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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만큼 책이 팔린다면 서울도 참 살기 좋은 도시

사람들이 가을에 책을 더 읽지 않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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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에 있는 SBS에서 ‘독서캠페인’ 녹음을 하고 온 날, 나는 독서 캠페인 문구처럼 동네에 있는 꽤 큰 규모의 서점에 갔다. 그곳에서 너무 많은 책들과, 너무 적은 사람들과, 너무 복잡한 카페 풍경을 보고 이 도시 안에 있는 서점들의 균형은 언제쯤 맞춰질까를 고민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숫자만큼 책이 잘 팔린다면, 이 도시의 맥박이 분명 바뀌고 말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1.


길을 걷다가 무심코 은행을 밟았다.

우지직 터지며 코끝으로 올라오는 구린 냄새.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잘 익은 주황색의 방점. 코를 킁킁거리다가 이제 책 읽기 좋은 독서의 계절이 왔음을 느낀다. 하지만 책방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가을이 얼마나 책이 안 팔리는 계절인지! 본격적인 가을 비수기에 돌입한 서점은 책 팔기에 비상에 걸린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 이런 저런 이벤트 페이지를 만든다. 출판사들도 울상이긴 마찬가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같은 문구는 그 계절에 워낙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로 만든 것이다.

목동에 있는 SBS에서 ‘독서캠페인’ 녹음을 하고 온 날, 나는 독서 캠페인 문구처럼 동네에 있는 꽤 큰 규모의 서점에 갔다. 그곳에서 너무 많은 책들과, 너무 적은 사람들과, 너무 복잡한 카페 풍경을 보고 이 도시 안에 있는 서점들의 균형은 언제쯤 맞춰질까를 고민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숫자만큼 책이 잘 팔린다면, 이 도시의 맥박이 분명 바뀌고 말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서점에서 일하면서 서점이 배경인 소설을 생각한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양이 샨티」라는 단편 소설은 내가 인터넷 서점 직원으로 일할 때의 경험담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 소설에선 인간이 아닌 고양이가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다이어트를 한다. 스스로 자신이 원한 죽음을 선택하기 위한 다이어트는 ‘집안에서의 탈출’이라는 모험의 형식으로 감행된다. 하지만 정말 쓰고 싶었던 소설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언젠가 나이 든 중년부인이 나오는 탐정 얘기를 꼭 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밤새 뭔가를 끄적거렸다. 낮에는 대형마트 서점 코너에서 일하고, 밤에는 탐정으로 일하는 이혼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피치 못할 과거가 있어 보이는 이 여자의 공식직함은 서점 아르바이트생.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녀가 하는 일은 마트 곳곳과 서점에서 기승을 부리는 ‘각종 도둑’을 잡아내는 일이다. 막 장을 보러 온 아줌마처럼 (실제로 그녀는 염색을 하지 않아 백발이 듬성듬성 보이는 아줌마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서점을 두리번거리다가 통조림이나 생활소품, 책을 훔쳐내려는 사람들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열 살짜리 소녀와 마주친다. 발육상태가 좋지 않은지 유독 키가 작아서 일곱 살짜리처럼 보이는 아이다. 아이의 모습은 단박에 그녀의 눈에 띄는데, 필리핀이거나 태국 베트남 같은 동남 아시아계 쪽 혼혈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콜타르처럼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이 소녀는 연두색 쇼핑백을 든 아줌마가 어째서 유독 자신의 주위를 서성이는지 모른다. 그래서 열심히 읽는 척하가, 잽싸게 훔치고, 천천히 서점 주위를 걷는다.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밤에는 탐정 일을 겸업 중인 중년 부인은 이 소녀의 도둑질을 두 번 눈감아 준다. 소녀가 훔치는 책의 리스트를 보고 그 아이를 좋아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엔 소녀의 엄마가 살해당하는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아줌마 탐정과 필리핀이거나 태국, 베트남 계 열 살 혼혈 소녀의 이야기가 재미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쓰고야 마는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서점에서 일하던 그 때, 나는 이 소설의 초고를 썼다. 초고는 153매. 11년 째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머릿속에서 분명히 맴도는 줄거리가 존재하는데 어째서 나는 7년 동안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을까. 아줌마 탐정이 나온다고 해서 본격적인 미스터리 소설로 쓰고 싶은 애초에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이 소설을 못 쓰고 있는 삶이 더 미스터리하다.


2.


책 두 권을 연달아 내고 나니 온 몸이 방전되는 기분이다. 가을에는 뉴욕에 가겠다고 선언했더니, 친구가 선물이라며 책을 주었다. 작가한테 책 선물! 대단하구나! 라고 얘기하려다가 책 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었다. 그렇게 두 권의 책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 이런 경우, 한 권은 소설가지만 오전에는 대형마트의 야채코너에서 고구마를 파는 좋아하는 후배에게 주지만, 이번에는 그 책을 뉴욕에 살지만 파리에 가겠다고 선언한 친구에게 가져가기로 했다.

책의 제목은 『파리 VS 뉴욕』.


만약 내가 출판업자라면 가을 은행냄새처럼 제목 한 번 구리다고 생각했을 거다. 도대체 이런 제목의 책을 누가 산단 말인가. 책의 저자는 아트 디렉터이며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는 ‘바랑 뮈라티앙’. 하지만 파리와 뉴욕에서 동시에 살았던 저자의 그림으로 가득 찬 『파리 VS 뉴욕』은 근간에 봤던 어떤 책보다 신선하고 귀여웠다. 가령 이런 식이다.

파리-에스프레소 VS 뉴욕-아메리카노
파리-아멜리에 VS 뉴욕-캐리
파리-퐁피두센터 VS 뉴욕-구겐하임 미술관

이건 누구나 알 법한 얘기니까 조금 더 해석이 필요한 위트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자면 이렇다.

파리-엑스스몰 VS 뉴욕-엑스라지
파리-줄 위를 걷는 사람 VS 뉴욕-스파이더맨
파리-프랑수와 트뤼포 VS 뉴욕-마틴 스콜세지
등등등……

파리지앵의 실용 국민 차 시트로엥의 작은 사이즈와 뉴요커의 성공의 상징인 캐딜락의 비교라든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히어로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말을 남긴 뉴욕의 스파이더맨과 2008년 BBC 다큐로도 제작된 적 있는 <줄 위를 걷는 사람>의 실제 주인공 필리프 프티의 비교는 흥미롭다. 필리프 프티는 1974년 당시 41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 사이에서 줄타기를 성공시킨 파리의 전설적인 공중곡예사로 “아름다운 것들을 하고 싶을 땐 그냥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다예요!” 같은 말을 남겼다. 쌍둥이 건물의 왼쪽은 공중곡예사의 가느다란 줄이, 오른쪽 건물은 스파이더맨의 얇은 거미줄이 걸려 있는 모습은 (9.11테러로 한 쪽이 무너진 건물이라 더욱 더!) 아이러니하면서 저자의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트뤼포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400번의 구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빠 점심값이 필요해요.

뭐라고?

1,000프랑이면 돼요.

500을 바래? 그럼 300이 필요하겠군.

자, 100프랑이다. 다음엔 엄마한테 말해!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비열한 거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희가 지은 죄를

교회에서 속죄하지 마라.

거리에서 속죄하라.

길에서 속죄하라.

그 외의 것은 모두 허튼소리이며,

너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파리에서 태어난 저자의 마음엔 엉뚱한 상상력으로 가득 찬 ‘아멜리에’와 ‘캐리’의 차이만큼 파리와 뉴욕이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아멜리에>에서 “난 실패란 말이 좋더라. 실패는 인간의 숙명이거든……진정한 사랑을 한 번도 못 해봤지? 난 해봤어요. 그 덕에 병신 됐죠!”라고 말하는 사랑에 열정적인 파리지앵과 “순수한 시대는 끝났다. 연애는 가능한 한 빨리 잊는다. 자기를 보호하고 거래를 끝내는 게 최고다. 리처드,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난 나를 더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쿨하기 그지없는 뉴요커들의 차이만큼이나 말이다.


3.


가을이면 꺼내 읽는 필립 들레름의 『맥주 첫 모금』은 절판되었다. (헌책방에서조차 이 책은 레어 아이템이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이 책의 일부를 친구들에게 읽어주거나, 직접 타이핑해서 편지나 카톡으로 보내 준다. 34개의 소제목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챕터는 단연 가을 스웨터인데, 어쩐지 스웨터를 꺼내 입고 이 책을 읽어야 가을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언제나 마음 먹은 것보다 더 늦게 가을 스웨터를 마련하게 된다. 개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바쁘게 준비하다 보면, 9월은 어느새 휙 지나가 버린다. 비가 다시 내리면 ‘가을이 왔구나’하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이 겨울이 오기 전의 괄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꼭 인정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10월을 기다린다. 10월의 밤은 서리가 내리는 진짜 밤이다. 낮에는 처음으로 물든 노란색 나뭇잎들 위에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10월, 이 뱅쇼 빛의 달콤한 부드러움. 오후 4시에만 태양이 반짝이는, 모든 것이 나무에서 떨어져 구르는 배처럼 길쭉하고 부드러운 계절.

그러면 새 스웨터가 한 벌 필요해진다. 밤나무와 큰 나무 아래에서 자라는 올망졸망한 나무들, 밤송이들, 분홍빛이 나는 빨간색 버섯을 몸 위에 걸쳐보는 것. 부드러운 양모의 색깔로 계절을 반영해 보는 것. 그런데 그 스웨터는 새로 장만한 것이어야 한다. 시나브로 꺼져 갈 계절에 새로운 불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초록색 계열로 할까? 아이리쉬 그린, 갈아놓은 완두콩 색깔, 안개가 낀 것처럼 뽀얀 초록색, 거친 위스키 빛깔, 키 작은 풀이 자라는 이탄 벌판처럼 외롭고 야생적인 초록. 적갈색 계통은 어떨까? 적갈색은 너무나 여러 종류가 있다. 오필리어의 머리카락 빛깔, 어린 시절 간식 시간에 맛있게 먹던, 가운데 버터를 바른 생강 빵 빛깔, 무엇보다 숲의 색, 흙의 적갈색, 하늘의 적갈색, 장터와 숲, 그리고 버섯와 물의 붙잡히지 않는 냄새의 빛깔. 청록색은 어떨까? 왜 안되겠는가? 세로가로로 숭숭 성글게 짠 스웨터. 마치 누군가 시간이 나면 당신을 위해 마저 새로 떠줄 것처럼 코가 큰 스웨터.

아주 헐렁한 스웨터라야 한다. 몸이 털실들 속에 푹 싸여 사라져버릴 만큼. 사람들은 그런 스웨터를 입으면 한 계절이 되어 버린다. 어깨가 헐렁헐렁한 스웨터. 몸에 꼭 맞지 않는, 무언가 기대치를 여분으로 남겨 놓은 스웨터.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비슷비슷한 톤으로 사물들의 마지막을 즐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멜랑콜리의 안온함을 선택하는 일. 나날의 빛깔들 안에 잠기는 일, 새 가을 스웨터를 사는 일.



노르망디에 사는 프랑스 남자가 쓴 산문집을 들고, 나는 종암동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절판된 책을 주머니 속에 넣으면 부서지기 쉬운 화석 하나를 조심스레 쥐고 가는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 든다. 창문을 열자 가을이 상점 간판과 쇼윈도마다에 걸려 있었다. 태풍이 몰려온다는 일기 예보를 듣던 날이라, 바람에선 바닥을 헤집고 훑어온 듯 심한 흙냄새가 났다. 버스를 타도 창문을 열 수 없는 계절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꽁꽁 언 손을 장갑 안에 감추고, 불어올 칼바람에 대비해 목도리를 두르고, 야외 테라스에선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없는 계절이.




잘 하면 마당에서 밥 먹어도 될 것 같은데.... 조건법 시제로 말해지는 삶은 아름다운 삶이다. 옛날에 어릴 때 그렇게 말하며 놀지 않았던가. ‘네가... 가 되었다고 생각해 봐’ 발명된 삶. 획일성의 반대 방향에서 파악된 삶. 거의 삶. 그 신선함이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 소박한 환상. 집 안에서 늘 치러지는 절차를 다른 방식으로 음미하기.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바꾸는 소박한 광기, 그 엷은 바람.... 때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잘하면 그렇게 될수도 있었을텐데...’ 그것은 어른들이 내뱉는 슬픈 말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겨우 향수만 하나 얻어 마음에 품은 채 균형을 유지하는 어른들. 그러나 어떤 특별한 날들이 있다. 흔들리는, 가능성의 순간에 하루를 거두어들이게 되는 날들. 마음이 연약하게 흔들리는 순간에, 저울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질지 미리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불가능을 거의 실현하데 되는 날들이 있는 것이다.



버스가 종점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그의 책을 읽는다. 약간의 교통 정체. 신호등 앞의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잘 하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잘 하면!


4.


뉴욕에 있으면 분명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워질 것이다. 서울에 있으면 뉴욕의 사람들이 그리워지듯. 그럴 땐, 작은 것이라도 살아 있는 것을, 식물을 키우라고 충고했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창문 꼭꼭 닫아둔 여자의 베란다에선/ 여린 식물들부터 차례대로 말라 죽기 시작했다/ 볕이 너무 좋았으므로 식물들은/ 과식을 하고 배가 터져 죽게 된 것이다”라고 쓴 김소연의 시를 읽는 순간, 그만 목이 터지는 듯 슬퍼졌다. 그리고 가을에 시를 읽지 않는 삶이 나로선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문득 절판된 필립 들레름의 책과 함께 내 주머니 속에 있었던 것 역시 이젠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아 나달대는 오백원짜리 지폐 같이 귀해진 시 구절이란 걸 깨달았다. 독서캠페인을 녹음하던 날 간 서점에서 집어 든 조말선 시인의 어떤 말. 그러니까 「손에서 발까지」란 제목의 아름다운 시 도입부.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손에서 발까지 걸어갔어요/ 이런, 내 손과 발인 줄 몰랐는데 말이죠/ 당신 손은 언제나 내 손만한 심장을 꽉 쥐고 있군요”이라는 그 말.

가을처럼 넉넉한 스웨터를 입고 읽는 시.
그러니까 시
말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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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백영옥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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