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담고 있는 고민의 무게 탓일까. 오랜만에 모국을 방문한 강상중 교수의 예의 무표정한 얼굴은 유난히 더 굳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민하는 힘』발표 이후 강 교수가 ‘살아 낸’ 일본에서의 삶들은 그리 녹록치 않았던 탓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치의 신경증을 앓던 그의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에 대지진이 강타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그와 동시에 후쿠시마에 원전사고가 연이어졌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느낀 절망감은 개인적인 불행과 맞물리며 그에게 더 큰 상실감과 고통을 안겼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런 시간들은 그에게 재차 어려운 고민을 이어가게 했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했다. 전작에 이은 후속작의 한국판 제목을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핸디캡을 극복하고 일본 주류 지식인으로 주목 받다
폐품수집상의 아들, 재일 한국인 2세……. 일본에서 살아가는데 그런 태생적 조건들은 삶의 시작부터 그의 발목을 잡은 핸디캡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 정교수가 됐다. 그 후 그는 일본이란 사회의 이너서클에 포함되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주류가 된 사람의 시각으로서 일본의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 사회, 동북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쏟아놓았다.
현재 그는 폐쇄적인 일본 사회에서 재일 한국인 2세라는 주홍글씨에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게다가 밀리언셀러 저자이자 TV 토론 프로그램의 인기 패널로서 활약하며 많은 팬을 확보한 유명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미증유의 대재난에 직면한 일본 사회를 바라보며 경험했던 고민과 생각을 천천히 털어놨다. 그 말 속에 그가 느낀 고통의 깊이가 절절히 느껴졌다.
“후쿠시마에서 만난 사람들이 했던 말은 ‘이런 사태를 당했는데 굳이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였습니다. 제 아들 역시 왜 중증의 질환을 앓으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버지인 제게 몇 번이고 되물었죠.”
후쿠시마 원전사태의 원인이 된 동일본 대지진을 그는
“1945년 8월 15일 종전일(우리나라의 광복절은 일본의 패전일이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이를 종전일이라고 일컫는다)에 비견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은 결국 책을 쓰게 하는 동기 중 하나가 됐다.
“전후 일본인은 아시아에 속했으면서도 중국이나 한국 같은 아시아 국가와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서도 뭔가 특별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일종의 특권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죠. 하지만 이런 자기만족적인 자화상은 20년 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어요. 매년 3만 명 정도에 달하는 고독사, 자살자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지방경제가 쇠퇴하는 가운데 비정규직이나 무직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 직면했죠. 거기에 3.11(동일본 대지진)은 마지막 한방을 크게 때리는 재앙이 된 셈이고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해지는 일본,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한국
그는 전작인
『고민하는 힘』에 이어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도 근대 일본에 손꼽히는 문호인 나쓰메 소세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집필을 현대 일본의 문제와 연관해 사유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그중에도 특히 많은 언급을 한 것은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독도가 시마네 현으로 편입된 것은 을사조약에 의한 것입니다. 을사조약은 러일전쟁의 결과이기도 하죠. 나쓰메 소세키는 바로 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라는 국가는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일본은 그 후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 차례 멸망을 하게 됩니다(종전일). 그러나 그로부터 반세기가 채 되지 않은 기간에 다시금 세계 최대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죠.”
그의 말에 따르면, 현대의 일본이 직면한 시대적 상황은 나쓰메 소세키가 멸망을 이야기하던 100여 년 전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 다른 나라보다 더 뛰어나게’를 외쳤던 일본의 방향과 전혀 다른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그런 일본의 모습과 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했지만 쉼 없이 계속되는 경제발전 속에 방대한 격차가 양산되었고 젊은이들의 자살이 OECD국가 중에서도 수위를 점하게 되는 현실을 맞고 있죠. 더 풍요로워졌다면 더 살기 좋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지금까지 이어온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 국가적 재난을 겪은 일본이 ‘민족주의 대두’의 상황을 맞으며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문제를 지적했다. 굳이 최근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사례는 이미 과거에도 실현된 바 있다. 대재난과 극단적 민족주의가 교차되는 순간 인간이 드러내는 광기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있었죠. 그때 7천명 이상의 한반도 출신자들이 학살됐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만주사변이 일어났고요. 관동 대지진 6년 후에는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경우 전쟁 이전 지진이라는 재해를 통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 것이죠. 3.11 사태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일본의 미디어에서는 재해와 관련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대신 한국이나 중국과 관련한 영토문제가 주요뉴스로 다뤄지고 있죠. 3.11 당시 한국은 일본에 원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을 계기로 한일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현재 일본에서는 상당히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가 단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로 깊은 고민 속에 아직 인간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한국 역시 일본과 비슷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지만 희망적인 부분도 있음을 지적했다.
“일본의 상황은 한국 이상으로 정치적인 폐색감이 짙어진 상황입니다.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국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대안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 사회는 글로벌화 속에서 더욱 왜곡이 심화되고 있고 그것은 일본이 거쳐 온 것 보다 더욱 압축적이고 첨예화 돼 있다는 문제가 있죠. 그리고 그 속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이 대두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강상중 교수와의 대화
강상중 교수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고통의 터널을 통과 한 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깊은 고통과 고민을 경험한 후에 비로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유의 심연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한 시간을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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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언급한 작가들은 특히 섣부른 희망을 경계하고 있는데요. 그런 작가들의 철학과 작품을 예로 든 이유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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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우 지난 15년간 매년 3만 명이 자살을 해 왔습니다. 단순화하면 45만 명 이죠. 여기에 10을 곱한 숫자는 실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450만 명이 되죠. 그들 한 사람 당 10명 정도의 사람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가정하면 무려 4천 5백만 명이 됩니다. 즉, 일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죽을 정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한편 한국 사회는 가족 간에 사랑과 정이 강하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또한 연장자에 대한 공경심이 높다고도 하고요. 그러나 정말 현실은 어떨까요. 그러한 한국 사회에 왜 그렇게 많은 자살자가 나오고 있는 거죠?
결국 우리는 국경을 떠나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들 사이에 분단선이 심화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문제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의 문제라는 인식입니다. 일본의 경우 3.11 이후 모두가 열병에 걸린 듯 사람과 사람간의 연대에 대해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난 지금 그런 연대, 유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영토문제를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가 대두되며 일본이란 국가의 국민으로서 ‘우리는 하나’라는 합창이 이어지고 있죠.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섣부른 희망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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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서는 책 속에 유대인 정신의학자인 에밀 플랑클이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 마음의 어둠과 삶의 의미를 해명하려 한 예를 들며 ‘비관론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가 그 정도까지 암담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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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1년 경제 파탄을 겪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한 달 정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아시는 미국의 9.11 사태가 있었죠. 그 9.11사태의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경제 파탄은 화제가 되지 못했어요. 물론 1997년 한국의 IMF 위기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한국 역시 직접 둘러봤죠.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비참함은 한국의 위기와 비교가 안 될 정도였어요. 그때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어떤 중산계급의 사람의 말 중 “이것은 유약한 제노사이드(대량학살)”란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재에도 유럽의 위기를 보면 한국 역시 다시 경제적 위기가 닥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장담을 할 수 없죠. 더구나 현재 일본 국채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는 한국보다 낮습니다. 제 눈에는 이러한 현재의 상황과 비참함이 에밀 플랑클이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한 것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유약하지만 여기저기 퍼져있는 상태의 비참함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겉보기에 나무랄 데 없는 중산층의 삶을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게 되는 사태가 일상적으로 도래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죠. 선진국으로 손꼽히는 유럽이나 미국에서조차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만성적인 불안의 시대에 안이한 낙관론의 처방을 내놓는 것은 범죄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미래는 달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아나갈 가치가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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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안 세력이 없다고 하셨는데,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어지는 일본 내부에서 이런 움직임을 반대하는 에너지 혹은 다른 노력은 없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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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중국과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 그리고 한국과의 독도문제에 대해 강한 민족주의적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은 일본이 미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중국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일본 국민들이 ‘우리들은 누구인가’란 질문을 애매한 상태로 놔둔 것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들과 화해를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일본의 국민의식, 특히 전후의 국민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 국민의식 속에는 분명히 아시아 속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미국과 동등하거나 일본인 그 자체가 미국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에 존재하고 있는 미군 기지의 70%가 일본 영토의 1%가 오키나와 일부 지역에 집중 돼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군에 의한 강간 등의 범죄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규탄하는) 오키나와의 목소리에 동조해서 같이 목소리를 내자는 분위가 예전에 비해 일본 본토에서도 일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도쿄를 중심으로 해서 원전을 반대하는 데모가 진행되기도 했고요. 이것도 어떤 종류의 주체적 운동,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독도나 센카쿠 문제 같은 민족주의와 관련 된 영토문제에 어떤 식의 주체적 움직임으로 이어질지는 예측하기 힘듭니다. 일본이 어떠한 방향을 향해 나갈 때 커다란 자극을 주는 것은 한반도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국민들은 일본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적절한 대응을 해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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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 저 | 사계절
한국사회가 삶을 보존하기에 부적합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개인들은 불안과 좌절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불안과 좌절의 시대에 다시금 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강상중은 일찍이 근대적 삶의 의미를 궁구한 일본의 국민작가 소세키와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 심리학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 윌리엄 제임스 등의 치열한 고민과 통찰을 들려주고, 근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조건에 처한 개인들의 불안한 삶을 응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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