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가 남자배우로서는 지금이 변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30대 초반에는 나이 어린 역도 많이 하는데 지금의 제 나이는 어린 역을 하기에도 좀 그렇고, 나이 많은 역도 아직은 애매해서 그 중간을 찾아야 하거든요. 풋풋함보다는 노련미가 있는 역을 해야 할 때가 됐으니까요. 한 해 한 해 갈수록 제 이름에 대한 무게감이 누가 보지 않아도 커져요. 절 계속 지켜보신 분들이 ‘저 배우 계속 발전하고 있구나’ 느끼게 해야죠.”
서윤미 작가의 기발한 상상에서 시작한 연극 한 편, 선화공주가 클럽 죽순이로, 서동은 연애고수로 나온다. 차마 연애고수처럼은 안 보이는 배우 에녹, 말을 붙여보니 말투에도 모범생 포스가 어려 있다.
“극의 큰 맥락은 서동요와 같은데 이음새가 다르다고 보면 돼요. 역사적으로는 선화공주가 서동을 좋아한다는 서동요가 유행하면서 쫓겨난 선화공주와 서동이 연을 맺게 되잖아요. <밀당의 탄생>에서는 그 전에 둘이 클럽에서 부킹하다 만났었다는 설정이 들어간 거죠.”
지난해 코믹연애사극이라는 이름으로 90%의 유료관객 점유율과 관객평점 9.8점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연극 <밀당의 탄생>, 벌써 세 번째 시즌을 맞았다. 왜 그리 인기인지?
“서동이 이런 말을 해요. ‘나 같은 떠돌이에게 다음이 어디 있소? 지금 설마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오?’ 이 때 고수가 밀당의 어떤 법칙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줘요. 남자의 마음과 여자의 마음을 중간 중간 짚어주죠. 관객들이 굉장히 재미있어 하세요. 여성 관객은 특히 여자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더라고요. ‘맞아, 예전의 남자친구가 저랬어’ 이런 거죠. 그런 감정선과 고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귀 기울여 들으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기자 역시 참고해야 할 장면이 많을 듯.
코믹연애사극을 표방한지라 유난히 연습하면서도 박장대소하는 일이 많았다는데.
“닭살 돋는 장면이 많거든요. 선화공주와 서동이 살포시 안거나 키스를 하려고 하는 장면이나 술을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끈끈한 분위기를 만드는 장면이 있거든요. 간질거리는 장면이 그렇게 많아서 그 때마다 웃음이 빵빵 터져요. 그리고 여기에 해명도령이 나오는데 원래 없던 인물이죠. 해명은 저희 극에서 굉장히 코믹한 인물이고 조미료를 많이 쳐주는 역할이에요. 지금 해명 역을 맡은 분들(오대환, 육현욱)이 워낙 재미있는 분들이라 관객들이 많이 웃죠.”
에녹 역시 주막 씬에서 고수(연애고수 말고, 북 치며 맥을 짚어주는 사람)한테 막걸리를 한 병 받고 관객에게 나눠주며 얘기하는 장면에서 애드리브를 선보인다. 시즌 1, 2때는 진짜 막걸리를 관객과 주고받기도. 술 한 잔만 마셔도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보는 지경’에 다다른다는 에녹, 어떤 애드리브를 발휘할지 사뭇 기대된다.
“그 시대에는 지금처럼 안 보이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친구들은 밀당이라고 해봤자 나쁜 남자, 나쁜 여자 스타일을 떠올리잖아요. 과거에는 편지 한 장 전해주고 10년 기다리고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느린 시대니까요. 그런 느림의 미학이 있었을 것 같아요.”
밀당의 고수 서동역을 맡은 에녹은 그렇다면 밀당을 잘 하는 편일까?
“아뇨. 저는 밀기만 합니다. 아니다, 당기기만 합니다.”
많이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제목만 보고 관람 여부를 결정하는 관객들이 다수 있는 바, <밀당의 탄생>을 보면 밀당을 배울 수 있을까?
“하하하. 아는 부분을 다시 짚어주는 거죠. 밀당의 법칙을 알게 되기보다는 분명 돌아가실 때는 같이 온 분과 사랑하는 눈빛으로 가실 겁니다. 수많은 연애 작품과 달리 현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조심스러운 밀당이라 밀당 자체가 더 예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더 달달하기도 하고,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저희 공연을 보시면 손잡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녹은 개인적으로 밀당은 잘 못하지만 연애에 있어 밀당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밀당이라는 게 굳이 처음 만났을 때뿐 아니라 만나면서 쭉 긴장감은 필요할 것 같아요. 긴장감 없이 그냥 서로 편해져서 퍼져버리면 관계가 깨지잖아요. 밀당의 관계는 결혼해서도 평생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기자는 혹시나 해서 “결혼은 하셨어요?”하고 물었다.
“저 아직 미혼인데 그래 보여요? 주변에서 제가 그래 보인데요. 뮤지컬 배우 홍지민 선배도 ‘너 유부남이지?’ 하고 물은 적이 있어 상처 받았잖아요. 제가 진짜 유부남처럼 보여요?”
음, 절대 그래보이진 않는데… 그의 실체는 공연장에서 직접 확인하시라.
찬바람 불고 괜히 쓸데없이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는 2012년의 끝물, 배우 에녹에게 올 한 해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저한테 너무 힘든 시간이었어요. 지난해 캣츠를 끝내고 잘 풀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배우가 한 달 쉬는 것도 초조해져서 10년은 늙는 것 같거든요. 나름대로 올해, 공부도 하고 배우고 싶었던 것도 배우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하고 싶은 뮤지컬 무대에 못 섰던 것이 힘들었죠. 그만큼 공연에 대한 간절함이나 겸손함은 커졌어요. 워낙 배우가 많으니까 큰 작품이든 작은 작품이든 그 기회를 바라는 사람은 많거든요. 쉬다보니까 많은 이들이 원하던 배역을 얻어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자부심, 겸손함을 배울 수 있던 한 해였죠. 올 한 해는 그래서 ‘쓰디쓴’ 한 해였어요. 그래서 지금 작품을 하는 게 행복해요. 앞으로 배우 생활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미 내년 1월 뮤지컬 ‘레베카’의 잭 파벨 역을 따낸 데뷔 5년차 배우 에녹, 하고 싶은 배역은 아직도 많다.
“제 나이가 남자배우로서는 지금이 변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30대 초반에는 나이 어린 역도 많이 하는데 지금의 제 나이는 어린 역을 하기에도 좀 그렇고, 나이 많은 역도 아직은 애매해서 그 중간을 찾아야 하거든요. 풋풋함보다는 노련미가 있는 역을 해야 할 때가 됐으니까요. 한 해 한 해 갈수록 제 이름에 대한 무게감이 누가 보지 않아도 커져요. 절 계속 지켜보신 분들이 ‘저 배우 계속 발전하고 있구나’ 느끼게 해야죠.”
‘쓰디쓴’ 한 해가 ‘에녹’이라는 이름에 무게감을 더했나보다. 나이가 들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내면의 갈등을 표현해야 하는 빌리 엘리어트의 아버지 역을 해보고 싶다는 에녹, 그 때쯤 그가 느끼는 이름의 무게감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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