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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

『불야성』: ‘철저히 고독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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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다.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고, 어느 것에도 의탁할 수 없는 철저하게 고독한 삶. 하세 세이슈의 데뷔작 <불야성>의 주인공 류젠이가 그렇다.

세상에는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다.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고, 어느 것에도 의탁할 수 없는 철저하게 고독한 삶. 하세 세이슈의 데뷔작 『불야성』의 주인공 류젠이가 그렇다. 대만인 조폭과 일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류젠이는 중국인과 일본인 반반의,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인생을 타고 났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대만인 사회의 숨은 실력자인 양웨이민을 찾아간다. 양웨이민은 일본인 신분인 류젠이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여 손자처럼 대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키워준 것에 불과했다. 살아남기 위해 중국인을 죽여야만 했던 류젠이는 양웨이민에게 버림받고, 무국적 사회로 변해버린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정보통이자 장물아비로서 살아간다. 철저히 고독하게.


내게 고독이란 소속된 장소가 어디에도 없음을 의미한다....지금은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이고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분명히 깨닫고 있다. 나는 아웃사이더다. 혼자 살다 혼자 뒈진다.


나츠미를 본 순간, 류젠이는 반한다. ‘치켜 올라간 두 눈에 깃든 감정은 경악, 두려움, 습관에 가까운 교태, 그리고 아무리 눌러도 흘러넘치고 마는 증오. 그중에서도 두려움과 증오의 빛이 내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그것은 생존의 빛이었다.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빛. 결코 환하거나 화사한 빛이 아니라, 칼날처럼 번득이는 우울하지만 매혹적인 빛. '내 인생에는 항상 두려움과 증오가 달라붙은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오래 붙어 있어서 자신이 뭘 두려워하고 증오하며 살아가는지 깜빡깜빡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떨쳐 내려고 해도 두려움과 증오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 어금니를 바짝 세우고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츠미를 보자마자, 류젠이는 알게 된다.


나는 안다. 나츠미가 항상 겁에 질린 채 살아왔음을. 항상 무언가를 미워하며 살아왔음을. 나츠미의 눈빛이 지닌 의미를 나는 이제 이해한다. 나츠미는 나와 같은 장소에 태어난 생물인 것이다.


조금씩 드러나는 류젠이의 과거는 끔찍하다. 결국 류젠이가 알게 된 나츠미의 과거도 그 이상으로 끔찍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겨왔다.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우린 문명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지. 그건 사기야. 우린 정글에 살고 있어. 최소한 가부키초는 그래. 하이에나가 남의 먹이 훔쳐 먹기를 관두고 쓸쓸하다며 울기라도 한대? 그놈들은 살아가기 위해 남의 먹이를 가로채느라 정신없어.’ 살아남기 위해서, 훔치고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목적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기꺼이 선택했다. 사실 류젠이는 겁쟁이다. 겁이 많기 때문에 혼자 살아갈 수 있었고, 결국 살아남았다. 자신의 두려움과 증오를 깨닫고,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것저것 매사를 복잡하게 생각하곤 했어. 내가 튀기라는 것도 그렇고, 가부키초에서 대만인과 대륙 놈들과 살아가는 것도 그랬어. 매일처럼 망설이고 고민하고 누군가를 증오하다 비참한 기분에 처박히곤 했어. 근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법칙으로 움직인다는 걸.....이 세상은 뺏는 놈과 뺏기는 놈 둘밖에 없다는 거야.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이러쿵저러쿵 고민하는 인간은 평생 누군가의 호구가 될 뿐이야. 그래서 나는 고민하기를 관뒀어. 뺏는 데 전념하기로 했어.


 

『신주쿠 상어』의 오사와 아리마사, 『전설 없는 땅』의 후나도 요이치 등이 활약했던 80년대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과는 달리 하세 세이슈의 작품에는 ‘감정이입이 가능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문예평론가 키타가미 지로는 말한다. 일본에서 『불야성』이 출간된 것은 1996년. 버블이 몰락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더 이상 희망은 없고, 이 세상이 정글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실감했던 시대에 『불야성』은 나왔다. 반쪽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류젠이는 악당이 되어야만 했고,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최악의 길을 걸어왔다. 비극적인 세계를 목격하고 비통해하며 쓸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하드보일드의 탐정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류젠이는 살고 있다. ‘목가적인 이야기와 결별했다는 점이야말로 본서의 특징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갈 곳을 잃은 현대인의 초조와 통렬한 열기와 위태로울 만치 날카로운 칼이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다. 이미 목가적인 시대가 아니라고 고하는 새로운 시대의 소설이다.’(키타카미 지로)

하지만 80년대의 하드보일드 영웅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던 키타카미와는 달리, 나는 류젠이에게 더욱 더 끌린다. 심지어 감정도 이입된다. ‘나는 일주일 앞일을 고민해 본 적이 없어. 나처럼 사는 인간에게 그런 짓은 무의미하니까. 내가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야. 내일이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누구도 몰라. 일단 오늘 살아남는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류젠이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미래도, 꿈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지금 이 장소에서, 생존의 선택을 하는 것. 비열하고 잔혹하지만, 그것이 류젠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류젠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류젠이는 나츠미를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 자신 역시 언제든 배신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집착하는 순간, 그것이 곧 죽음의 묏자리를 파는 행위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지만, 아니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배신할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을 마실 수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소중한 인간일지라도 배신하고 마는 인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내 가슴을 통렬히 후벼 팠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 바싹 마른 모래만 흘러나온다.’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도 배신한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생물의 절대적인 지향인 생존을 위해서.


난 널 데리고 가고 싶어. 네가 바라는 장소에. 그렇지만, 나츠미, 그런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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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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