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혹은 의외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대중이 마음속에 그리는 한 예술가의 모습이란 그가 창작 혹은 재현해낸 작품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나타난 모습과 실제의 예술가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닌 까닭에, 그 둘이 일치할 때 대중은 익숙함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예술가를 한 인간이 아닌 작품으로써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 문학계의 입담꾼이자 해학적 이야기의 결정판격인 소설을 쓴다고 평가받는 작가 성석제에 대해 당신이 그린 그림은 어떤 것인가? 지난 4월 19일 상수동의 작은 북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익살과 재치를 부리는 재담꾼이라고 하기엔 신중하고 느릿하게 입을 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그 안에 생동하는 단어들과 탁월한 표현들이 살아있었다. 역시 그는 빼어난 입담을 자랑하는 작가였다.
이 소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에 대해서 기억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작가의 새 장편소설
『위풍당당』은 강으로 시작해서 강으로 끝난다. 결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서점에 가서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펴 보시라. ‘강.’이라는 똑같은 활자가 인쇄되어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테니. 강이 이야기의 주요 배경이자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왜 강인가, 자연스레 물음이 이어진다. 작가는 계간 <문학동네>에
『위풍당당』을 연재할 당시 ‘연재를 시작하며’라는 글을 통해 어릴적 추억의 공간으로써 고향의 시내와 강을 이야기한 바 있다. 책에는 실리지 않은 그 이야기들을 이 날 만남의 자리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강의 근원이 되는 산이나 계곡, 도랑 같은 것들이 어린 시절에 늘 주변에 있었죠. 특별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풍경은 해마다 유월 유두쯤 되는 날 할머니와 낙동강에 가곤 했던 거에요. 일종의 소풍인데, 새벽 5시쯤 되면 제 손을 잡고 40리 정도 되는 길을 가셨어요. 다른 할머니들과 집에서 준비해간 쌀, 반찬, 나물 등을 가지고 가서 밥을 해먹는 거죠. 그리고 막걸리를 한 잔 하고 피서를 하다가 해가 기울 때쯤 돌아옵니다. (할머니를 따라) 두세 번쯤 함께 간 기억이 있어요. 가서 할머니들이 부르던 노랫가락이 처량하고 느리면서, 할머니들의 회한 같은 것을 어린 저라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있고, 그런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이 할머니께 감사한 일이죠.”
그 강이 최근에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완전히 망가졌다. 어린 작가가 나무를 해오던 자리 앞에는 거대한 모래성 같은 것이 생기고 곱던 강변 모래사장은 다 없어져 버렸다. 중장비들이 몰려와 계속해서 강바닥을 파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작가는 작년 초가 되어서야 목격할 수 있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미루고 미루던 일이었다. 혹여 충격을 받을까 겁이 났다. 강은 이미 결단이 난 후였다. 마치 존재의 일부가, 고향의 일부가, 어린 시절의 일부가 무너진 것 같은 무력감과 낭패감이 몰려왔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비참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 4대강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이었다. 6~7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작품이니 그 시작 단계에서 4대강 사업을 염두해 두었던 것은 아니다. 작가가 철저히 해체된 ‘자신의 강’을 목격한 것은 소설이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그래서
『위풍당당』에서의 강은 파괴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소설에는 강이 망가지기 전의, 비록 인간의 조작과 공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강이 제 본성을 잃지 않고 있을 때의 풍경들이 아직은 담겨 있죠. 조금이라도 이 소설이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에 대해서 기억하고 떠올리게 할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장소와 풍경에 예민할 수밖에 없죠.
그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루기 때문에.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강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듣고, 진행을 맡은 평론가 송중원은 권혁웅 시인의 시집 <마징가 계보학>을 이야기했다. 권혁웅 시인은 이 책에서 지금은 개발되어버린 서울 산동네에 대한 향수를 말했다.
송중원 :
잃어버린 모습에 대해 시인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더라구요. 어느 공간이 변화했을 때 그곳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 같고, 그 기억이 사라질 때 내 몸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작가님에게도 그런 시인적인 면모가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성석제 :
꼭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문학을 하는 사람 혹은 예술을 하는 사람,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느낌을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장소와 풍경에 예민할 수밖에 없죠. 그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루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는 소설을 쓸 때 여기저기를 전전합니다. 그 때의 그 장소가 소설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을 합니다. 어떤 환경 속에 앉아있는가에 따라서 소설의 톤이 많이 달라지기도 하고, 지나가던 사람이 던지는 말이 소설 속에 뛰어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흐름을 바꿀 수도 있구요. 저는 그것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주는 기운을 받아서 소설을 쓴다는 기분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소설이 거의 완성되고 그 기운이 다 떨어지고 나면 다시 다른 곳을 찾아서 떠나고 헤매는, 이런 운명이 작가들의 운명이자 예술 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소, 내가 딛고 있는 땅, 앉아있는 곳이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크죠.
지나간 말을 다시 살려냈을 때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기쁨 같은 것이 있죠.
공간의 기운을 받아 소설을 쓰고 그 기운이 끝났다고 생각되면 또 다른 곳을 찾아 이동한다고 말하며 작가는 자신을 ‘화전민’에 비유했다. 그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의존하는 법이 없다. 그의 작품 역시 리얼하고 살아 꿈틀대는 표현들로 꽉 들어차 있다.
『위풍당당』을 쓰면서 가장 흥이 났던 부분을 묻는 질문에도 그는 잊고 지냈던 단어를 되살려낸 순간을 꼽았다.
“스님과 깡패들이 대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길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스님이 시침을 뗄 때 갑자기 사투리를 쓰죠. 공짜로 가르쳐 달라는 거냐, 할 때 ‘공꼬로’ 라는 말을 씁니다(‘공꼬로’는 경상도 사투리로 ‘공짜로’라는 뜻 - 필자 주). 옛날 사람들이 쓰던 말인데 그 단어가 생각난 게 참 기뻤습니다. 지나간 말을 다시 살려내서 무언가 울림을 가질 수 있게, 그 한 단어가 생기를 얻을 수 있도록 했을 때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기쁨 같은 것이 있죠.”
『위풍당당』에서 조직폭력배들과 함께 가장 사실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인물은 ‘새미’다.
“아오, 빡쳐.”,
“사내새끼들, 다 그렇잖음?” 과 같은 표현을 자연스럽게 가져다 재현해 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작가는 익숙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게임중독에 빠진 적이 있는 스무 살의 여자아이(새미)를 표상할 수 있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을 통해 젊은 세대가 쓰는 표현들의 뜻과 용례를 공부했지만 그대로 베껴올 수는 없었다. ‘베끼면 베낀 티가 금방 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생활에서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며 연습했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몸에 익숙해진 뒤에야 작품 속에서 자유자재로 ‘새미’의 말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구어성과 문어성이 조화롭게 한 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 바로 성석제의 소설이고 그의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이자, 다른 소설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는 문장을 쓸 때 특별히 애쓰는 부분이 없다고 했다.
“애쓰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의식적으로 그 부분에 의미를 부여해서 문장을 쓴다든지, 단어를 선택한다든지, 강조를 한다든지 하면 반드시 역효과가 나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했다는 게 금방 들켜서 말이죠. 저 자신이 그런 걸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애써 쓴 부분이) 나오질 않게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의도적인 것 보다는 저 자신을 만년필 같다고 생각해요. 잉크를 채워 넣고 만년필에서 자연스럽게 잉크가 흘러나오게 하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죠. 그것이 저한테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우연한 효과에 의해서 저도 예상치 못했던 욕설이나 이런 것들이 튀어나와서 저를 기쁘게 해주고(웃음) 저를 먹고살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가족을 이루려는
필사적 의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풍당당』의 주인공들은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함께 생활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이다. 송중원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혈연관계를 벗어난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가족이라는 단위의 근간이 되는 혼인이나 출산은 이들 구성원 사이에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 이 낯선 ‘가족’의 출발점이 된 것은 작가가 관찰한 현대사회의 가족 해체 문제였다.
고향인 농촌을 떠나 도시로 전학 온 후 작가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다. 제일 심각하게 생각되는 것이 가족간의 분열과 균열, 해체, 증오, 폭력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 형태인 가족이 해체되고 나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남을까. 아무런 보호벽도 없고 누가 돌봐주지도 않고, 사랑도 해주지 않는다면 뭐가 남을까. 작가는 의문이 들었다.
“거기에는 분노한, 보호막도 없이 떨고 있는 황폐한 인간만 드러나는 거죠. 그런 것을 많이 목격하고 느끼게 되었고, 그에 관한 소설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다보니 과연 이대로 가야하나, 이대로 끝나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언론에 보도된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칠거고 무언가 에너지원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가족이라고 봤습니다. 가족을 이루는 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는 가족을 이루려는 필사적 의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법과 제도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어떤 가족을 만들까. 의무적인 사랑이 아닌 가족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선택한 사람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이 있는 가족과 마을을 생각하고 쓰게 된거죠. 그 전에 황폐해진 우리 내면과 가족 상황 같은 여러 사례를 봐 왔던 게 이 소설을 쓰는 데 기초자료가 되었습니다.”
가장 성스럽고 거룩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고
가장 비열하고 악랄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죠.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질문 혹은 가치관은 크게 변함이 없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단 하나의 세포도 인간이고, 신의 바로 발 밑까지 가 있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가장 성스럽고 거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단순하고 어이없고, 비열하고 악랄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거룩하다는 책인 성경에도 거짓말, 사기, 살인, 악덕, 배신과 같은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들어있죠. 그만큼 인간이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거에요. 한 인간이 여러 가지 면모를 다 가지고 있을 수 있죠. 가장 성스럽고 권력 있고 위엄 있던 인간이 아주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죠. 그런 생각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계속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여러 가지 면모, 표리부동함이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계속 저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살펴보게 만드는 근원 같은 것입니다.”
모든 문학의 시작과 끝에는 인간이 있다.
『위풍당당』의 시작과 끝에도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강마을 사람들이 존재한다. 작품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쯧쯧.’ 혀를 차는 방관자의 것이 아니다. ‘그래도 살자.’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의 것이다. 그 사람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심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묻어난다. 급기야는 강마을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독자에게로 옮겨오는 신기하고도 기분 좋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바른 소리만 늘어놓는 지루한 작품일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면 곤란하다. 작가 성석제의 주전공이 해학, 주특기가 재담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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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풍당당 성석제 저 | 문학동네
‘탁월한 이야기꾼’ ‘해학과 풍자의 장인’ ‘입담과 재담의 진면목’ 성석제가 돌아왔다. 2003년 장편『인간의 힘』이후 구 년 만에 신작장편소설『위풍당당』을 들고 또 한번 성석제표 웃음의 축제의 장으로 초대 한다. 시골마을에서 빚어지는 맹랑한 소동극의 형식을 빌려 재담과 익살,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세계를 그려낸다. 동시에 그 웃음 뒤에 숨은 우리 사회가 처한 도덕적 파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충동이 소설 심층부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