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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손가락으로 피아노 테크닉 ‘묘기’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전통적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다!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지만 끝내 불행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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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벽두를 장식했던 최고의 발라드는 무엇일까요? 저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우울증을 간신히 이겨낸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부터 쓰기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1901년 5월 모스크바에서 비공식 초연합니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출처: 위키피디아] >

1873년 4월 1일에 러시아의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귀족적인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방침을 바꾸어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뛰어났던 그는 신동(神童)으로서 많은 기대를 모았다. 1885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여기서 7년간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또 음악 이론도 배웠고 1891년 피아노 연주의 최고 영예를 획득했다. 모스크바 마린스키 여학교 교사로서의 10년간은 라흐마니노프에게 작곡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마린스키 여학교에서 사립 가극단의 지휘자, 모스크바 제실 가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했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작곡에 전념했다.

그의 걸작 「피아노협주곡 제2번 c단조」는 1901년, 교향시 「죽음의 섬」은 1907년에 초연되어 어느 것이나 호평이었다. 1909년 미국에 건너가 뉴욕에서 다므로시 지휘로 「제3피아노협주곡」을 상연하여 일대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발발과 동시에 미국으로 피신하여 그대로 그곳에 정주하다가 1943년 3월 28일에 캘리포니아의 비벌리힐즈에서 타계했다.

20세기 벽두를 장식했던 최고의 발라드는 무엇일까요? 저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우울증을 간신히 이겨낸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부터 쓰기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1901년 5월 모스크바에서 비공식 초연합니다. ‘비공식’이란 무슨 말인고 하니, 콘서트홀의 청중 앞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교인 모스크바음악원 관계자들과 동료 피아니스트들만 초대해 연주회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공식 초연은 11월 9일,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피아노 연주로 이뤄졌습니다. 청중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하지요.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3년간의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그때부터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1918년까지, 그는 ‘작곡가’로서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줬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자존감’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출처: 위키피디아] >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전통적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는 음악입니다. 대중음악에 비유하자면 ‘발라드’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 곡으로 재기에 성공해 작곡가로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더 이상 조국에 머물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혁명 직후의 러시아를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차르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도 장군의 딸이었습니다.

결국 10월 혁명이 발발하고 3주 후, 스웨덴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기차를 탑니다. 그후 다시는 고국 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스톡홀름 연주를 마친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 192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스위스에 잠시 체류하다가 1935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았지요.

그렇다고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을 ‘자유의 땅’으로 생각하며 동경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미국 망명 전에 가족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지요. “이 정 떨어지는 나라에는 미국인들만 들끓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려고 하는지, 비즈니스를 외치면서 사람을 들볶고 강행군시키는구나. 나는 지쳤다. 성격도 많이 나빠진 것 같구나.”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부터 그 “끔찍한 나라”에 발붙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45세의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습니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출처: 위키피디아]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레코딩 전집>
결국 이 지점에서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연주에 가까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자작곡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과 그리그까지 연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미국 망명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한 곡은 고작 6곡에 불과합니다. 그의 음악적 생애는 그렇게, 45세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뉩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 ‘전직’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존재감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지요. 적어도 1920~30년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요제프 호프만(1876~1957)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손가락을 쫘악 폈을 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에 달했다는 그는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 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완전히 열광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에 대해서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의 언급이 전해집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황금색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피아노 음색은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 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습니다. 비버리힐즈에 저택을 구입했고 두 딸에게는 프랑스 파리에 출판사를 차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을까요? 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후 혹독한 연주 스케줄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을 끼고 살았고 늘 피로를 호소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더 심각했던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였을 겁니다.


< Performed by 에브게니 키신(Evgeny Kissin) >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렇게 살다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가운데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걸작입니다. 1악장은 모데라토(moderato, 보통 빠르기로). 묵직하고 장중한 피아노 독주(8마디)로 문을 엽니다. 이어서 관현악이 첫번째 주제를 제시합니다. 마치 파도가 넘실대는 것 같은 가요적 선율이 뭉클하게 밀려오지요. 그리고 잠시 후 피아노가 센티멘털하고 감미로운 두번째 주제를 노래합니다.

이어지는 2악장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sio sostenuto). 느린 템포로,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서 묵직하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현악기와 클라리넷, 호른과 파곳이 어울려 연주하는 반음계적 서주가 아주 서늘하지요. 특히 이 두번째 악장에는 미국의 팝가수 에릭 카멘이 노래했던 ‘All by Myself’의 오리지널 선율이 등장합니다. 중반부의 눈부신 피아노 테크닉도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3악장은 알레그로 스케르찬도(Allegro scherzando).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하라는 뜻이지요. 앞의 두 악장에 비해 활달하고 힘이 넘칩니다. 현을 중심으로 약간 유머러스한 악상이 펼쳐지면서 시작하지요. 첫 주제를 피아노가 힘차게 연주하고 두번째 주제는 오보에와 비올라가 주도합니다. 마지막 악장에서 현란하게 펼쳐지는 피아노 테크닉은 그야말로 ‘묘기’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취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음악도 드문 것 같습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
   스타니슬라프 비슬로츠키ㆍ바르샤바 필하모닉/1959년/DG


거의 이견 없이 1순위에 놓이는 명반이다. 『리히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정원, 2005년)에 따르자면, 리히테르 본인도 이 녹음에 대해 꽤나 만족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44세였던 리히테르는 광대한 스케일의 러시아적 격정은 물론이거니와, 세밀한 테크닉과 부드러운 서정미에서도 나무랄 데 연주를 들려준다. 한마디로 힘과 기교가 조화를 이룬 명연이다. 전체적으로 약간 두툼한 소리를 들려주지만 불분명하게 뭉개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박력 넘치는 타건과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이야말로 이 음반의 미덕이다. 리히테르 본인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지휘자 비슬로츠키는 “온순하게” 음악을 뒷받침한다. 긴 말이 필요 없는 ‘필수적 명반’이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Vladimir Ashkenazy),
   앙드레 프레빈ㆍ런던 심포니/1970~1971년/Decca


1970년 4월부터 1971년 11월까지, 런던 킹스웨이 홀에서 진행된 녹음이다. 협주곡 1번부터 4번까지를 두 장의 CD에 담았다. 어떤 이들은 리히테르보다 아슈케나지의 연주를 더 선호한다. 리히테르의 호방하면서도 격정적인 연주에 비한다면, 아슈케나지는 보다 상큼하고 명료한 연주를 들려준다. 페달 사용을 극히 자제하는 까닭이다. 아울러 아주 미세한 차이이긴 하지만, 아슈케나지의 연주가 리히테르에 비해 좀더 빠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리히테르가 러시아적 정서를 표출하는 쪽에 중점을 뒀다면, 아슈케나지는 보다 보편적인 낭만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는 느낌이다. 1950년대와 1970년대의 차이, 러시아에서 잔뼈가 굵은 리히테르와 일찌감치 서구를 동경했던 아슈케나지의 기질적 차이일 수도 있겠다.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Leif Ove Andsnes),
   안토니오 파파노ㆍ베를린 필하모닉/2005년/EMI


어찌 보면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은 러시아의 강렬한 이미지에 묻혀 있는 곡이다. 사람들은 이 곡을 들으면서 광활한 설원과 거대한 자작나무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스네스의 연주는 우리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러시아의 눈보라를 완전히 걷어낸다. 연주의 속도 면에서도, 장중하지만 늘어지는 기존의 연주들과 달리 날렵하다. 피아노의 타건도 파워를 앞세우기 위해 뭉개지는 법 없이,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시종일관 명료하다. 베를린 필하모닉도 감정에 휩싸이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안스네스의 피아노에 명확하게 화답한다. 비록 강렬한 눈보라를 몰고 오진 않았지만, 그 눈보라 속에 갇혀 있던 청명한 바람을 이끌어내는 연주다. 기존의 연주에 익숙한 감상자라면 좀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2000년대에 녹음된 ‘협주곡 2번’ 중에서 군계일학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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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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