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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암살하려던 경찰서장을 뭉개 버리고 싶다” -『붉은 수확』

정의를 위해서? 그저 내 임무만 완수할 뿐…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어느 탐정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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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정의나 대의를 부르짖지도 않고, 복수를 다짐하지도 않는다. 그냥 눈앞에 거슬리는 인간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몰살시키기로 결정한 것뿐이다. 대실 해밋은,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린 시절, 홈즈와 루팡으로 시작했던 추리소설 읽기는 동서추리문고로 발전했다. 세로쓰기 문고판으로 나온 동서추리문고에는 코넌도일과 모리스 르블랑, 아가사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은 물론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미키 스필레인 등 하드보일드 소설과 레이 브래드버리와 앨프레드 베스터 등의 SF까지 대중소설의 모든 장르가 망라되었다. 그야말로 신천지였는데, 그 중 어느 것이 최고였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모든 작품들이, 제각각의 재미와 깨달음을 주었으니까.

다만 개인적인 취향은 어쩔 수 없다. 처음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을 주로 집어들었지만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지푸라기 여자』 『야수는 죽어야 한다』 등의 소설에 빨려들었다. 게임으로서의 추리보다 범죄를 둘러싼 인간의 조건 혹은 증명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숨이 막힐 듯 몰아치는 서스펜스와 액션에도. 자연스럽게 ‘하드보일드’란 범죄소설의 하위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서추리문고를 읽던 그 시절이었다. 마침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를 보면서 정서적 충격을 받기도 했고.

그 때 읽었던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동서추리문고에서는 피의 수확이었던)을 다시 읽었다. 하드보일드의 선구자인 대실 해밋의 장편 『붉은 수확』 『데인 가의 저주』 『몰타의 매』 『유리 열쇠』 『그림자 없는 남자』이 수록된 대실 해밋 전집 덕분이다.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나’는 광산 도시 퍼슨빌로 향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의뢰인인 도널드 윌슨이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된다. 퍼슨빌, 사람들은 포이즌빌이라고 부르는 도시를 지배하는 이는 도널드의 아버지인 일라이휴 윌슨이다. 광업회사, 퍼스트 내셔널 은행, 모닝 헤럴드와 이브닝 헤럴드의 소유주이며 그 밖의 알짜배기 회사들을 거의 모두 소유한 퍼슨빌의 주인. 그러나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에 강력 대응하기 위해 끌어들인 폭력배들 때문에 위기에 몰려 있다. 핀란드인 피트, 루 야드, 맥스 탈러가 전리품으로 퍼슨빌의 수많은 이권을 챙겨버린 것이다. 모닝 헤럴드의 사장 도널드 윌슨은 도시 곳곳에 독이 퍼진 퍼슨빌을 정화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지만 결국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뢰인도 죽어버린 마당에, ‘나’는 퍼슨빌에 남기로 한다. 정의를 위해서? 글쎄.

날 대신해서 이 돼지우리 같은 포이즌빌을 청소하고 크고 작은 쥐새끼들을 쫓아낼 사람이 필요해. 이건 대장부가 할 일이지. 자넨 대장분가?

‘나’는 일라이휴 윌슨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물론 1만 달러를 받고.

그렇게 멋들어지게 말한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용건만 말씀하십쇼.....제게 의뢰하실 일이 있고 그에 걸맞은 보수를 지불하신다면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쥐새끼들을 쫓아낸다느니 돼지우리를 청소한다느니 하는 바보 같은 말은 저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돈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도널드 윌슨의 범인이 밝혀지고, 그만 돌아가 주길 바라는 일라이휴 윌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감님의 뚱보 경찰서장 나리가 어젯밤 날 암살하려 하더군요. 맘에 안 듭니다. 저는 비열한 놈이라 그 인간을 뭉개 버리고 싶습니다. 이제 제가 즐길 차례군요.

그리고 ‘나’는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핀란드인 피트, 루 야드, 맥스 탈러, 경찰서장 누넌의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책략에 나선 것이다. 애초에 악당들의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었다. 외견상 평화를 지키고는 있지만, 언제든 틈만 생기면 상대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 수확』을 읽지 않았어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적대적인 범죄조직 두 군데를 오가며 서로 싸우게 만드는 위험한 남자의 이야기. 『붉은 수확』은 일본영화 <요짐보>에게 큰 영향을 준 소설이다.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정의나 대의를 부르짖지도 않고, 복수를 다짐하지도 않는다. 그냥 눈앞에 거슬리는 인간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몰살시키기로 결정한 것뿐이다. 대실 해밋은,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그의 결정과 행동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타인을 보는 것처럼, 그의 마음을 추측할 수는 있지만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 냉혹하고 비정한 인물은 묘하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라면, 독에 물들지 않고도 이 세상을 뒤집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포이즌빌을 정화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건 하나를 해결해도, 악인들을 몇 명 해치웠다고 해서 낙원은커녕 상식적인 세상조차 쉽게 도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순결성을 고수하려 한다. 타락한 세상에 침윤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도덕률과 가치를 치열하게 고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하드보일드의 창시자인 대실 해밋의 주인공은 조금 다른 스탠스를 취한다. ‘나’ 역시 원칙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는 하지만, 악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은 하지만, 견고한 현실의 벽에 절망하지 않는다. 절망하기에는, ‘나’는 너무 현실적인 인간이다. 절대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만 몰두하고 완수한다. 우수나 고독 같은 것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

어쩌면 그건 핑커튼 탐정 사무소에서 탐정으로 활동했던 대실 해밋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다. 1920년 대실 해밋은 아나콘다 광산 파업에 파견되어 고용주 측에서 파업을 방해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후 좌파로 전향하여 공산당에도 가입했던 해밋의 이력을 보면, 대단한 오점이었다. 그 오욕의 경험이 데뷔작인 『붉은 수확』에 반영되었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현실에서 해밋이 했던 역할과는 반대로 광산도시의 악을 쓸어버리는, 그것도 똑같이 협잡과 폭력으로 쓸어버리는 것으로 과거를 해소하려 햇을 수도 있다. 해밋은 좌익 사상과 범죄소설 그리고 할리우드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기묘한 생애를 살았다. 책 뒤에 실린 연보를 보고 있으면, 해밋의 생애야말로 그 어떤 소설보다 재미있을 것 같다.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대중 소설로 끌어들인 대실 해밋의 작품들은 지금 읽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없다. 그건 세상이 변한 것도, 인간의 조건이 그다지 변한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현대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더욱 더 고독하거나 심지어 몰락하는 것은, 그런 현실의 거대한 벽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인 힘과 충동이 살아 있는 대실 해밋의 소설은, 오히려 호쾌하게 읽힌다. 그 시절은 아직 낭만이 유효했던 때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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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확 대실 해밋 저/김우열 역 | 황금가지

무미건조한 묘사와 극사실주의를 표방한 탐정 소설로 당시 셜록 홈즈식 수수께끼 탐정 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출판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대실 해밋은 도시 이면에 도사린 추악한 본질에 대한 여과 없는 묘사와 극도로 감정이 절제된 등장인물, 그리고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거칠 것 없이 몸을 던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탐정과 팜므 파탈의 매력을 지닌 여성 캐릭터 등 현대 범죄 스릴러 소설의 기초가 된 하드보일드를 완성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실 해밋의 작품은 특히 문학사적으로 볼 때 헤밍웨이와 후대 추리 작가 사이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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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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