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자취 쫓다 동물의 뼈와 마주치면…
백두산 호랑이로 만난 나만의‘자연’… 박수용 피디 인터뷰 모든 생명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큰 흐름이 있다
박수용 피디는 자연을 백두산 호랑이로 만난다. 20년간을 신실하게 ‘자연 관찰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기 때문에 백두산 호랑이에게서 만난 그의 자연은 크면서도 작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마치 베토벤이 죽기 전 완성한 ‘B 장조 대푸가’처럼….
본 기사는 박수용 피디 10문 10답 3부작 중 1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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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바다나 산 또는 곰이나 풀, 꽃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自然’이라는 말 그대로,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이를 테면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먹고 자고,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 것과 같은 것. 바람이 불면 스러지고, 비를 맞으면 몸이 젖는 것, 어미는 자신의 아기를 보살피는 같은 것. 그러므로 자연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고, 네 안에도 있고, 너와 나 사이에도 있다.
박수용 피디는 자연을 백두산 호랑이에게서 만난다. 20년간을 신실하게 ‘자연 관찰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기 때문에 백두산 호랑이로 만난 그의 자연은 크면서도 작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마치 베토벤이 죽기 전 완성한 ‘B 장조 대푸가’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호랑이를 만나기 위해 부족함이 없도록 다져진 듯한 다부진 체격과 형형한 눈빛을 사진 속 그에게서 느끼며, 결심 하나를 한다. 그래, 천천히 그러나 긴 세월 동안 하나에 몰입을 해보자. 그 몰입의 시간 동안, 그리고 몰입을 통해 알게 된 무엇 속에서 순정한 자연을 알아 보자.
편집자 주: 분량이 긴 관계로, 박수용 피디의 10문 10답은 3회에 걸쳐 게재됩니다.
자연
“20년 이상 자연 관찰자로서, 자연을 기록해오셨습니다.
자연은 피디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얼마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였던 김윤식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박경리의 ‘토지’를 최참판댁 당주와 이동진의 대화로 풀이했습니다.
“독립운동 하러 가는 것은 군왕을 위해서냐?” |
이것이 ‘토지’의 주제입니다. 이 작품을 자세히 읽어보면 뻐꾸기 울음이 여섯 번 나옵니다. 또 주인공이 만주 벌판에서 괴로울 때마다 최참판댁 담을 타고 피어나는 능소화를 떠올립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이병주의 ‘지리산’은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생명은 상당히 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데올로기는 바뀌지만 산천은 변함없거든요.
생명이 태어나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의지하는 흐름은 두 가지입니다. 한평생 경쟁하고 현실을 개척하며 생활하는 짧은 흐름, 그리고 그 짧은 흐름들이 세월과 자연을 가로지르며 이어져서 생겨나는 긴 흐름. 시장이나 그 시장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는 짧은 흐름입니다. 늘 바뀌고 시대마다 변하죠. 하나의 짧은 흐름 속에서 아무리 높이 올라갔던 사람이라도 긴 흐름을 느끼고 그 흐름을 걸어갔던 사람이 아니면 우리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피나는 이전투구를 했겠지만 우리는 그 중 몇몇만 기억할 뿐입니다. 염상섭은 ‘취우’라는 소설에서 ‘6.25도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과하다. 햇빛이 나면 금방 말라버리고 물방울 떨어진 흔적만 좀 남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내전과 외침, 세계대전들... 그동안 지구상에서는 수도 없는 소낙비와 폭풍우가 내리쳤지 않습니까? 한줄기 비가 그치면 새로운 비가 내릴 뿐 자연과 세월이라는 긴 흐름은 항상 우리 곁에서 천천히 흘러갑니다.
개체는 이승에서의 삶이 유한합니다. 그래서 개체는 개체를 낳고 교육시켜서 하나의 종種을 형성합니다. 개체의 유한한 삶을 종이라는 형태로 연장하는 거죠. 그러나 종들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공룡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종들이 나타나죠. 이렇게 수많은 종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자연입니다. 자연은 종보다도 훨씬 오래 갑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우주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자연을 통해서 존속하는 겁니다.
제게 자연은 이런 긴 흐름입니다. 자연에 들어가면 수많은 생명들의 순환과 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생로병사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이어지는 강물을 굽어보는 듯한 간접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강물의 순환이 생활이라는 시장과 이데올로기의 짧은 흐름에 매몰될 때마다 나를 꺼내 길고 유유한 흐름에 실어줍니다. 개체의 유한성과 종족의 연속성, 그리고 자연의 무한성을 가끔은 한번쯤 둘러보며 살게 합니다. 다들 아는 이것을 자연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게 해줍니다.
자연의 가르침
“‘자연’이 피디님에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어렸을 땐 시골에 5일마다 장이 섰습니다. 오일장 한 귀퉁이엔 꼭 우시장이 있었지요. 우시장에선 토끼도 팔고 강아지도 팔지만 역시 주인공은 덩치 큰 소였죠. 저는 소를 몰았습니다. 소장수들에겐 우시장에서 산 소나 팔지 못한 소를 다음 오일장으로 몰고 갈 소몰이꾼이 필요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 장이 파하면 저는 다른 소몰이꾼들과 함께 소를 몰고 내일 오일장이 서는 곳으로 출발합니다. 백리길 이백리길을 밤새 걸어서 다음 오일장에 도착하면 새벽 4시쯤 됩니다. 소장수들은 허연 김이 올라오는, 소죽 끓이는 가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요. 새벽 미명 때문인지, 올라오는 김 때문인지, 아니면 피곤 때문인지 흐릿해지는 눈을 비비며 소를 넘겨주면 그들은 먼저 소에게 따뜻한 쇠죽을 먹입니다. 배가 홀쭉한 소는 가격을 잘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우리에게 소몰이 값을 쳐주지요. 백리길을 몰아주면 큰 소 한 마리에 50원, 새끼 딸린 소는 15원을 더 받았습니다. 그렇게 합천장에서 산 소를 고령장으로 고령장에서 못판 소를 거창장으로 거창장에서 다시 산 소를 무주장으로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7년 동안 5일장을 떠돌았습니다.
우시장이 새벽에 시끌벅적하게 시작되어 오후 늦게 한산해질 때까지는 자유시간입니다. 저는 국수 한 그릇이나 풀빵 몇 개로 아침을 때우고 시장 한 귀퉁이에서 잠이 듭니다. 어느 날은 노점 국수 할머니의 치마폭에서, 어느 날은 풀빵 가게 모서리에서 잠이 듭니다. 자주 가는 풀빵집 주인에게는 제 또래의 딸이 있었는데, 그 여자 아이는 저에게 친절해서 자기 방 한 귀퉁이에서 잠을 자게 해주곤 했지요.
오후에 깨어나면 늦은 점심을 먹고 우시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시장에선 돈이 오갑니다. 온갖 악다구니와 싸움박질과 욕설도 오갑니다. 먹고 살기 위해 모두들 분주합니다. 이런 우시장을 둘러보다 오후 네다섯 시가 되면 다시 내일의 오일장으로 출발합니다. 가끔은 일행 없이 저 혼자 출발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가는 오일장이라면 혼자 가지 않지만, 한번이라도 가본 장이라면 다음번엔 저 혼자서 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백리의 산길을 홀로 간다는 건 소년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요. 달밤에 소백산맥을, 소년이 혼자 두세 마리의 소와 함께 걷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많은 밤에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기억할 수 없어도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전 슬픔이나 애수 없이 또렷이 기억합니다. 어른 소몰이꾼들이 같이 가기라도 하면 어린 아이가 기특하다고 저를 얌전한 소의 등에 태워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소몰이꾼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유행가를 한곡씩 불러가며 무료한 걸음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떠올리면 그 시절의 저를 상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두세 시간이면 끝이 납니다. 우린 밤새 묵묵히 걷습니다. 물소리, 바람소리, 그 바람에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밤부엉이 소리, 산기슭을 돌아다니는 알 수 없는 발자국 소리... 온갖 자연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추운 겨울날 달이라도 뜨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하얀 눈밭 위로 바위 그림자, 나무 그림자, 산 그림자들이 지나갑니다. 그러다 얼룩얼룩 그림자 진 눈밭 위로 낮에 본 시장의 모습들이 불현듯 반사되어 빙빙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돈이 오가는 것이 보이고, 온갖 악다구니와 싸움박질과 욕설이 오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다 다시 자연의 소리와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 새벽까지 끊임없이 걷습니다. 묵묵히 말입니다. 그러다 문득 어떤 긴 흐름을 느낍니다. 고개를 돌리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맘에도 낮에 봤던 것들이 어딘가 짧다는 걸 느낍니다. 낮과 밤이 상반된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짧은 흐름과 긴 흐름으로. 낮에는 시장을 보고 밤에는 자연을 보았던 겁니다. 그때부터 난 시장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언젠가 겨울날 새벽엔 소를 몰고 길을 걷는데 경운기 한 대가 지나갔어요. 그리고 경운기에 실린 사과 궤짝에서 사과가 하나둘씩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진 사과 알들 옆으로 참새와 까마귀와 청설모가 모여 들었습니다. 그 새벽에 새들과 청설모는 신나고 바빴지요. 저도 성한 걸로 두어 알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저에게 언제나 친절했던 풀빵집 소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떤 땐 차바퀴에 깔려서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져 죽은 개구리와 뱀, 까치도 보았지요. 동료 까치들은 죽은 까치 주변을 배회하며 풀섶의 지푸라기들을 모아 주검 위에 덮어주곤 했지요. 전 세상에 시장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풀과 나무와 까치의 일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말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마치 시장의 일만 중요하고 시장의 일만 있는 것처럼 빙빙 돌아가고 있지만 사실 자연의 일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숲을 걸을 때면 주변의 생명들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해당하는 규칙에 대해서 들려주었어요. 이를테면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잠이 오면 자야하고, 한번 태어나면 예외 없이 한번 죽는다는 사실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라는 개체의 규칙과 인간이라는 종족의 규칙과 자연의 규칙을 구분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제 몸속으로 들어온 자연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그런 큰 흐름과 규칙을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지금도 호랑이의 자취를 쫓다 숲속에 뒹구는 동물의 뼈를 마주치면 그 생명이 살아생전 내쉬었던 숨결이 다가옵니다. 그 뼈가 살아생전 지녔을 투쟁과 감성의 흔적을 마음속 깊이 느낍니다. 제 미래의 모습이 그 뼈에 투영되며 자연 속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똑같다는 동병상련의 감성이 살아납니다. 들꽃을 보면 그 이름이 궁금하기보단 이 꽃이 지고 있고 또 어딘가에선 피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끼고, 낙엽이 떨어지면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낍니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개체, 즉 자신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이 포함된 종족, 인류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살아있는 모든 종들로 구성된 자연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계들은 독립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서로 융합되어 있습니다만, 점점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며 다른 세계와 교감을 끊어버리는 개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교감을 위해 모두 은자隱者가 되자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과 이데올로기를 사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경쟁이 치열합니다. 생활을 해내기 위해선 그 경쟁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너머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종내엔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모든 생명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끔씩이라도 느끼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 흐름을 느끼면 개체는 다른 개체와 편안하고 인간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세월이 그것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저자는 시베리아에 살면 시베리아호랑이, 한반도에 살면 한반도호랑이 혹은 백두산호랑이라 불리는 우수리와 만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호랑이들을 밀착 취재해 왔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만난 '블러디 메리'라는 16세기 영국 여왕의 별명(사냥할 때 주변을 온통 피투성이로 만든다고 해선 붙여진 이름)을 이름으로 살아가는 암호랑이 3대 가족의 삶과 죽음, 생존을 향한 강렬한 투쟁을 직접 보고 관찰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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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박수용, 백두산 호랑이,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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