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머리조차 낭만적인 최백호는 여전히 스니커즈를 즐겨 신는다. 소탈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최백호. 음반 발매를 계기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이번 앨범이 처음이라고 하니, 얼마나 야심 차게 준비한 앨범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인터뷰 하루 전, 최백호의 새 앨범 <다시 길 위에서>를 들으며 윤중로를 걸었다. 팝재즈, 누에보 탱고, 라틴, 집시 스윙, 로맨틱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한 최백호의 깊이 있는 음성은 겨울을 맞이하는 지금에 딱 제격인 BGM이었다.
박주원, 말로, 전제덕 등 재즈 스타들과의 만남
“예전에는 모든 곡을 제가 만들었는데, 이번 앨범 <다시 길 위에서>는 후배들에게 작사, 작곡을 모두 맡겼어요.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작년에 기타리스트 박주원 씨의 앨범
<슬픔의 피에스타>에 수록된 「방랑자」라는 곡에 피쳐링으로 참여했는데, 그게 기회가 됐어요. 집시기타라는 장르가 굉장히 흥미롭더라고요.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사실 제 나이에 새로운 앨범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죠.”
올해 1월부터 앨범 준비에 들어가 10개월 만에
<다시 길 위에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 동안 몇 차례 싱글과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한 적은 있지만 정규 앨범은 2000년 <어느 여배우에게> 이후 처음이다. 최백호는 본인이 만든 곡이 아니면 잘 부르지 않기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앨범은 이례적이다. 말로의 앨범 작사가로 활동해온 이주엽이 작사의 대부분을 맡았고 표창훈, 김종익, 최광신, 유해인 등 젊은 실력파 작곡가들이 앨범에 참여했다.
<다시 길 위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축적 노랫말, 고급스러운 편곡이 어우러져 가요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는 음악을 기초부터 공부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번 앨범을 통해서 많은 연주인들을 만나면서 음악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 <다시 길 위에서>는 최백호라는 나이 든 남자에게 어울릴 만한 곡들을 담은 앨범이에요. 가사가 제 인생 이야기는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분들이 공감할 만한 노랫말이에요. 그 동안 여러 곡을 쓰면 제가 쓰는 글의 한계가 있었거든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저도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평소 최백호의 목소리를 좋아하던 후배 아티스트들은 최백호의 러브콜에 당연한 듯 화답했다.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기타리스트 박주원, 피아니스트 민경인?조윤성 등은 선배 음악인 최백호의 의미 있는 도전에 동행했고, 말로와 박주원은 노래와 연주뿐 아니라 작곡에도 참여했다.
노랫말에 취해 인생을 되돌아보다앨범의 첫 번째 트랙 「뛰어」는 1976년 최백호의 데뷔 앨범에 수록했던 곡을 새롭게 리메이크했다. 청년 최백호가 다시 돌아온 듯한 열정적인 목소리가 박주원의 환상적인 기타 연주와 잘 어울리는 곡이다. 늦가을의 서정을 노래하는 「만추」는 라틴 리듬 위로 펼쳐지는 스트링 리프와 담담하게 읊조리는 듯한 보컬이 짙은 고독을 느끼게 한다. 타이틀곡 「길 위에서」와 탱고와 클래식, 재즈를 결합한 「목련」은 가장 주목할 만한 노래이자 최백호가 특별히 아끼는 곡이다.
“녹음하면서 가장 까다로웠던 곡이 「목련」이에요. 격정적인 피아노 연주와 경쾌한 스트링 사운드 사이에서 리듬을 타면서 불러야 하는데, 참 힘들더라고요. 너무 어려워서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하지만 어려운 만큼 완성하고 나니, 가장 뿌듯한 곡이에요. 「길 위에서」라는 곡은 가사가 참 좋은데, 녹음을 하면서 20대 때 읽었던 <노상에서>라는 책이 생각났어요. 또 제 노래 중에 「길」이라는 노래도 있고, 「끝이 없는 길」이라는 곡도 있거든요. 여러모로 제 인생과 추억을 많이 떠올린 곡이죠.”36년 음악 인생, 지금까지 20장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최백호는 스스로 이번 앨범
<다시 길 위에서>가 가장 만족스럽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력파 아티스트들과의 만남을 비롯해 무엇보다 힘을 빼고 오로지 노래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점점 음악이 디지털화되면서 아날로그 감성이 점점 사라진다는 점이다.
“제가 데뷔할 때는 카세트 테이프도 나오기 전인 LP시대잖아요. 노래 한 곡을 부르다가 틀리면 다시 녹음을 해야 하는 정말 고된 작업이었죠. 하지만 전 그 때가 훨씬 좋아요. 요즘 음악을 들으면, 따로따로 연주해 입히니까 너무 완벽해서 인간적인 멋이 없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완전히 아날로그 식으로 녹음을 해볼까도 싶어요.”후배 양성을 위한 계획도 있을까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들을 물어보니, 이적, 아이유, 국카스텐, 알리 등을 꼽았다. 최백호는 창작 능력이 있는 가수들이 오래 갈 것이라며, 지금 시대에서 패티김, 이미자 같은 가수가 나왔으면 하는 소망을 말했다. 한편 그는 원로 음악인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사)한국음악발전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지금이 가수로서 최고의 시기라고 생각
스스로 인생의 후반전을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는 최백호. 그는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한다. 청년 시절에도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살기 보다는 자연의 순리대로 욕심 없이 사는 삶을 꿈꿔온 그이다. 「낭만에 대하여」로 큰 인기를 누렸을 때에도 오랫동안 슬럼프를 겪었을 때에도, 그는 쉽게 환경에 휘둘리지 않았다.
“「낭만에 대하여」가 제 가수 생활에 참 많은 걸 줬죠.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인기도 많이 얻었고요. 하지만 전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예전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거든요. 오라는 대로 오고 가라는 대로 가고,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죠. 라디오 DJ를 하고 있으니 세상 이야기도 많이 듣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죠.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깊이 사귀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웃음).”어렸을 적 화가가 꿈이었던 최백호는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09년에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또 드라마 <트리플>에 주인공 아버지 역을 맡아 연기자 데뷔를 했다. 그룹 김창완밴드의 리더 김창완의 권유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다시 연기에 도전해볼 생각은 전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다만 오랫동안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어, 영화감독 데뷔는 평생의 숙원이다.
“미사리에서 활동하는 무명가수들 이야기에요. 딸아이가 영국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있는데 제 작품을 만들어줄 것 같진 않고요(웃음). 아마 제가 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 최민식 같은 느낌을 가진 배우가 주인공이었으면 좋을 것 같네요.”그는 가수가 본업이지만 축구도 하고, 골프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다방면에서 취미를 즐기고 있다. 잠을 적게 자는 것이 스스로 문제라고 하지만, 채식을 하는 습관 덕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요즘에는 ‘나무’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고 내년 1월에 있을 개인 콘서트 준비에 한창이다.
“가수가 제 인생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가장 행복할 때는 노래할 때죠. 나이를 들면서 자꾸 생각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에요. 젊었을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주제를 넘지 않는 것, 그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최백호의 새 앨범
<다시 길 위에서>는 원숙해지되 열정은 그대로인 음성을 담아냈다. 어떤 감정이든 느낄 수 있도록 여백의 미를 살렸다. 타고난 여유로움을 가진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싶다면, 우선 마음을 비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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