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와 상상univ가 주최하는 <청춘의 상상 북토크>가 KT&G 서대문타워에서 열렸다. 대학생 독자들과 함께, 책을 통해 청춘의 상상력을 펼쳐보는 자리. 첫 번째 청춘 사수로,
『원고지』의 김탁환 작가가 함께 했다.
김탁환 작가는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가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등등 국내 가장 많은 작품이 영상화된 소설가다. 그의 왕성한 창작력을 보자면, 청춘이라는 말이 절대 어색하지 않다. 최근 출간된
『원고지』는 예술노동자의 삶과 소설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이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블로그에, 노트에 써두었던 창작 일기를 묶었다.
강연시간이 다가오자, 속속 자리가 차기 시작한다. 대학생 독자만을 위한 행사라, 앳된 얼굴들이 눈에 띈다. 노트와 펜을 들고 강의를 기다리는 학생도 있고, 책을 넘겨보며 이야기를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도 있다. 저마다 글쓰기에 대한, 창작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품은 독자들이었다.
김탁환의 창작 일기장『원고지』
김탁환 작가는
“올해로 마흔 다섯 살이다. 이제 뭔가 시작해야 할 나이가 아닌가 싶다.”라고 본인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최근에 컴퓨터 하드가 날아간 적이 있다. 컴퓨터에 기록해두는 게 편하지만, 소중한 생각은 일기장에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2000년 이전에도, 2010년 이후에도 일기를 쓰고 있지만, 『원고지』를 통해서, 내가 어떤 순간에 일기를 쓰는지 이야기하고 싶다.”당신은 어떤 날 일기를 쓰나? 무엇을 기록하나? 작가의 일기는 우리의 일기와 무엇이 다를까? 김탁환 작가는 직접 하나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발레 무용가 임혜경 씨를 만났다. 발레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수학’이란다. 35년 간 노력한 일은 한가지 밖에 없단다. 무게 중심을 옮긴 일이다. 무거운 머리통이 흔들릴 때, 어떻게 무게 중심을 잘 옮길까, 그 고민으로 35년간 애를 썼다는 거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정작 자신은 ‘아, 무게 중심을 잘 잡았어!’하고 기뻐한다는 거다. 그날 일기에 썼다. ‘발레는 수학이다.’”그리고 덧붙여 썼다. ‘그런데 글쓰기 역시 수학이 아닐까.’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그 속에서의 통찰. 자신의 삶으로 이어지는 사유가 그의 일기장에 펼쳐진다.
십 년 동안 쓴 일기를 묶어낸 감회는 어떨까.
“시간이 이렇게 쌓이는구나 새삼 느꼈다. 돌이켜 보니, 12년 전에 하던 일을 여전히 내가 하고 있더라. 경상도 말로 ‘워쩌자고 이렇게 됐을까’ 싶다.(웃음) 글을 쓰고 늙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글을 쓰는 시간인 것 같다.”“40년 동안 앵두만 키운 게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김탁환 작가는 어린 시절의 일화를 꺼냈다.
『원고지』 서문에도 실려있는 외숙의 이야기다.
“외삼촌이 앵두나무를 기르셨다. 400~500그루의 나무에 앵두가 동시에 열려서, 앵두를 딸 때 일가친척이 다 모여 일을 했다. 산이 빨갰다. 달려 다니며 앵두를 따먹었던 기억이 선하다. 어느 날, 외삼촌이 잠깐 보자고 해서 갔더니, ‘한번 볼래’하며 A4용지 원고 뭉치를 주시더라. 40여 년 간 외삼촌이 써 왔던 글이었다. 출판해주려고 했는데……. 너무 못써서 출판할 수는 없었다.(웃음)”오랫동안 써 온 글을 건네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본인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외삼촌이, 문득 누구에게라도 그 글을 읽히고 싶으셨던 것.
“40년 동안 앵두만 키운 게 아니다. 앵두가 열리지 않았을 때, 그 나무 아래에서 외삼촌은 글을 쓴 거다. 앵두 나무 아래서 글을 썼던 그 사람의 자존감. 이게 정말 자랑스러웠다. 작가가 되겠다고 내가 결심했을 때, 나를 지지해줬던 유일한 사람도 외삼촌이었다.”이 책은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인 셈이다.
“이 책의 문장들이 앵두를 닮을 수 있을까. 봄날 나뭇가지에 매달려 한껏 붉음을 뽐내는 앵두가 아니라 계곡에 떨어져 썩은, 빛깔도 모양도 맛도 앵두다움을 잃은 앵두” (여는 글) 그래서 삼촌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단다.
“무엇을 하던 글을 쓰는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중요한 축복 중 하나다.”
“글을 쓰다가 죽는 건 너무 비장하다. 나는 그렇게 순교할 만큼 용감하지도 처절하지도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글을 쓰다가 잠드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잠드는 일은 클로버문고를 읽을 때부터 종종 있었지만, 글을 쓰다가 잠들기 시작한 건 그물 여덟 살 무렵부터다. 정신이 말똥말똥할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졸음을 느껴 기지개를 켜고 그러다 정말 참을 수 없어서 세수를 하고, 그러다가 문장을 마치지도 못한 채 ‘하였’에서나 ‘나는 그에게 달’ 정도에서 그냥 잠들어버리는 것.
난 이게 참 행복했고 가끔 정말 끊은 담배처럼 그리울 때가 있다. 장편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후론 주로 낮에 작업하고 잠이 올 때까지 밤늦게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글을 쓰다가 잠들고 싶어진다. 이 때늦은 쾌락주의.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드는 건데 뭐. 혹시 창작일기를 쓰다가 잠드는 날은 없을까. 아직 잠들 때가 아닌가보다. (p.200)” |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서 작가가 된다”
짧은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독자들은 김탁환의 다작의 힘, 창작의 비법을 궁금해했다. 김탁환 작가는 무엇보다 꾸준히 쓰는 일을 강조했다.
많은 작품이 영화, 드라마가 되었다. 각색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궁금하다.
보통 각색을 하면 감독이나 피디가 내용을 고친다. 이에 관해서 저작동의권을 계약한다. 미국에서는 여러 사례가 있어서 그 계약서가 60~70 페이지쯤 된다. 그에 비해 우리의 계약서는 고작 두 세 장이다. 10년 동안 이런 저런 문제를 겪으면서, 계약서가 두꺼워지고 있다. 법조문을 따지는 일도 많다. 주인공 이름은 바꿀 수 없다든지, 이 에피소드는 꼭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조항이 포함된다. 처음 계약하는 소설가들이 내게 자주 전화한다. 내가 10년 전에 당한 일을 또 당하는 후배들이 있으니까 도와주게 된다. 오지랖이 넓어서 그렇다.(웃음)규칙적으로 꾸준히 작업하는 게 놀랍다. 그 비결은 뭔가?
인물이 어떻게 될지 끝을 알고 있으면, 이야기를 풍성하게 상상할 수 있다. 작가들이 영감으로 글을 쓴다는 건 뻥이다.(웃음) 스물 다섯 살인 주인공이 60살, 80살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가 작가에게는 구체적으로 짜여 있다. 이야기의 범위를 넓이고 깊이를 깊게 하기 위해서는 자료 조사가 필수다. 1892년대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 집필실을 그 때 당시의 책, 사진으로 바꿔둔다. 그런 배경 속에서 사건에 빠져드는 거다. 그런 것들이 주위에 놓여 있어서, 그때 그때 가져다 쓰는 식이다.글 쓰기 이외에는 무엇을 즐기나?
요즘에는 장편소설을 연재 중이라 글쓰기 생각뿐이다. 보통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글을 쓰고, 금요일 밤에는 만취상태가 된다. 주말에는 여행을 간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소설가가 되고 나서 바뀌었다. 낮에 현장에서 글 쓰는 일이 무척 행복한 거다!(웃음) 요즘은 인천이 배경이라, 인천을 다니며 글을 쓰는데, 그 장소에서 느껴지는 냄새, 소리, 향기가 글 속에 들어오니까 정말 좋다. 가끔은 주객이 전도되어, 답사를 가기 위해 소설을 쓰게 되는 것 같다.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한다.작가 지망생이다. 조언을 해달라.
아주 여러 가지 우연히 겹쳐서 작가가 된다.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내가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야.’ 이렇게 말하게 된다. 원래 나는 비평가였다. 양귀자가 내 글을 보고 ‘소설을 써 볼래? 넌 참 비평을 소설같이 쓴다.’고 했다. 내가 작품 분석을 하는 게 아니라 몽상을 한다는 얘기였다. 군대에 들어가서 습작을 했는데, 나와 보니 소설가가 되었다.
우연이 겹쳐 작가의 길로 내몰린 것이다. 요즘 문화센터나 동아리가 많아서 등단하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작가가 되기를 꿈꾸지 말고, 평생 글을 쓰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라. 내가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때 그때 허겁지겁 쓰는 게 아니라, 미리 써둔 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재주 있다고 섣불리 등단하지 말고, 꾸준히 쓰면서 준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