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절두산에 흐르는 빗물이 피처럼 느껴지더라”
『흑산』“나는 꼰대는 되지 않겠다”
『흑산』은 1801년(신유년) 천주교 박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김훈은 『흑산』을 쓰면서 신앙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김훈은 관념으로 언어를 만들지 않는다. 삶의 고단함을 통해 온몸을 눌러가며 원고지의 비워진 공간을 채워갈 뿐이다. 그의 글은 그대로가 삶이요 역사의 증거다. 더하고 뺄 것도 없는 문장은 진실함이 숨을 틈을 주지 않는다. 투박한 말투와 무덤덤한 표정은 자칫 그를 차가운 사람으로 오인시키기도 하나 김훈은 그 빛깔만으로는 맛을 알 수 없는 순도 높은 증류주다. 단어 하나에 밤을 지새우고 피를 토하듯이 문장을 뱉어내는 김훈 작가를 만나보았다.
김훈 작가의 창작실과 마주하고 있는 일산의 호수공원. 자욱이 쌓인 낙엽들이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이리저리 쓸려가고 있었다. 대지의 자양분이 되지 못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풍장(風葬) 되어버릴 가을의 시신이 안타깝다.
『흑산』은 안타깝게 사그라져버린 생명에 대한 위령제 같은 소설이다. 무심한 행인의 발길로 낙엽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흑산』을 읽어야 한다. 김훈은 이번 소설에서 이순신도 우륵도 포기했다. 대신 좀 더 많은 평범함을 끌어안았다. 죽음의 무게를 저울질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배려가 느껴진다.
“많은 이들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 한 명만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아주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야기를 집중시키고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훌륭한 장치이지만, 실제 우리의 삶에는 주인공이 없죠. 이번 소설에서는 각각의 삶을 균등하게 다루고 싶었습니다.”
“삶의 현장이 중요합니다”
김훈의 창작실에는 자전거 두 대(일반용, 산악용)와 책상, 책장 정도가 다다. 그 흔한 컴퓨터나 텔레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책상 위에는 노트와 연필이 놓여 있다. 창작할 때는 꼭 연필을 쓴다는 김훈. 그리고 한 편에는 김훈이 자랑하는 티볼리 라디오가 놓여 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오로지 라디오의 기능에만 충실한 소형 라디오는 김훈에게 훌륭한 소식통이 되어준다. 김훈의 창작실은 참으로 소박하고 실용적이다. 이는 김훈의 삶과도 일맥상통한다.
김훈은 젊었을 때부터 낭만적이거나 관념적인 목표가 없었다고 한다. 김훈은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중역이 되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도 글을 쓰는 일을 고상하거나 잘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내가 책 많이 읽은 것을 조금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아요. 제 주변에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도 원만한 인격과 정확한 판단으로 사회적인 선행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꼭 책을 읽고 글을 써야만 바른 인간이 되는 건 아니에요. 삶의 현장이 중요합니다.”
절두산 망령의 통곡이 묻어 있는 소설
삶의 현장을 중요시하는 김훈은 책보다 직접적인 사물과 인간을 봄으로써 창작욕을 느낀다고 한다.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칼을 보고는 『칼의 노래』를, 악기 박물관의 가야금을 보고서는 『현의 노래』를 떠올렸다. 『흑산』은 무엇을 보고 착상을 얻었을까.
“이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지가 10년이 넘었어요. 비 오는 날 밤에 양화대교 옆을 지나다가 절두산을 보았지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간헐적으로 절두산을 비추는데, 번쩍거리는 절두산의 벽면에 흐르는 빗물이 꼭 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더군요. 그때 저곳에서 죽어간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지요. 그런 예감을 받으면 언젠가는 글을 쓰게 되어 있어요.”
김훈이 절두산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흑산』은 1801년(신유년) 천주교 박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김훈은 『흑산』을 쓰면서 신앙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김훈은 신앙인의 감성보다는 상황의 객관적 묘사를 선택한다.
“나는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았어요. 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입니다. 지금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가끔 성당에 가고 절에도 가요. 그리고 마호메트교나 증산교 그리고 대종교 같은 여러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읽습니다.”
『흑산』에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황사영은 죽음으로 종교적 신념을 지켰고 정약용은 배교를 통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 김훈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제가 선택을 해야 한다면 순교는 안 했을 거 같아요. 저는 세속의 길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그런 야만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순교냐 배교냐를 선택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흑산』의 속표지에는 김훈이 직접 그린 ‘가고가리’라는 괴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평소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김훈이지만 출판사의 요청을 받고 5분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책의 집필을 끝내고 나니 김훈의 머릿속에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가고가리는 새, 배, 물고기, 말을 한 마리의 생명체 안으로 모은 것이에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해 ‘가고 또 가는’ 생명체를 그린 거지요. 그렇게 가다가 내려앉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늙어버렸어요. 나처럼 말이죠.”
『흑산』을 펴낸 학고재 출판사의 손철주 주간은 유명한 미술평론가다. 과연 손철주 주간은 김훈의 그림을 어떻게 평했을까.
“손철주 씨가 이건 그림이라기보다는 글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말이 맞아요. 이건 그림이라기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집어넣은 거지요. 그림에 보이는 섬이 흑산도에요. 그리고 그 반대편이 육지고.”
선감도에 고립돼서 써내려간 소설
김훈은 글을 쓰는 게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탈고를 하고 나면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어느덧 그는 다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김훈은 소설을 쓸 때 자신을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칼의 노래』를 쓸 때는 정말로 가난했어요. 아는 후배의 지하 작업실 한 칸을 빌려서 책상 하나만 놓고 글을 썼지요. 그런데 제 작업실은 난방이 안 되는 방이었어요. 그리고 지하실이다 보니 무척 습했는데, 벽면에 습기 때문에 고드름이 달렸지요.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흑산』은 주변에 한 줌의 네온불빛도 없고 앞에는 서해 갯벌이 펼쳐진 ‘선감도’라는 섬에서 썼어요. 나는 혼자 있는 게 좋아요. 내 몸과 마음이 가득 차는 게 느껴져요. 그리고 올해 여름에 비가 무척 많이 왔잖아요. 두 달 반쯤은 계속해서 비가 쏟아져 내리더군요. 그래서 비를 맞으면서 운동을 했어요. 속옷만 입고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아 봤어요? 한 번 해봐요. 정말 신이 나요.”
김훈은 자신이 일하는 걸 싫어하고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김훈은 무엇을 하면서 놀까. 김훈은 주로 혼자서 논다고 한다. 영화관이나 쇼핑몰 그리고 공연장처럼 사람이 많은 데는 절대 안 간다. 대신 자전거를 몰고 강가로 놀러 간다. 노는 이야기를 하는 김훈의 모습이 무척 천진해 보인다.
“저는 강가에 가서 혼자 재미있게 놀아요. 임진강이나 한탄강에 가거나 조금 멀리 갈 때는 팔당강이나 양수리강에 가지요. 그곳에서 강물 소리를 듣고 강물을 강아지 만지듯 쓰다듬기도 해요. 혼자서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지요.”
흑산도는 남해의 섬이다. 그리고 남해는 『칼의 노래』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격전지로 묘사된다. 또한, 충무공의 죽음을 기리는 ‘이락사’가 있는 곳도 남해다. 고은 시인이 ‘동해는 예술이고, 서해는 인생이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김훈에게는 남해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제가 한동안 동해 쪽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동해는 시간이 막 쏟아져 나오는 놀라운 바다지요. 젊은이들의 바다에요. 저는 우리나라의 동해를 참 좋아해요. 동해에 가면 고래가 있어요. 고래 보러 세 번 갔었는데 한 번도 못 봤어요. 내가 갈 때는 고래가 안 나오더군요. 다른 사람이 갔을 때는 고래가 나왔대요. 그리고 서해는 아득한 갯벌이 있는 일몰의 바다지요. 구부러진 해안선마다 인생의 황혼을 맞은 중년 남녀를 쉽게 볼 수 있어요. 그에 반해 서해는 참 낭만적이고 서정적이에요. 해안선이 정말 아름답지요. 우리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음악이 막 울려 퍼지는 거 같아요.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그곳이 가장 참혹한 전쟁터였지요. 한 풍경에 아름다운 것과 비참한 것이 겹쳐 있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사 같지요.”
“제게 있어 사랑은 예비 음모단계에서 끝나버렸습니다”
단정적이고 힘이 있는 필치와 남성 중심의 이야기 구조 때문인지 김훈에게는 늘 ‘마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마초라는 수식어도 다양하게 변용돼서 사용된다. ‘아름다운 마초’, ‘섬세한 마초’, ‘지성인 마초’ 등.
“수식어는 다 빼고 그냥 마초라고 하는 게 좋아요(웃음). 그리고 마초라기보다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지요. 저희 집안은 대대로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살았는데 아주 평화로운 제도에요. 집안의 여자들을 보호하고 궂은일을 남성이 하는 게 가부장제이지요. 대신 남성이 여자를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더 높은 권력을 가지게 돼요. 여자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건 가부장제가 아닙니다. 그건 그냥 날라리 건달이지요. 그리고 현대의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저항하고 있어요. 보호보다는 똑같이 대우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현대 여성들의 말이 맞습니다. 갇히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자신의 틀에 가두는 건 폭력이지요.”
가부장적인 남자 김훈은 자신의 몸으로 검증하지 않은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서 ‘사랑 이야기’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김훈이 검증하지 못한 말 중에는 ‘사랑’도 포함된 걸까.
“저는 사랑이란 말을 잘 쓰지 않아요. 단편에서 몇 번 시도해봤는데, 미수도 아니고 예비음모단계에서 끝났죠(웃음). 물론 사랑은 제가 장악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보단 사랑이라는 말이 뭔가 변덕스럽고 타락해 있는 느낌이 들어요. 요즘 노래를 들어보면 다 사랑이야기뿐이잖아요. 그리고 잘 들어보면 그 사랑이라는 게 대부분 욕망이고 치정이에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쉽게 사용되고 넘쳐나다 보니까, 난 그 말을 쓰기가 참 이상하더라고요.”
꼰대는 되지 않겠다
김훈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언론사의 고위직에 있었지만, 권위를 내세우거나 명성에 기대려는 생각은 찾아볼 수 없다. 겸손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는 것처럼 교만으로 재능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알아요. 좋은 세상이 돼가는 거지요. 젊은이들한테 물어봤더니,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꼰대에요. 우리 애들도 ‘아빠는 제발 늙어도 꼰대는 되지 마세요’라고 해요. 그래서 꼰대가 뭔지 알아봤더니, 꼰대는 자신이 만든 틀에 젊은 친구들을 자꾸 끌어들이려 하고 끌어지지 않으면 야단을 치고 간섭하는 부류를 말하는 거더라고요. 꼰대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고 자신이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아 달라 하소연하죠.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젊은이들도 투표율이 높아졌어요. 그러니까 꼰대들은 깨질 수밖에 없어요. 꼰대들은 반성을 하고 변화하려 노력해야지요. 현대의 젊은이들은 꼰대에게는 더 이상의 권위가 없다는 걸 알아요.”
건실한 사위를 맞고 싶다
김훈에게는 1남 1녀의 자녀가 있다. 김훈의 장녀는 「10억」이라는 영화를 만든 영화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훈은 딸이 첫 월급으로 사준 휴대전화와 용돈을 받은 기억을 그의 에세이집에 옮겨놓기도 했다. 김훈은 아직도 딸이 선물해준 낡은 구형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영화라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고난의 길을 가는 거지요. 나는 영화를 안 봐요. 텔레비전도 없고 본래 영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영화를 좋아하죠. 딸이 만든 영화를 끌려가서 보긴 봤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영화는 계속 안 보려고요. 점점 더 낙후된 사람이 되는 거지요. 하지만 괜찮아요(웃음).”
서른을 넘긴 김훈의 두 자녀는 아직 미혼이다. 하지만 김훈은 자녀들에게 결혼을 재촉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짝이 생기면 결혼은 하지 말래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김훈은 어떤 사위나 며느리를 얻기 원할까.
“그저 건실하면 돼요. 우리 애들도 마찬가지고 사위나 며느리도 남보다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람이길 원하지 않아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직하고 근면한 인간이기를 바라요. 그런데 그게 정말 힘든 거예요.”
다음 소설에서는 ‘현대사회의 악’을 다뤄보고 싶다
김훈은 『흑산』을 통해 독자들이 삶에 대한 경건성을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소설은 ‘현대사회의 악’에 대해서 다뤄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훈은 다음 소설의 집필을 위해 12월 중순에는 선감도나 다른 섬에 들어갈 예정이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약육강식’이에요. 약육강식을 건강한 일상성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다음 소설에서는 그 문제를 써보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요.”
김훈은 매일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운동한다. 그러고 나서 씻고 밥 먹고 계획한 일과를 해나간다. 그러다 삶에 고통이 찾아오면 그 고통을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이 모든 순간이 지나고 있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받아들이고 인내한다는 김훈 작가. 장인의 손길로 순도 높은 삶을 재현해내는 작가의 필치는 그의 정갈한 삶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정갈한 삶은 『흑산』이라는 소설을 낳았다. ‘가고가리’처럼 육지에 내려앉지 못하고 늙어버린 작가의 글을 통해 독자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