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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한 걸 그룹, 그들은 가수인가, 춤꾼인가? - 걸 그룹 유감(遺憾)

“하루 10시간의 연습으로 단련된 내 실한 엉덩이를, 내 미끈한 다리를 꼼꼼히 훑어 내리며 매일매일 즐겁게 사세요” “노래 잘하는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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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유독 걸 그룹에 대해서만 이리도 관대한 것인가. 현란한 댄스가 삶의 고단함과 팍팍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에? 늘씬한 다리와 탱탱한 엉덩이가 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환한 미소와 유혹의 몸짓이 우리의 잃어버린 ‘소년’을 아주 잠깐(!) 되살려 주기에?

나는 걸 그룹 티아라의 열렬한 팬이다. 지난해 여름, 우연히 ‘롤리 폴리’ 뮤직비디오를 보고 그냥 홀딱 빠져버렸다. 생애 처음으로 음원 사이트에 접속, 3000원을 주고 벨소리 다운까지 받았다. 물론 티아라가 정확히 몇 명인지, 각각 이름이 뭔지는 모른다. 내 눈엔 다 비슷비슷해 보이니까. 평소 휴대폰 받는 걸 끔찍스러워 하던 나였으나, 그 여름 내내 누구든 전화 걸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벨이 울리면 30초 가량 그냥 음악을 들었다. 전엔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벨이 그땐 어찌나 뜸하게 느껴지던지?. 당시 중3이던 아들이 살다 별일 다 보겠다는 듯 재밌어 했다.

리듬도 리듬이지만, 티아라의 뮤직 비디오는 386(이미 40이 넘었으니, 정확히는 486이지만)에게는 향수와 회한, 추억과 그리움, 한마디로 감상(感傷ㆍsentimentality)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알맞았다. 장안의 화제였던 영화 ‘써니’나 얼마 전 개봉한 ‘댄싱 퀸’이 바로 그러하듯.

뮤직비디오 ‘롤리 폴리’에 나온 다양한 춤들은 정말 많은 아이디어와 공력(功力)이 들어갔음이 역력했다. 웬만해서 같은 영화를 두 번 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보고 또 봐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티아라의 춤은 차기곡 ‘러비 더비’로 전국에 셔플댄스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매혹적이다. 내 보기에 이들의 춤은 댄스라기 보다 차라리 경쾌한 운동에 가깝다. 신곡 ‘cry cry’도 마찬가지. 어쨌든 나이 40을 훌쩍 넘긴 난 티아라가 좋다.

왜 걸 그룹이 아닌 티아라가 좋다고 하는가. 대부분의 걸 그룹은 보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눈빛은 게슴츠레하고 손은 부지런히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훑는다. 짧은 치마를 입고선 보란 듯 허리를 90도 아래로 숙이고, 심지어 바닥에 엎드린 채 엉덩이를 들어올리기도 한다. 가령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시스타의 ‘나 혼자’의 안무를 보자. 엉덩이를 간신히 가린 치마 차림에 무릎은 수시로 허리께까지 오르내린다. 중ㆍ고생 아들과 이런 장면을 어찌 마음 편히 볼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너무들 끈적거린다.

문제는 이런 ‘걸’들의 실제 나이다. 잘해야 스물을 갓 넘겼을 뿐이다. 심지어 미성년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실제 나이와 상관없이 귀여운 동안(童顔)으로 일본까지 진출한 카라의 ‘미스터’ 댄스를 상기해 보시길. 막내 여동생쯤의 얼굴을 한 소녀들이 단체로 엉덩이를 내밀어 쉼없이 좌우로 흔들어 대던 모습을. (이런 춤을 따라하는 유치원 여자애들과, 그런 춤을 추는 딸아이를 흐뭇하게 쳐다보는 그 엄마들 얘기는 상술 않겠다.)

원조격인 S.E.S와 핑클로 새 시대의 출범을 알린 한국 여성 아이돌 그룹이 10여년 만에 이렇듯 노골적인 ‘성적(性的) 코드’를 이용하기 시작한 건, 과문하지만,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 때부터일 것(이 방면의 효시인 ‘원더걸스’는 아주 건전했다)이다. 체조선수처럼 입고 나온 여성들이 하체 앞부분을 내밀어 좌우로 흔들어대던 그 도발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뮤직비디오는 더욱 황당해서 남자의 벗은 상체는 물론, 남녀의 성행위를 암시하는 동작도 나온다. 아마도 바닥에 엎드려서 엉덩이를 하늘로 올리는 참으로 민망한 동작은 이 노래가 처음 보여줬을 것이다. 밤무대ㆍ나이트클럽 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복장과 동작들이 본격적으로 안방극장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혹자는 이를 세계적인 추세, 시대적 흐름이라 얘기하던데, 결코 그렇지 않다. 기상천외한 복장으로 화제를 뿌리고, 속옷 차림으로 무대에 서며, 심지어 생고기로 만든 옷을 걸치는 레이디 가가. 전 세계를 돌며 펼치고 있는 라이브 콘서트를 아무리 훑어봐도 그런 그녀의 명성(?)에 비해 그닥 선정적이지 않다. (뮤직 비디오는 꽤 선정적이다. 나는, 폭력성과 음란성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영상물이 아닌 관객이나 방청객ㆍ시청자를 직접 대면하는 무대 공연을 말하고자 한다) 신성모독 논란을 빚은 ‘Born This Way’, 대표곡으로 부상한 ‘Poker Face’, 젊은층이 특히 좋아하는 ‘Just Dance’ 등 숨이 찰 정도로 격렬한 댄스가 있을 뿐 엉덩이를 음란하게 흔들거나 무안할 정도로 다리를 벌려대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믿기지 않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길.

‘20세기 미국 연예계가 배출한 최고의 엔터테이너’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마돈나도 출세곡은 지하 클럽 여가수의 선정적인 포즈(‘Like a Virgin’ㆍ1984)였으나 그건 그녀 나이 이미 26세 때 얘기다. 붉은 옷의 악마가 검은 복장의 성인(聖人)을 유혹하는 장면을 뮤직비디오에 담아 종교 단체들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는 등 그녀에 대한 악담은 대부분 기독교 기반 서구사회의 금기(禁忌) 내지 터부(taboo)를 건드리는 형태(신부와 수녀의 키스 장면을 담은 베네통 광고가 일으킨 물의를 떠올려 보시길)였다. 최근 공연 도중 한쪽 가슴을 드러내 화제가 됐는데, 나이 50에 그런 퍼포먼스를 할 엄두를 내다니 정말 대단한 마돈나이긴 하다.

다시 말해, 현재 ‘K-Pop’으로 포장되고 있는 걸 그룹들의 ‘묘한’ 선정성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우리나라 특유의 속성인 것이다. ‘묘하다’고 표현한 것은 레이디 가가나 마돈나처럼 아예 대놓고 섹스를 담는 것도 아니면서, 어린 얼굴과 성인(成人)의 성적 동작이 ‘수줍은 듯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만화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초등학생 얼굴에 가슴만 기형적으로 발달한 ‘교묘한 변태 심리 충족’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내가 만약 걸 그룹 가수를 지망하는 아이의 아빠라면, 난 내 딸더러 딴 길을 찾으라고 강권할 것 같다.

걸 그룹이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화려한 퍼포먼스로 세계 곳곳에 ‘K-Pop’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점은 나로서도 한편으론 신기하고 한편으론 자랑스럽다. “가무(歌舞)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21세기적 발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걸 그룹에 대한 나의 가장 큰 의구심은 ‘과연 그들은 가수인가, 춤꾼인가’라는 점이다. 하긴 언제부턴가 ‘노래 잘하는 가수’라는 표현이 버젓이 쓰이고 있는 우리 사회이긴 하다. 원래 일반인보다 노래를 월등히 잘해야 가수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알아먹지도 못할 중얼거림을 끝없이 이어가는 흑인 아류의 랩(미국 흑인 랩은 마약과 음주, 폭력의 노골적 조장을 담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이나, 되도 않게 소리나 버럭버럭 지르는 힙합(늙은 내 눈에 그렇다는 얘기다. 대중음악사에서 힙합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난 전적으로 무지하다)은 그렇다 치고, 수년씩 연습생 생활을 거쳤다는 아이들이 어째서 그렇게도 노래를 못 부르는 건지 나 같은 ‘쉰세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격렬한 춤동작을 소화해야 하는 부담과는 별개로 웬만한 한국인보다도 노래를 못한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마돈나는 가창력으로 20년째 톱스타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무대에서 거의 체조 선수급의 춤동작을 보이는 레이디 가가도 100% 라이브를 고집(유튜브에서 ‘Poker Face’ 라이브 공연 필름을 한번 보시라)한다지 않은가. 세계적 스타와 비교하긴 무리라고? 그래, 좋다. 나도 뭐 똑같이 춤추며 노래한다 해도 휘트니 휴스턴, 비욘세 같은 글로벌 스타와 우리 걸 그룹을 직접 비교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들의 이른바 ‘MR 제거’ 영상을 들어보면 정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다. ‘MR’이란 ‘Music Recorded’를 일컫는 것으로 ‘목소리를 녹음하기 전 멜로디만 있는 음악’을 말한다. 따라서 ‘MR 제거’란 한 마디로 백그라운드 뮤직을 없애고 노래하는 목소리만 들려주는 것인데, 걸 그룹들의 가창력은 전국노래자랑 참가자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다. 2NE1, 미쓰에이, 시스타(그 중에서도 효린) 정도가 ‘가수’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노래를 못하든 잘하든 대중들에게 즐거움만 줄 수 있다면 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잘생기고 몸매도 멋지나 엉터리 진단에 수술은 젬병인 의사를 우리는 의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말 잘하고 옷 번듯하게 입지만 판례 못 외우고 사안의 본질을 짚지 못하는 변호사는? 음식 간 못 맞추는 요리사, 가르칠 내용을 숙지 못하는 교사, 기본적 패스와 뜀박질이 안 되는 축구 선수는?




왜 우리는 유독 걸 그룹에 대해서만 이리도 관대한 것인가. 현란한 댄스가 삶의 고단함과 팍팍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에? 늘씬한 다리와 탱탱한 엉덩이가 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환한 미소와 유혹의 몸짓이 우리의 잃어버린 ‘소년’을 아주 잠깐(!) 되살려 주기에?

걸 그룹을 비롯한 아이돌들의 양성 시스템도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전무후무한 케이스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숙식만 제공하면서 수년 동안 하교 후 일상 시간의 전부를 춤만 추게 만들고, 몸매 유지를 이유로 먹는 양을 관리하며, 사생활 보호라는 미명 아래 남자 친구는 물론 휴대폰 사용까지 통제하는 이 이상한 시스템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도 진짜 미스테리다.

‘깝권’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조권은 연습생 생활만 8년을 보냈다하여 널리 회자가 됐는데, 세 식구가 단칸방 생활을 하다 성공적 데뷔로 어머니께 아파트를 선물한 이 청년은 그나마 ‘코리안 드림’을 쟁취한 케이스일 것이다. 이름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천의 연습생들, 허공중에 흩어진 그들의 청춘은 대체 어디에서 보상을 받는단 말인가. 누가 강제로 시켰냐고? 제가 좋아 제가 선택한 일인데 웬 따따부따냐고?

그러나 지금과 같은 얼토당토 않은 기획사와 시스템이 없었다면 그들도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각종 오디션과 가요제 등 다른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방식을 택했을 것 아닌가? ‘해리 포터’ 시리즈와 더불어 유년ㆍ청소년기를 모두 보낸 다니엘 래드클리프, 엠마 왓슨, 루퍼트 그린트 등이 전 세계를 누빈 촬영장에서도 규정 시간 동안 학과공부를 해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경우 거의 아동ㆍ청소년 학대(child abuse) 수준에 해당한다.

TV에서 우연히 조권과 효연(소녀시대)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치른 오디션 자료화면을 본 나는 안쓰러움에 콧잔등이 시큰거렸었다. 동남아 일대를 누비며 한창 잘 나가는 걸 그룹 아이들이 “실컷 잠이나 자보는 게 소원”이라고 인터뷰 하는 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일단 뜨고 나면 본전을 뽑으려는 소속사가 온갖 ‘행사’로 내몬다. 토크 쇼에 나온 요즘 ‘대세’ 효린(시스타)이 “우린 정말 행사 많이 해요. 하루에 대학 4~5군데 돌기도 해요”라고 말하는 모습에 내 딸이 아님에도 너무 측은해 보였다.

야릇한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육감적인 몸매’로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는 소유(시스타)도 최근 노출심한 무대 의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짧은 의상을 스스로 입고 싶어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소유는 “짧은 치마를 입는 게 진짜 싫다”라며 “춤을 출 때 불편하고, 짧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면 일부러 무대 밑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나한테 투자한 사장의 지시니 별 도리 없이 몸을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 어쩌면 설움에 떡을 치는 연습생 시기와, 만성ㆍ악성 수면부족과 영양 실조에 시달리는 걸 그룹 생활과, 미천(微賤)한 가창력이 언제 들통 날까 조마조마해 하는 살얼음 전성기 시절이 그들에겐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신분 상승 통로일 지도 모르겠다. 최단 기간에 최대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소녀ㆍ소년 가장(家長)의 가장 효율적 투자ㆍ선택일 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난 티아라의 롤리 폴리와 러비 더비를 보며 찰나의 위안을 얻는다. 거기엔 10대, 20대 초반 아이들의 눈물과 한숨이 끼어들 여지도, 필요도 없다. 아저씨인 나는, (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하루 10시간의 연습으로 단련된 내 실한 엉덩이를, 내 미끈한 다리를 꼼꼼히 훑어 내리며 매일매일 즐겁게 사세요”, 온몸으로 전하는 그들의 혹사당한 육체를 보며, 토크쇼에 출연해 얼굴 본 지 오래된 ‘엄마’라는 단어만 나와도 이미 훌쩍거리기 시작하는 그들의 앳된 마음을 보며, 이 아저씨는 오늘도 아주 눈물겹도록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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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고, TV를 보고,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무심결에 범하는 오류와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인습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 때의 세상이 좀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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