때는 '개밥바라기별'이라고 해야겠다.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했던 사춘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름이니까 말이다.

“여름방학 같은 때, 장마 중에 비 그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그런 날 있잖아, 누군가 놀려줄라구 얘, 너 학교 안 가니? 그러면 정신없이 책가방 들고 뛰쳐나갔다가 맥풀려서 되돌아오지. 내게는 사춘기가 그런 것 같았어. 감기약 먹고 자다가 깨다 하는 그런 나날. 막연하고 종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바라는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아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 미열의 나날. (…)”

사춘기 시절, 내가 가장 동경하던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거나 집안이 대단한 아이들이 아니라 유준과 같은, 나름대로 지향하는 목표가 있어 자기의 길을 스스로 가는 아이들이었다. 지극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하고 말 잘 듣는 딸로 자라온 내게,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유준과 같은 아이를 볼 때마다 ‘언제 쟤처럼 한번 ‘겁’ 없이 굴어보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미아가 말하는 저 문장을 읽으며 ‘막연하고 종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바라는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아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 미열의 나날’이었던 내 사춘기의 시절이 떠올라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유독 성장소설이라는 장르에 나는 맥을 못 춘다. 세상의 모든 성장소설은 언제 읽어도 다 좋다. 이유를 생각하니 신통한 답변이 나오진 않는다. 그렇다면 처음 읽었던 성장소설은 어떤 것이었을까?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최소한 『데미안』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기억에 없다. 난 황석영 선생이 말하던 ‘문소’(문학소녀)가 아니었던 게다. 그럼에도 성장소설만 보면 호기심을 내세우는 것은 또래 아이들의 고민이 대부분 비슷함에도 유독 나만은 그 시절에 이렇다 하고 내세울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곰곰 다시 생각을 해본다. 정말 사춘기의 나는 뭘 하며 지냈던가?


한국문학의 큰 별과 같은 존재,
어린 시절 첫사랑을 보는 것보다 더 가슴 떨리는 만남


무더웠다. 한동안 비만 내려 파란 하늘이 보고 싶다 했더니 보상이라도 하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쨍쨍 내리쬐는 폭염의 연속이었다. 우선 <2007년 YES24 문학 캠프>에서 황석영 선생을 처음 본 후 거침없는 선생의 언변에 푹 반하고 말았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요즘은 작가 생활하기도 힘들다면서 투덜(!)거리며 사인을 해주시던 모습이 익살스러워 기억에 오래 남았다. ‘역시 연배가 있으시니까 다른 작가들하고 다르구나!’ 뭐 그런 어쭙잖은 생각도 했다. 해서 또 한 번 선생의 언변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혼자서 꽤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황석영 선생은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개밥바라기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더구나 이번 작품은 선생의 자전적 성장소설이 아니던가!

이번 <향긋한 북살롱>은 황석영 선생이 『개밥바라기별』을 펴내고 독자와 처음으로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꽉 들어찬 독자들과 여느 때와는 다르게 여기저기에서 찍어대는 카메라 세례를 보며 사회자의 코멘트처럼 ‘한국 문학의 큰 별과도 같은 존재’가 확실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회자의 멋들어진 소개를 받고 나온 황석영 선생의 첫마디 “아니, 무슨 서태지 소개하는 것 같애?” 하는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때 이미 눈치를 챘었는지도 모른다. 작년, 문학기행에서 사회를 본 백가흠 작가가 선생의 언변에 질문 한마디 못하고 열심히 말씀을 들어야 했었다는 사실을. (^^;) 나름 이런저런 준비를 열심히 했을 출판사 측은 조금 황당했겠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독자로서는 마냥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었는걸. 역시, 옆에 앉으려는 사회자를 독자들 틈에 앉혀놓고 선생은 동네오빠(!)처럼 편안하게 강연을 시작했다.

선생은 방북으로 인해 베를린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지내다가 들어왔다. 그 정도면 고향산천이 그리워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을 텐데 입국해서 한 달도 안 되어 획일적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대해 억압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거다. 그때 곰곰 생각을 했더란다. 환갑이 넘은 그가 억압과 답답함을 느낄 만큼 사회에 싫증이 나는데 ‘이 땅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얘기를 써봐야겠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에는 『바리데기』를 쓴 후 조사한 통계에 놀랐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20~30대가 80%이고 10대가 15%나 되어 자그마치 90%가 넘는 젊은 새 독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잘난 척 같지만 선생은 ‘내가 아직 청년 작가이구나.’ 생각했단다. 물론 그만큼의 책임감과 그런 지지를 보내준 젊은 독자들과 어떤 식으로든 소통해야 된다는 사명을 느끼게 되지만 말이다.

자전적 성장소설 『개밥바라기별』을 펴낸 소설가 황석영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하기 전에 어느 심리학 책에서 'stopgap'에 대해 읽었다. 번역하면 구멍마개라는 뜻인데 이 용어는 사회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을 지칭한다. 특히 우리 근대사와 관련이 많다. 우리는 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저지른 많은 일을 그 당시 해결하지 않고 설렁설렁 건너뛰며 대충 때우듯 지나왔다. 상처를 해결하려면 그 구멍마개를 열어 안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시대에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거다. 그렇다면 개인이라고 해서 다를까? 개인도 똑같다. 무심히 잊고 지나치는 나만의 상처, 작은 갈등을 항상 들여다보고 다독거려줘야만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사랑이 생기면서 마음이 열린다. 구멍을 들여다보지 않고 놔두면 자폐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런 이야길 젊은 독자들에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외국의 유명 작가들을 보면 그들의 주요한 작품 중에 꼭 성장소설이 한 편씩 들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일찍이 근대화를 겪으면서 개인적 자아를 발견하고 존중하여 그것을 소재로 한 작품을 펴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자아에 눈뜨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한국문학에서 성장소설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있다 하더라도 짧은 단편들뿐이었다. 이미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인터넷 매체에서 혹시라도 연재 제의가 오면 무조건 할 생각이었단다.


과거와 현재, 세대는 달라도 공감은 같은 사춘기들

황석영 선생은 4?19세대이다. 선생이 말하는 4?19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평론가 김윤식 선생의 말처럼 6~70년대의 문학으로 구분된다. 유년기에 한국전쟁을 겪고 60년대부터 자아에 눈을 뜨면서 개인적인 작품을 막 시작할 무렵, 베트남전이 터져 무려 30만 명이라는 인원이 베트남전을 경험하고 귀국한다. 그 후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화가 시작되고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이 심해진다. 그 당시엔 소설 한번 잘못 쓰면 시말서를 쓰거나 뺨 맞기는 예사였다. 심지어는 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글쓰기에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글 쓰는 시간 외엔 소주나 마시며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가서야 자유로워지니까 말이다. 그런 세월을 겪고 보니 이문구 선생이나 조태일, 얼마 전 작고한 이청준 선생까지 4?19 세대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 같다고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개밥바라기별』은 제도권 교육으로 인해 짓눌린 사회 분위기에서 자아를 해방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려는 사춘기 소년 ‘유준’을 통해 4?19를 겪은, 그러나 개인의 은밀한 상처를 감추어두고 구멍마개를 열지 않으려 했던 그들 세대에게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황석영 선생의 작품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의 일부분이 단편 「몰개월의 새」와 많이 닮았음을 알 것이다. 베트남 참전을 앞둔 특교대 병사인 주인공이 갈매기라는 술집의 작부인 미자를 만나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는 생략하더라도 주인공이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부대를 무단이탈하여 서울로 들어와 자신이 남기고 간 잔재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돌아보다가 결국 외롭게 귀대하여 베트남으로 떠난다는 부킺은 정말 『개밥바라기별』과 닮았다. 알고 보니 그 구성을 장편으로 늘였다고 한다.

『개밥바라기별』의 전체적인 내용은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준은 나름대로 지향하는 목표가 있어 짓눌린 제도권 교육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의 길을 가는 사춘기 소년으로 나온다. 그 중심에 ‘나’, 유준이 있고, 시선이 바뀌면서 친구들의 이야기가 유준을 객관화하여 바라본다. 『개밥바라기별』은 이 소설을 읽는 젊은 독자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큰아버지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젊은 독자들이 과연 공감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풍속, 패션, 시대감각이 달라졌다 해도 세상과 마주하면서 겪게 되는 성장통이나 자기만의 세계관을 세우려는 몸부림은 요즘 사춘기들의 내면적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선생의 이 말에는 무척 공감이 가는데 『개밥바라기별』을 읽은 후 세대가 다른, 요즘 세대들의 사춘기를 다룬 전아리 작가의 『직녀의 일기장』을 읽게 되었다. 조금은 의도적인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두 권의 소설을 두고 보았을 때 한국 문학의 거장이며 큰 별인 황석영 선생과 이제 갓 신인으로 등단한 전아리 작가의 말도 안 되는 문학적인 비교는 차치하더라도 내용 면에서 보여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고민은 그 세대나 요즘 세대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선생의 젊은 독자와의 소통은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빛나는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일상의 꽃밭, 세상과 소통하기

인터넷 연재는 여러 가지 틀이 있지만 과정을 길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 네티즌들은 이미지에 빠르게 대응한다. 예전처럼 백작부인이 마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걸 서술하는데 50매씩 쓰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든 내용을 함축하고 축약하여 굳이 행간을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독자가 그 행간을 떠올려 한 장면이 지나면 화면과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유준이 미아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 그다음 장면은 몇 달이 지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유준과 미아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작가는 자세히 알려주는 대신에 대사 몇 마디와 복선만 깔아준다. 그다음은 독자의 머릿속으로 그 과정을 그려본다는 거다. 이런 형식의, 작가가 행간을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손님』『바리데기』를 쓸 때부터 생각해온 것이란다.


선생은 『장길산』을 집필하고 난 후 손으로 쓰는 글이 너무 힘들어 작가를 그만두고 싶었단다. 그러나 우연히 이문구 선생이 전동 타자기를 사용하는 걸 보고 연필이 아닌 기계(!)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다. 그 후 타자기에서 워드 프로세서로, 이젠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은 하나의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도 연필을 고집하는 동료를 보면 답답해하기도 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기계이기에 거부감을 주기도 하겠지만 곡괭이나 삽처럼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잘 활용한다면 나쁠 것이 없다. 이어령 선생이 ‘디지로그’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아주 적절한 말인 것 같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세계 시스템에 동참하는 길이고 선생이 젊은 독자와 소통하는 방법인 거다.

『개밥바라기별』을 쓰는 동안 촛불문화제를 보았다. 그건 그냥 저절로 나온 게 아니라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소통 문화의 특성에서 온 것이었다. 외국에서는 무심히 봤지만 한국에서 보니 런던, 파리, 베를린의 젊은이들은 다 똑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분히 개인적이고 생활 중심적이며 일상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각기 잘게 찢어진 여러 가지 이슈들을 다투지 않고 공존해간다. 여성주의자, 생태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동성애자 등 개인이 추구하는 자유의 여러 가지 형태들이 큰 선에서는 화합을 한다. 각자의 모퉁이에서 피켓과 구호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모이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꽃밭이 되는 셈이다. 꽃밭에 핀 여러 가지 꽃, 이런 빛나는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일상의 꽃밭이 촛불문화제에서 보였다. 세계적인 문화적 표현, 이게 인터넷 소통 문화에서 왔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개별화된 아름다움은 각자의 방(블로그)이 있어야 존재한다. 또 방은 있되 소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소통하기 위해서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이게 현실의 광장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문화가 변화하고 진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표현의 양태를 만들어 소통을 바라는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처럼 언론을 장악하여 컨트롤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거의 소통하지 못한 채로 계속 갈 것이다. 즉, 인터넷 언어나 방법론은 진화하고 시스템은 따로 놀게 되는 꼴이다.

인터넷 연재를 하면서 황석영 선생은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도 보았고 산문과 미디어의 변화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디지로그‘의 상태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인터넷에서의 소통은 혼자 책을 읽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의미이기에 다른 종류의 문화 체험인 셈이다.

선생은 『강남 형성사』(가제)라는 작품을 준비 중이다. 과거처럼 큰 단락으로 거대한 메시지를 푸는 방식이 아니라 바나나 잎에 색색의 색깔로 작게 만들어진 신들을 올려놓고 신들과 함께 일상생활을 하던 발리 우붓 섬의 예술가촌처럼 우리 근대 민중 연예의 총아라 일컫는 꼭두각시 캐릭터를 형상화하여 그 속에 이야기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쓸 생각이란다. 이것 역시 인터넷 매체랑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선생의 늙은(!) 재능을 발휘하여 써 볼 생각이라고 한다.


삼류 같은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궁금한 후일담들

이어진 질문의 시간, 원래는 출판사 측에서 꽉 짜인 프로그램을 가져왔지만 그 프로그램대로 하자면 읍내문화제 같은 형식이 되므로 그냥 동네 아저씨에게 궁금한 것을 묻듯이 책도 좋고 일상적인 것도 좋으니 뭐든 물어보라고 했다.

이 책은 알다시피 황석영 선생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그러니 등장인물들 역시 실존인물들인 셈이다. 책을 읽어봤다면 그들의 행보가 궁금할 것이다. 선생은 실제 후일담을 물어보는 건 삼류이며 다른 곳에서는 이런 것은 묻지 마라며 핀잔을 줬지만(질문자는 별광장(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하던 블로그의 명칭)의 회장이라고) 아주 잘 설명해주었다. 이 질문에 관한 답은 선생의 답변처럼 책에도 나와 있다. “당시에는 명문고교의 어린 ‘신사들의 모임’을 서로가 대단하게 여겼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세상 어느 사회에나 있는 엘리트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좌절하거나 아니면 살아남아서 요 모양의 산업 사회를 이끌어갈 사회 지도층이 되었다. (…) 그들은 사창가를 가거나 어두운 대폿집을 드나들며 퇴폐의 흉내도 냈지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지도자가 되는 길인가도 잘 알았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정말 방기하지는 않았다. (…) 하지만 그들이 가진 매력 가운데 으뜸인 것은 역시 자기 존재와 생각을 서투르게 드러내지 않는 점이었다. 또한 밖으로 드러낼 때도 일부러 그것을 보편적인 사물에의 비유나 실제적인 것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책의 내용처럼 학교 때의 생활이 미래를 좌우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엘리트 놀음에 심취를 하면서도 결국 그들은 각자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찾아간 셈이다.

상진이는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사업하다가 은퇴해서 잘살고 있으며 정수는 캐나다에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하다가 이탈리아로 가서 지금 그곳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다. 영길은 70년대 근대화의 역군으로 무역한다고 돌아다니며 열심히 일을 하더니 업무 중 과로사했다. 태치는 러시아 대사를 지내고 일찍 죽었으며 특이한 것은 인호인데 인호는 그때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모두들 제일 궁금해 하던 미아는 서울대를 나와 결혼하여 사별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디선가 우연히 보니 뚱뚱해졌더라며 선생은 웃었다. 아, 그중에 문학평론가가 된 동재, 김현 선생도 있다. 그 외에 장씨 같은 이는 사라져서 어디선가 붕어빵 장사나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논산 약초 아줌마는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며, 진주의 빵집 아줌마는 수십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아들에게 들었단다. 이런 후일담을 듣고 나니 다시 책을 읽으며 그들의 미래를 보며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무전여행을 하던 유준과 정수, 인호가 제주도에 도착하여 한라산에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중에 관음사 근처에서 지쳐 있던 유준에게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산에서 내려오다 말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한 독자가 그 소녀도 실제 인물인지 물었다. 선생은 소설 장면처럼 안개 속에서 잠깐 말을 주고받았는데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내면엔 그 소녀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이담에 역사에 물어보라고 하는 건 다 헛소리예요. 사람들이 기억하려고 노력을 해야지요.”라는 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엔 무심코 지나친 말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 제주 4?3사건에 관련한 자료를 보면서 그 소녀의 말을 이해했다. 생각해보면 그 소녀는 어렸을 때 어른들의 등 뒤에서 4?3사건을 겪었기에 4?19때 친구를 잃은 유준의 말을 들으며 그런 말을 건넸던 것 같단다.


선생은 고등학교 때 세 번의 퇴학을 당했다. 책에 묘사한 것보다 훨씬 많은 말썽을 피워 어머니 속을 썩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전학 간 고등학교는 야간이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낮에 직장을 다니는 아이들인데다 공부 시늉이라도 하는 아이들은 앞에서 두어 줄 뿐이었다. 그 친구들은 같은 동네 살 때에는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만날 수 있었다. 삼십 대에 『장길산』을 한참 쓸 무렵 훈련장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별명을 부르며 안부를 묻곤 했다. 그의 별명은 ‘깜상’이었는데 그때 친구가 “깜상, 요즘 뭐하냐?” 물었을 때 무심코 “글 쓴다”고 대답을 했더니 친구가 웃음을 참느라 코를 벌렁거리며 무슨 글을 쓰느냐고 했단다. 친구들은 선생이 등단한 작가인 줄은 전혀 몰랐고 이름마저 달랐기에 상상조차도 못했을 거라고 한다.

겉모습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스무 살 무렵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별명이 깜상인 데다 생긴 것도 스포츠를 하는 사람처럼 생겼는지 여자가 권투선수냐고 묻더란다. 그러면서 말하길 “생각은 더러 하세요?" "책도 좀 읽으시구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가끔 문학담당 기자들이 묻는다. “선생님은 언제 소설 쓰세요?” 선생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미있게 놀기만 할 줄 아는 사람으로만 알지 글을 쓸 사람처럼 보진 않는단다. 그래서인지 젊었을 때 ‘문소’(‘문학소녀’라는 말을 이렇게 줄여 말하여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문소’라니! 선생님의 위트는 정말이지;;)들에게 인기가 없었다며 웃으셨다.

황석영 선생의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래된 정원』은 흥행에 실패를 했고 「삼포 가는 길」은 드라마로 만들어 성공했으나 영화로는 실패한 작품이다. 「삼포 가는 길」의 영화에 대한 비화는 (생략) 너무나 어이가 없는 경우였는데 그 영화를 보다가 너무나 분해서 화가 났을 지경이라고 한다. 선생은 늘 대박이나 쪽박보다는 균형을 유지하는 정도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앞으로도 나이에 걸맞게 문학성을 지키면서 ‘중박‘을 하는 정도의 작품을 쓰고 싶단다. 이런 균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 정도 되니깐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명심하길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두 시간가량의 긴 시간이었지만 아주 즐겁고 유익했다. 선생의 연세에 비하면 이날 온 독자들은 자식뻘이 되는 셈이다. 부모와 자식이 어떤 주제를 두고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에도 다 같이 웃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큰 별, 황석영 선생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화양연화>에 보면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한다. 뜻을 풀이하자면 ‘365일 꽃이 피는 시절’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삶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일컬을 때는 '개밥바라기별'이라고 해야겠다.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했던 사춘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름이니까 말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방랑을 하면서 저녁 무렵 해가 지?마자 서쪽 하늘에 초승달과 더불어 나타나던 정다운 나의 별을 기억하고 있다. 벌써 경험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땅거미 질 무렵은 세상이 가장 적막하고 고즈넉해지는 순간이다. 새들도 바삐 저녁 숲을 찾아 깃으로 숨어들고 나무들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직전 짧은 정적 속에 가지를 벌리고 조용히 서 있다. 동네 아이들도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밥상머리로 돌아가고 굴뚝에는 잔불 연기가 오르는데 창마다 노란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나는 낯선 마을의 고샅길 모퉁이에서 또는 들판의 두렁길 위에 서서 그맘때 나타난 그 별을 올려다보았다.”


사진으로 보는 황석영의 향긋한 북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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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저9,000원(10% + 5%)

언제나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작가, 세계사의 주요 연표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그를 외면하지 않은 작가 황석영의 10대 시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이자 내면의 성장을 다룬 빼어난 성장소설 『개밥바라기별』. ‘개밥바라기별’은 해지고 난 초저녁, 개들이 저녁밥 달라고 짖을 무렵 떠오르는 금성을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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