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호랑이가 다른 호랑이보다 매력적인 이유
시베리아호랑이는 열대지방에 사는 호랑이와는 무척 다르다
처음 제가 시베리아호랑이에 끌렸던 이유는 이처럼 시베리아호랑이가 난이도 높은 도전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베리아호랑이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 이유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시베리아호랑이 자체의 매력에 빠져든 거죠.
본 기사는 박수용 피디 10문 10답 3부작 중 2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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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호랑이
“시베리아 호랑이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의 어떤 점이 피디님을 사로잡았나요?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호랑이가 살고 있습니다. 벵골호랑이, 인도차이나호랑이, 수마트라호랑이, 남중국호랑이, 그리고 시베리아호랑이. 이 가운데 시베리아호랑이를 제외하면 모두 열대지방에 서식합니다. 반면 시베리아호랑이는 만주와 연해주(우수리), 그리고 한반도에 삽니다. 이 호랑이들은 과거 장백산맥을 타고 만주에서 백두산으로, 두만강을 넘어 우수리에서 함경산맥으로 넘나들며 살았습니다. 만주호랑이가 한반도로 넘어오면 한국호랑이, 한국호랑이가 우수리로 넘어가면 우수리호랑이가 되었던 거죠. 이들은 모두 ‘Panthera tigris altaica’라는 학명을 가진, 같은 호랑이 아종입니다.
시베리아호랑이는 열대지방에 사는 호랑이와는 무척 다릅니다. 우선 열대지방은 기후조건이 좋고 먹잇감이 풍부해서 같은 면적이라도 훨씬 많은 호랑이가 서식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열대지방 호랑이가 10,000마리 가까이 살아 있는 데 반해 시베리아호랑이는 고작 350여 마리만이 남아 있습니다.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는 시베리아호랑이는 열대지방 호랑이에 비해 체구가 30퍼센트 이상 크고, 돌아다니는 영역은 벵골호랑이보다 100배나 넓습니다. 인도의 벵골호랑이 한 마리가 차지하는 영역은 보통 20㎢이지만 시베리아 수호랑이의 경우 그 영역이 2,000㎢가 넘습니다. 3개도 4개군에 걸쳐있는 지리산 국립공원의 면적이 472㎢인 것을 생각하면 그 영역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베리아호랑이가 인간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습성은 마치 열대지방 호랑이와는 딴 동물인 양 전혀 다릅니다. 열대지방 호랑이는 자신을 인간에게 쉽게 노출시킵니다. 인도에서는 관광버스 안에서 야생호랑이를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들이 사람이 다니는 대로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길가 그늘 밑에서 태연히 낮잠을 잡니다. 관찰자가 지프로 접근하면 마주 다가와 지프의 냄새를 맡고 오줌을 갈기는 놈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베리아호랑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습니다.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히 싫어하고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나 물건도 철저하게 피해 다닙니다. 인간의 눈을 피해 광활한 산맥을 은밀히 누비며 살아가다보니 산중에서 그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시베리아호랑이만 연구하는 학자들도 평생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합니다. 그래서 시베리아호랑이의 생태는 밝혀진 부분보다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습니다. 특히 새끼와 함께 지내는 암호랑이나 새끼와 아비의 관계 등 가족의 형성과 해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 희소성과 은밀함으로 인해 시베리아호랑이는 세계의 많은 자연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겐 하나의 로망입니다. 히말라야의 많은 고봉들이 프로 등산가들에게 로망이듯이 말입니다. 자연 다큐의 세계에선 시베리아호랑이가 정신력과 인내력을 재는 척도였던 거죠. 20년 전 제가 처음 시베리아호랑이에 도전했을 때, 야생에서 촬영된 시베리아호랑이 영상은 세계에서 3분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올가미에 걸린 호랑이를 생포해 목에 무선전파발신기를 달고 방사하는 장면을 BBC가 헬기에서 촬영한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BBC,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서구의 자연다큐멘터리 선진제작사들이 매년 수백만 달러짜리 프로젝트들을 진행시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에서 조직력과 자본력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이지 정신력과 인내력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동물의 왕국이라는 TV프로그램에 왜 아프리카의 사자나 인도의 벵골호랑이, 북극의 흰곰이나 남극의 펭귄들이 많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위도 상 열대나 극지방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 동물들이 사람을 보고도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잘 도주하지 않습니다. 전문용어로 ‘도주거리가 짧다’고 표현하죠. 게다가 기후적 특성상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열대나 극지방의 동물들은 누구나 쉽게 촬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얼마나 잘 촬영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죠. 관광객이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것과 헐리우드용 경비행기에 스테디캠을 달아서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조직력과 자본력, 좋은 장비를 가진 자연 다큐 선진제작사들이 열대지방과 극지방에서 큰 효율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들은 시베리아호랑이에겐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조직력, 장비를 가져와도 시베리아호랑이가 나타나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니까요. 제가 처음 시베리아호랑이에 도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랑이를 찾기 위해 일 년 넘게 산맥을 떠돌았지만 가끔 호랑이의 흔적만 보일 뿐 호랑이는 코빼기조차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습니다. 바로 나무 위나 땅속에 작은 비트(은신처)를 만들고 호랑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죠. 이 방법은 광활한 오지에서 극한의 기후를 견디며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는 정신력과 인내력이 있을 때만 유효한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아무 곳에서나 무작정 기다릴 순 없죠. 그래서 여름 6개월 동안은 산맥을 떠돌며 호랑이가 출몰할 만한 장소를 물색합니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장소에 비트를 만듭니다. 나머지 겨울 6개월은 그 비트 속에 들어가 호랑이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도 이런 방식으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방식을 통해 저는 20년 가까이 시베리아호랑이를 1,000시간 넘게 영상으로 기록하였고 육안으로 목격한 것은 그 서너 배가 넘습니다. 전 세계의 나머지 시베리아호랑이 영상을 다 합쳐도 아직 1시간가량밖에 안되는데 말이죠.
처음 제가 시베리아호랑이에 끌렸던 이유는 이처럼 시베리아호랑이가 난이도 높은 도전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베리아호랑이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 이유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시베리아호랑이 자체의 매력에 빠져든 거죠.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는 보면 볼수록 빠져들게 하는, 생명체로서의 매력이 있습니다. 선조들이 괜히 영물이라고 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기척을 감추는 은밀함 외에도, 상황을 파악하고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현명함, 일단 나서면 결말을 짓고 마는 대담함은 신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교감
“시베리아호랑이와 교감하셨습니까? 기억나는 교감의 순간을 알려주세요.”
호랑이의 흔적을 찾아 산속을 전전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숲을 헤매다 개울 하나를 건넜습니다. 개울을 건너자 굵직굵직한 잣나무들의 숲이 펼쳐졌어요. 오솔길 옆 너럭바위에 배낭을 내리고 피곤한 몸을 맥없이 걸쳤습니다. 인적 없는 오지에 개울물 소리와 새소리가 조용히 들려왔습니다. 이따금씩 신선한 바람도 불어왔지요. 그 바람을 타고 흘러온 잣향이 향기로웠습니다. 그때였어요. 5-6미터 앞의 아름드리 잣나무 둥치 뒤에서 보름달 같이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스르르 밀려나왔습니다. 멍한 내 시야에 털북숭이 얼굴 하나가 들어오더니 또렷해졌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불타는 듯 깊었습니다. 호랑이였어요.
머리가 무척 크고 갈기도 성성하니 풍채가 우람했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숫호랑이, 왕대王大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왕대의 눈빛은 무심한 듯 이글거렸어요. 그 눈빛의 기운이 초여름 바람의 고요한 살랑임과 그 살랑임에 실린 잣나무의 진한 향기와 이에 아랑곳없이 차분한 개울물 소리에 실려 저에게로 왔습니다. 뚫을 듯 나에게 집중된 눈빛은 들킨 자의 눈빛이 아니라 확인하는 자의 눈빛이었습니다. 그 눈빛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움직이지 마라. 그러면 괜찮다.’
저의 뇌리에 이 두 마디가 전해졌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손만 까딱해도 덤벼들 것 같았지요.
왕대가 잣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습니다. 육중한 전신의 웅자雄姿가 드러났습니다. 그 웅자를 조용히 움직이며 왕대는 오솔길까지 사선으로 걸었습니다. 몸통은 비스듬히 오솔길을 향했지만 시선은 한시도 저에게서 떼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오솔길로 접어들었어요. 그러자 왕대는 저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어왔습니다. 양쪽 입술을 들어 올려 살짝 씰룩였습니다. 굵은 송곳니가 슬쩍 내비쳤습니다.
‘나는 간다. 내가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허튼 짓 하지마라.’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암묵의 경고였습니다. 그 씰룩임이 내 몸에 남아있던 기운을 마저 앗아가 버렸어요. 바늘에 찔리듯 온몸이 찌릿찌릿하며 심리적 마비현상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왕대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앞만 보며 잣나무 우거진 오솔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살랑였고 그 바람에 잣향기가 흩날렸으며 개울물소리는 한결 같았습니다. 그렇게 길게 뻗은 오솔길로 천천히 사라졌습니다. 무시당한 기분이랄까? 나는 갑자기 초라해졌습니다. 왕대의 시선이 거두어진 순간부터 나 자신은 이미 초라해져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없는 숲, 문명 속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들 위에 신처럼 군림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충분히 상대하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존재가 있는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인간은 왜소해집니다. 호랑이가 오갔을 오솔길을 홀로 걷다 보면 서늘하고 날 선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우뚝 멈춰 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황량한 겨울바람이 산비탈을 쓸어 올리기라도 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 왜소해질 때 비로소 자연과 더 깊이 대화하고 세월을 더 넓게 보게 됩니다. 인생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삶과 죽음 같은 자연 속에 떠다니는 어떤 감성들, 세월을 가로지르는 긴 흐름들을 느낍니다. 숲 속의 호랑이는 인간을 자연과 세월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저자는 시베리아에 살면 시베리아호랑이, 한반도에 살면 한반도호랑이 혹은 백두산호랑이라 불리는 우수리와 만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호랑이들을 밀착 취재해 왔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만난 '블러디 메리'라는 16세기 영국 여왕의 별명(사냥할 때 주변을 온통 피투성이로 만든다고 해선 붙여진 이름)을 이름으로 살아가는 암호랑이 3대 가족의 삶과 죽음, 생존을 향한 강렬한 투쟁을 직접 보고 관찰한 기록이다...
본 기사는 박수용 피디 10문 10답 3부작 중 2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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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10만km의 대장정, 20년의 추적과 잠복. 전 세계에서 한 시간도 기록되어 있지 않던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 1000시간의 기록. 문명의 도전 앞에 멸종 위기에 처한 시베리아호랑이들의 응전, 생존을 향한 그 강렬한 투쟁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큰 감동을 선사했던 EBS 다큐멘터리 「시베리아호랑이-3代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