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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9일 째 되는 날의 일을 기억하는 천재 소설가 - 『가다라의 돼지』

질풍노도같은 삶을 살았던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 미스터리, 호러, 모험, 유머, 액션, 자전적 사소설 등 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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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라의 돼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작가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어진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지만, 나카지마 라모의 일생을 전혀 모른다면 그의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가다라의 돼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작가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어진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지만, 나카지마 라모의 일생을 전혀 모른다면 그의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때부터 술을 마시고, 20대부터 매일같이 과음한 탓에 30대 중반 알코올성 간염으로 50일간 입원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 밤 모든 바에서』를 썼다는 사실 같은 것. ‘대마는 인체에 무해하다’면서 대마 합법화를 주장하고 『마귀광대버섯』이라는 마약 체험담을 쓰기도 한 것. 나카지모 라모의 인생은 거의 기행에 가까운 여정이었고, 소설들은 그 좌충우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952년 태어난 나카지마 라모는 IQ가 185이고, 태어나서 9일 째 되는 날의 일을 기억하는 천재라고 한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 명문중고등학교에 들어간 나카지마 라모는 고교 시절부터 술과 약물에 찌들었고 등교를 거부했다. 이후 소설가, 에세이스트, 연극 각본가, 연극배우, 록밴드의 보컬, 광고 카피라이터 등으로 종횡무진 활동했다. 『오늘 밤 모든 바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을, 『가다라의 돼지』는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장편상을 수상. 『인체모형의 밤』 『가다라의 돼지』 『영원도 절반을 넘어서』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다. 이 정도의 이력은 약간 특이한 정도. 2003년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된 나카지마 라모는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구치소에 있는 동안은 이백 이십 곡의 가사를 썼고, 에세이집 『감옥에서 하는 다이어트』를 냈다. 그리고 ‘나는 계단에서 떨어져 죽을 것’이란 생전의 말처럼 2004년 7월 술집의 계단을 내려오다가 떨어져 죽었다. 그야말로 질풍노도와도 같은 삶이었다. 마음껏 하고 싶은 짓을 하고, 수다한 일도 하면서 멋지게 죽었다. 알게 뭔가. 그의 죽음마저도 스스로 연출했을지.

나카지마 라모의 소설에서도 제멋대로인 스타일은 여전하다. 『가다라의 돼지』는 무려 757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아프리카 주술의 연구에 정통한 민족학 교수 오우베 가족의 이야기다. 팔 년 전 케냐에서 딸 시오리를 잃은 후 알콜 중독에 빠졌지만, 여전히 연구를 계속하며 시시껄렁한 오컬트 방송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오우베 교수. 딸을 잃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우울증을 앓던 아내 이쓰미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자, 오우베는 함께 방송에 출연했던 마술사 미러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미러클은 신비 현상이나 초능력의 뒤에 숨겨진 거짓과 사기를 폭로하는 일을 했다. 2부는 오우베 가족이 방송국 취재진과 함께 아프리카 주술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주술의 나라 케냐, 그 중에서도 마을 주민 전원이 주술사라는 마을 쿠미나타투로 향한다. 일행이 찾아간 주술사의 마을은 엄청난 힘을 가진 주술사 마키리 한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키리의 강력한 주술 도구인 ‘바나나 키시투’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긴 오우베의 조수 도만은 홀로 바키리의 집에 찾아가 그것을 훔쳐낸다. 3부는 오우베 일행을 쫓아 일본까지 온 마키리와의 처절한 싸움을 그린다.

『가다라의 돼지』의 내용을 대강 훑어보면 전혀 다른 소설 3편을 이어놓은 것도 같다. 1부는 일본의 인기 드라마였던 <트릭>을 연상시킨다. 사이비종교, 초능력자 등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트릭과 사기를 폭로하는 물리학자와 마술사의 활약을 코믹하게 그린 <트릭>은 2000년 처음 방영된 후 시즌3까지 이어지며 두 편의 극장판을 만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트릭>이 인기를 끈 이유는,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의 수수께끼를 철저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해명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 라고. 하지만 그 말은 정말 위험하다. <트릭>에 나오는 ‘기적’들은 모두 눈앞에서 벌어진다.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만, 그것은 트릭과 장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이다. 미라클은 반대로 현실이 가장 힘들고 복잡한 곳이라고 말한다. ‘속임수도 장치도 없는 세계에 관여하는 짓은 무서워서 못합니다.’라고. 철저하게 준비된, 모든 것을 꾸며낸 무대 위에서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2부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2부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인 『우부메의 여름』『망량의 상자』 등을 떠오르게 한다. 교고쿠도는 언제나 신랄하면서도 냉정하게 초자연적인 사건들의 합리적인 해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어떻게 ‘현실’에서 가능한지 알려준다. 케냐에서 주술사들과 오우베가 나누는 대화도 비슷하다. 주술이 단순한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곳. 주술의 ‘현실적인 힘’이 어떻게 발생하고 작용하는지, 나카지마 라모는 꽤나 진중하게 설명해준다. 현대의 주술은, 그야말로 과학과 신비의 결합이다. 오우베는 바키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패를 많이 갖고 있어. 물리적인 트릭에 최면술, 위생학……, 비위생학이라고 하는 게 낫겠지. 기생충에 전염병, 거기에 독물, 환각성 식물.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데다가 근대적 과학 지식까지 가지고 있어.” 그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그 모든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나카지마 라모는 그런 ‘합리적인 해석’으로 주술과 기적을 설명하면서도, 여전히 현실 저 너머의 무엇인가를 긍정한다.

그렇다면 일본까지 쫓아온 주술사는 과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바키리는 폭력조직이나 권력의 힘까지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주술사 바키리와 싸우는 것은 단지 퇴치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반드시 바키리의 주술의 정체를 알아야만 한다. 바키리는 단지 마법의 힘만을 믿고 온 것이 아니다. ‘전령 메로스밖에 없는 시대에 전화를 가진 녀석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훌륭한 대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척 복잡한 정보 시스템 안에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 쪽에는 바람잡이, 스파이, 배우 극단에 연기자까지 있고, 온갖 장치가 가능합니다. 보통 사람이 어떻게 속지 않고 제대로 겨룰 수 있겠습니까.’ 사실 『가다라의 돼지』가 진정으로 흥미로운 것은 2부까지다. 바키리가 일본으로 건너온 3부부터는 단순한 액션 활극처럼 펼쳐진다. 장황하게 과장하던 주술사 바키리가 갑자기 현실적인 존재가 되면서 괴상한 야쿠자 정도가 되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상관없다. 나카지마 라모의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꽉 짜인 구성이나 일관성 때문이 아니다.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나카지마 라모의 글은 멋대로 뻗어나간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장광설이 멋진 연설처럼 들린다면, 나카지마 라모의 글은 술집에서의 나른하지만 의미심장한 대화처럼 들린다. 『가다라의 돼지』는 미스터리, 호러, 모험, 유머, 액션, 자전적 사소설 등이 망라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나카지마 라모는 『가다라의 돼지』 쓰기 위해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주술사들과 생활했다고 한다. 나카지마 라모라면 당연히 그랬을 법한 행동이고, 아마도 그 생활을 즐겼을 것 같다. 그리고 느꼈을 것이다. 주술의 세계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술이나 마약에 취하고, 사랑이나 저주의 말을 던지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하는 일이다.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은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 사랑하거나 저주하거나, 중요한 것은 그 순간, 그 감정 자체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세계이든, 마약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환각 혹은 초자연적인 세계이든 상관없다.

류신 스님에게 있어서는 불가사의한 것이 허구든 실재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객관적 과학이 인정하건 말건 그런 것은 스님에게는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종교로서 스님은 자신이 ‘공덕을 보여’ 그걸로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충분했다.

그것이 바로 나카지마 라모의 생각이었을 것 같다. 진실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된다. 얻기 위해서 자유로워지고, 편해지면 되는 것. 수수께끼 같은 것을 밝히지 않아도 믿으면 되는 것이다. 믿기 싫으면 반대로, 믿지 않고 자유로워지면 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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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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