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봉석의 하드보일드로 세상읽기
모든 주민이 몰살당한 산골마을, 그 이후… - 『야성의 증명』
인간성 , 그 끝은 어디인가? 모리무라 세이이치 - 사람다움을 잃어가는 사람들 이야기
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진정한 얼굴은 무엇인가?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증명 3부작’에서 인간, 인간성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사회적인 범죄들을 통해서,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파고들어간다. 고도경제성장이 안겨준 물질적 부에 도취해 있으면서도, 현대인들은 또한 공허를 느끼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너무나도 피로해진 상태라는 것을.
일본 사회파 추리의 거장으로 흔히 마쓰모토 세이초와 모리무라 세이이치를 꼽는다. 범죄의 ‘동기의 묘사와 인간 묘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로의 초점』 『점과 선』 『모래그릇』 등을 발표하여 사회파 추리의 전범을 제시한 마쓰모토 세이초는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작가다. 근래에는 모비딕과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공동으로 픽션과 논픽션을 포함한 ‘세이초 월드’를 꾸준하게 내고 있다. 그에 비하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로얄 패밀리>의 원작이 『인간의 증명』이었지만, 그 덕에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유명세를 타지는 않았다.
1933년생인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호텔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대도회』(1767)를 발표하며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고층의 사각지대』(69), 『신칸센 살인사건』(70), 『초고층호텔 살인사건』(71),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부식의 구조』(72) 등을 발표하며 승승장구하던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한동안 잊혀졌던 『옥문도』 『이누가미 일족』의 요코미조 세이시를 최고의 스타작가로 만든 가도카와 출판사의 가도카와 하루키 사장에게서 ‘작가로서 증명이 되는 작품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트릭을 중심으로 한 본격 추리소설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심혈을 기울여 ‘증명 3부작’인 『인간의 증명』(76), 『야성의 증명』(77), <청춘의 증명>(77)을 발표한다.
‘증명 3부작’은 독자와 평론가에게 절찬을 받으며, 모리무라 세이이치를 최고의 스타 작가이자 거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인간의 증명』은 770만부 이상이 팔렸고, 총 누적 판매부수는 1천만부가 넘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당시 가도카와 출판사는 소설, 영화, 사운드트랙, 애니메이션 등을 하나로 묶어 마케팅을 하고 블록버스터로 만드는 미디어믹스 전략을 펴고 있었다. 저서만 750권에 달하는 마쓰모토 세이초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모리무라 세이이치도 360여권의 작품을 발표했고 총 누적 발행부수는 1억 4,650만부에 달한다. 2011년 발표한 『악의 길』이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여전히 현역작가로 활동 중이다.
‘증명 3부작’의 스토리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관된 주제의 ‘증명’을 시도한다. 70년대는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패전의 고통과 가난에서 벗어나 도쿄올림픽을 겪으면서 일본은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다. 다시 세계의 일류국가가 되었다는 생각에 흥청망청하며 자신감에 들떠 있던 순간이었다. 일본은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단지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것만으로 인간은 만족하고, 행복해지는 것일까? 경제적 성장에 가리워진 수많은 사회적 문제, 모순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진정한 얼굴은 무엇인가?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증명 3부작’에서 인간, 인간성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사회적인 범죄들을 통해서,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파고들어간다. 고도경제성장이 안겨준 물질적 부에 도취해 있으면서도, 현대인들은 또한 공허를 느끼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너무나도 피로해진 상태라는 것을.
‘증명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야성의 증명』은 산골 마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사건과 한 가문이 지배하는 소도시에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관통한다. 후도라는 마을 주민 모두가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유일한 생존자였던 초등학생 요리코는 보험 외판원인 아지사와의 양녀로 입적한다. 그런데 아지사와가 요리코와 함께 정착한 하시로 시는, 후도의 살인사건 당시 희생당한 등산객의 여동생 오치 도모코가 살고 있던 곳이었다. 하시로는 봉건시대의 영주가 물러난 후, 하급 무사 출신의 오바 가문이 시의 지배권을 잡은 후 그대로 권력을 유지했다. 경찰도, 야쿠자도 모두 오바 가문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치 도모코의 아버지가 신문사를 만들어 잠시 대항했지만, 의문의 사고로 죽은 후 하시로 시에는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오바는 하시로 시의 정부이자 황제였다. 그가 없었다면 이곳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비록 살가죽 아래에 고름이 썩어가는 허울뿐인 평화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평화임은 틀림없다.
하시로에 들어온 아지사와는 도모코와 연인 관계가 된다. 거기에 의심을 품은 이는, 후도 사건을 조사하던 기타노 형사였다. ‘기타노는....완전범죄의 성공에 취한 범인이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면 그가 서 있다. 그런 느낌을 주는 형사였다.’ 끈질기게 한걸음씩 나가면서 증거를 찾아내고, 범인을 추적하는 남자. 마침 아지사와와 도모코의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사건이 벌어진다. 아니 애초에 하시로 시 자체가 범죄의 온상이었다. 하시로에서 살아가려면 비겁해져야 한다. ‘그저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파란을 피하려 한다. 평온한 바다에 풍랑을 일으킬 바에야 숫제 물이 고여서 썩어가는 게 낫다는 식이었다.’ 거대악에 눈을 감고 눈앞의 이익만을 따라간다면 평화가 주어진다. 그러니까 그들은 외면하고, 거짓의 행복과 물질에만 매달린다.
아무리 부정부패를 폭로해도 세상은 눈곱만큼도 좋아지지 않아. 오히려 나빠질 뿐이지. 오바가 꽉 쥐고 있기 때문에 이 하시로가 평화로운 거야. 오바를 몰아내면 또다시 먼지가 날리겠지. 그 먼지를 누가 뒤집어쓴다고 생각하나? 우리 시민들이야. 하시로가와 강을 오바가 독차지하든 말든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없어.
『야성의 증명』은 하시로 시민들이 눈감고 있는 거대악,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려 했던 오바 가문에 도전한 남자의 이야기다. ‘애당초 아지사와란 떠돌이는 ‘오바 왕국’에 홀연히 나타난 떠돌이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떠돌이 개가 이자키 테루오의 보험사기를 발단으로......굳건한 반석 같은 오바 체제를 거세게 뒤흔들고 있다.’ 떠돌이 무사가 거대한 권력의 개들과 싸우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다. 그런데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거기에 또 하나의 설정을 덧붙인다.
아지사와는 단순히 복수를 위해서 세상에 도전하는 남자가 아니다. 그는 체제,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자이자 가해자다. 기타노는 아지사와를 쫓고, 아지사와는 오바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기 위해 달리지만, 누구도 진정한 승자는 되지 못한다. 오바 가문의 부정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정의와 원칙이 지켜지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저마다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거대악을 고발해도, 또 다른 거대악이 대체할 뿐이니까. 결국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단지 오바 가문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관련태그: 야성의 증명, 모리무라 세이이치, 인간의 증명, 증명 3부작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6,120원(10% + 5%)
7,200원(10% + 5%)
12,420원(10% + 5%)
12,420원(10% + 5%)
88,000원(0% + 1%)
상상치 못한 그들의 리그가 펼쳐진다. "인간의 반대편에 있는 게 짐승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