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고전평론가 고미숙 “요즘 청춘은 사람이 귀하다는 걸 몰라요”
“고전 공부, 좋은 삶과 좋은 앎의 일치!”
4학년 때 어떤 결론을 내린 것 같아요. 10대 20대의 꿈은 확실하지 않아요. 분명하다면 가짜죠. 그걸 모색하는 기간이 청년기에요. 그러기 위해선 꼭 사람을 만나야 해요.
중구 필동에 자리 잡은 ‘감이당’에서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이번엔 의역학(醫易學)이다.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란 부제의 『동의보감』(그린비, 2011)도 냈다. 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의 키워드는 ‘몸, 삶, 글’이다. 그간 고미숙을 상징하는 또 다른 단어는 ‘수유 너머’였다. 인문학의 대중화에 앞장서온 ‘수유 너머’를 떠나, 새 둥지를 튼 그의 도전이 궁금했다. 감이당 위층에 있는 ‘남산강 학원’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수유 너머’와 마찬가지로 함께 밥을 해먹고, 공부하는 생활공동체다.
중앙일보와 온라인서점 예스24가 함께하는 ‘희망의 인문학-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에서 고씨를 초대했다. 올 10월 그가 서울 중구 필동에 새로 마련한 연구공동체
‘감이당(坎以堂)’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정재승 : 와, 필동에 이런 곳이 있어요?
고미숙 : 도심 속의 시골이죠. 택시 타려면 15분은 나가야 해요.
정재승 : 원남동 수유너머엔 가봤어요. 고병권 선생님도 뵙고요.
고미숙 : 어느 순간, 공간이 너무 커서 나를 누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공부의 지향, 성향 모두 달랐기 때문에 공간을 나눠야겠다 싶었어요. 이진경 선생님은 홍대 앞에서 ‘수유너머 N’을, 혜화동에선 '수유너머 R'이 운영되고 있어요. 이곳에 온 지는 한 달 열흘 됐네요. 저는 2층에 의학, 역학 하는 동의보감 연구소에 있어요. 다시, 조그만 밴드로 시작하는 거죠. 남산강 학원은 후배들이 합니다. 공간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정재승 : 주목할 만한 책들을 많이 쓰셨습니다. 독자도 많으시고요. 어떻게 공부하고 책을 쓰시게 되었는지요. 독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는 국문과로 가셨죠.
고미숙 : 제일 얘기하기 싫은 부분이에요. 숨기고 싶은 건 아니고요. 독문과를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20대를 허무하게 보냈다는 걸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에요. 들어간 이유는 그야말로 썰렁합니다. (웃음) 처음엔 어문계열로 들어갔어요. 입시지옥을 거쳐 대학에 갔죠. 대학에선 뭔가 근본적인 학문인 동양사상을 해야지 생각하다 중문과를 가고 싶어했어요. 자연스럽게 어문계열로 갔죠.
그렇게 1학년을 다니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데 80% 이상이 영문과를 갔어요. 저는 중문과를 가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반색을 하셨어요. “너 혹시 외교관 자식이냐?” 이러고 보니 광부의 자식인거죠. (웃음) 그때 저는 한문을 배워야 근본적인 질문이 해결된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절인연이 맞지 않아서인지, 뭔가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없었어요. 국문과는 생각 안 했고, 그러다 선택한 게 독문과였어요. 얼떨결에 간 거죠. 졸업할 때까지 20대를 허망하게 보냈죠.
정재승 : 구체적으로, 그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한데요.
고미숙 : 독일어에 대한 열정이 있긴 했어요. 그런데, 욕망이 겉돌았어요. 80년대 운동권이 학교를 지배하던 때였죠. 학생운동도 못하고, 고민은 실존적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였어요. 도서관에 가도 욕망이 겉돌았어요. 독문과는 모두 원로 선생님들이 계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수업시간에 긴장감이 없었어요. 서클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80년대를 저처럼 맹하게 보낸 청춘이 없을 걸요.
20대는 꿈을 모색하는 기간… 나도 맹하게 보냈다
정재승 : 지금 학생들도 비슷한 고민을 해요. 고등학교 때 얻은 정보만으로 학과를 선택하고요. 비슷한 고민을 하는 청춘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시겠어요.
고미숙 : 저 나름대로는 비 제도권에 머물렀어요. 종교단체도 갔고 여러 네트워크를 했습니다. 교파를 떠나자! 하는 초교파 운동 같은 것도 했고요. 소박한 모임이었죠. 아무튼 끊임없이 접속을 시도했어요. 그러면서 4학년 때 어떤 결론을 내린 것 같아요. 10대 20대의 꿈은 확실하지 않아요. 분명하다면 가짜죠. 그걸 모색하는 기간이 청년기에요. 그러기 위해선 꼭 사람을 만나야 해요.
지금 청춘을 보면 사람을 안 만나요. 너무 위험해요. 사람이 귀하다는 걸 몰라요.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때문에 중, 고생을 자주 만났는데 그때마다 사람을 만나라고 했어요. 그래야 생각이 깨지고 뭐가 오죠. 사람에게 필요한 건 정말 사람 밖에 없어요. 『동의보감』 공부 하면서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러면 저처럼 인생역전은 좀 됩니다. (웃음)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그린비, 20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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