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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
『불야성』: ‘철저히 고독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삶
세상에는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다.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고, 어느 것에도 의탁할 수 없는 철저하게 고독한 삶. 하세 세이슈의 데뷔작 <불야성>의 주인공 류젠이가 그렇다.
『신주쿠 상어』의 오사와 아리마사, 『전설 없는 땅』의 후나도 요이치 등이 활약했던 80년대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과는 달리 하세 세이슈의 작품에는 ‘감정이입이 가능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문예평론가 키타가미 지로는 말한다. 일본에서 『불야성』이 출간된 것은 1996년. 버블이 몰락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더 이상 희망은 없고, 이 세상이 정글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실감했던 시대에 『불야성』은 나왔다. 반쪽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류젠이는 악당이 되어야만 했고,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최악의 길을 걸어왔다. 비극적인 세계를 목격하고 비통해하며 쓸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하드보일드의 탐정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류젠이는 살고 있다. ‘목가적인 이야기와 결별했다는 점이야말로 본서의 특징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갈 곳을 잃은 현대인의 초조와 통렬한 열기와 위태로울 만치 날카로운 칼이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다. 이미 목가적인 시대가 아니라고 고하는 새로운 시대의 소설이다.’(키타카미 지로)
하지만 80년대의 하드보일드 영웅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던 키타카미와는 달리, 나는 류젠이에게 더욱 더 끌린다. 심지어 감정도 이입된다. ‘나는 일주일 앞일을 고민해 본 적이 없어. 나처럼 사는 인간에게 그런 짓은 무의미하니까. 내가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야. 내일이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누구도 몰라. 일단 오늘 살아남는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류젠이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미래도, 꿈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지금 이 장소에서, 생존의 선택을 하는 것. 비열하고 잔혹하지만, 그것이 류젠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류젠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류젠이는 나츠미를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 자신 역시 언제든 배신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집착하는 순간, 그것이 곧 죽음의 묏자리를 파는 행위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지만, 아니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배신할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을 마실 수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소중한 인간일지라도 배신하고 마는 인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내 가슴을 통렬히 후벼 팠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 바싹 마른 모래만 흘러나온다.’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도 배신한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생물의 절대적인 지향인 생존을 위해서.
난 널 데리고 가고 싶어. 네가 바라는 장소에. 그렇지만, 나츠미, 그런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