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사람이 눈물을 만들게 할 수 있는 사람” - 권혁웅 『당신을 읽는 시간』
시 쓰는 데 꼭 술이 필요하지는 않더라 5명의 시인과 함께 한 낭독의 밤
이날 낭송회에는 시 낭송과 별개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와 음주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이날 사회자로 나선 송종원 평론가는 시인이란 “시인은 사람이 눈물을 만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영광 시인은 “술이 시를 짓는데 도움이 되는 줄 착각하고 살았지만, 꼭 시 쓰는 데 술이 필요하지는 않더라.”라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냈다. 진지함과 유쾌함이 공존한 자리였다.
2012년 9월 18일,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당신을 읽는 시간』 시 낭독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당신을 읽는 시간』을 쓴 권혁웅 시인 외에도 다양한 손님이 자리를 빛냈다. 가수 하림, 시인 오 은, 시인 유희경, 시인 이영광, 시인 이준규가 바로 그들이다.
책을 펴낸 권혁웅 시인은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평론),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시)으로 등단한 뒤, 다수의 시집과 비평집을 냈다. 『당신을 읽는 시간』은 66편의 시들을 골라 엮고, 작품에 대한 해설을 겻들인 책이다. 책에 수록한 시 대부분은 21세기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다. 낭독회에 참여한 시인 4명의 작품 역시 책에 실렸다.
이날 시낭송회는 총 2부로 이루어졌다. 1부에는 이영광 시인과 이준규 시인이 등장했다. 이영광 시인은 ‘그늘 속의 탬버린’을 낭독했다.
그늘 속의 템버린 (이영광)
지금은 그늘이 널 갖고 있다
그러니까 넌 빛이야
빛날 수 없는 빛
견디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사랑한 적 없는 독신
너는 예쁘지 아니, 슬프지
탬버린이 울 때까지 탬버린은 그치지 않고
여전히, 검은 눈을 뜨고 있는
흑백텔레비전
텔레비전
그늘은 결국 인간관계지
이것에 걸리기 위해 애썼다
너는 널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사랑한다면 이렇게 오래 같이 살까?
넌 함부로 죽었고
나는 눈물이 흐른다
화양연화 화양연화 화냥년아
너는 네가 괴롭다
금방이라도 그쳐버릴 것처럼
탬버린은 영원히 짤랑거린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
사라졌는데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
이영광 시인의 낭송을 권혁웅 시인은 이렇게 회답했다.
탬버린. 노래방에서 넥타이 머리에 매고 고래고래 노래 부를 때, 우리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던 도우미. 지금은 10분 추가 서비스도 끝나고 미러볼도 더 이상 돌지 않는 캄캄한 방. 그늘 속에 놓인 탬버린은 버림 받은 사람 같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때(“화양연화”)는 갔다. 이제 너는 저 욕설(“화냥년아”) 속에서만 기억되는 아픈 사람이다. 이제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너는 “금방이라도 그쳐버릴 것처럼” “영원히 짤랑”거리겠지. 너는 순간과 영원 사이의 저 착란 속에서만 있다. 그치기 위해서 짤랑대는, 그늘 속에 남겨지기 위해서 손에 들리는 운명이 너의 몫이다. 지나갔으 나 지나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고, “사라졌는데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영원히 소멸을 향해 다가가지만, 끝내 소멸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준규 시인은 ‘새앙각시’를 낭독했다.
새앙각시 (이준규)
국어사전 속에
새앙각시 하나
지나간다
회랑이라는 어색한
말을 따라
어디선가 태평소 소리
느티나무 잎 위로
떨어진 빗방울
국어사전 속의
새앙각시가
시집의 여백 위에
파리의 시체처럼
눌려 있다
커져라, 새앙각시
이 시에 권혁웅 시인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였다.
어느 날 사전 한 구석에서 '새앙각시'라는 말을 발견했다. 새앙머리(두 갈래로 갈라서 땋은 머리)를 한 어린 궁녀를 이르는 말이다. 사전의 행과 행 사이가 무슨 '회랑'이라도 되는 양 어린 궁녀가 재게 걸어간다. 마마께 올릴 탕약이 늦었나? 제조상궁의 급한 독촉이 있었나? '느티나무 잎'에 빗물 떨어지듯 새앙각시의 발소리 가볍기도 하다. 이런 풍경이라면 '태평소 소리' 하나쯤 흘러나올 만하고. 두꺼운 사전에 끼여 '파리의 시체처럼' 짓눌려 있던 말 하나가 시인의 눈에 띄어 살아났다. 저렇게 커졌다.
1부의 끝을 장식한 시는 신현경 시인의 ‘이사’였다.
이사 (신현경)
나 이사를 많이 하였다.
이제 한 번 더 집을 이사해야 할 일이 남았다며는
달팽이집으로 가려고 한다.
달팽이집에 기거하면서
더듬이를 앞장 세워
깃발들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길가에 나무들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초록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분홍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하겠다.
2부에 등장한 시인은 젊은 시인 오 은, 유희경이다. 특히 유희경 시인은 권혁웅 시인의 제자이기도 하다.
“두 시인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 꼭 다루는 젊은 시인이다.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좋아한다. 오 은 시인의 코드는 '유머'다. '지적인 유머'. 썰렁하지도 않으면서 지적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걸 준다. 유희경 시인은 다정하다. 마치 연인이 속삭이는 듯하다. 여성 독자가 특히 좋아한다.”
유희경 시인은 ‘무’를 낭독했다.
무 (유희경)
무를 사러 나왔는데 밑동 잘린 눈이 내린다 당신, 무얼 상상했기에 이리도 하얀 눈이 내리나 그렇게,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간다 한 사내가 넘어진다 일어나 툭툭 털어내는, 그의 잠바가 흐리다 익숙한 이미지를 더듬어 다시 눈이 내리고 나는 고요 그 중간쯤을 올려다본다 내일은 무를 말릴 것이다 나는 오독오독한 그런 상황이 재밌어 또 슬프다 함께 사라져버릴 것들 그리고 잊혀져가는 것들도
오 은 시인은 자신의 작품이 아닌, 다른 시인의 작품을 낭독했다. ‘동사무소에 가자’라는 작품이다. 구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며, 자신에게 동사무소는 특별한 공간이라는 게 선정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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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무소에 가자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前生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무한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낭송회 끝은 권혁웅 시인이 장식했다. 다소 진지해진 분위기를 유쾌하게 바꾸고자 재미있는 작품을 청중에게 소개했다.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이날 낭송회에는 시 낭송과 별개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와 음주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이날 사회자로 나선 송종원 평론가는 시인이란 “시인은 사람이 눈물을 만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영광 시인은 “술이 시를 짓는데 도움이 되는 줄 착각하고 살았지만, 꼭 시 쓰는 데 술이 필요하지는 않더라.”라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냈다. 진지함과 유쾌함이 공존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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