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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속아 정글속으로 내몰린 일본인들 - 『와일드 소울』

패배가 예정된 싸움, 거대한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소수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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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에토는 일본 정부에 항의하기로 결심하고 도시로 떠난다. 겨우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지만 영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비참한 실태를 본국에 알리려는 계획이 실패한 에토는 악착같이 일하여 성공을 거두어 10여년 만에 마을로 돌아간다. 하지만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었고, 친구의 아들 케이만이 원주민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들이 참 많다. 전철에서 새치기를 당한다거나 가게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정도의 사소한 것들부터 사기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거나 열심히 일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회사에서 내몰리는 등 가슴이 찢어지는 억울함까지. 그 중에서도 압권은, 억울함을 하소연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가 아닐까.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 처했을 때. 특히 거대 기업과 정부 그리고 사기꾼들이 그런 불공정, 불공평함을 잘 이용한다. 개인에게 불리한 조건이나 계약 등을 강요하고 되도록 책임은 피해가면서.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느니,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등등 핑계를 대면서.

 

가키네 료스케의 『와일드 소울』에서 브라질에 이민간 일본인들이 처한 상황이 딱 그것이다. 2차 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한국전쟁이라는 특수가 있었음에도 전쟁에서 패한 후유증은 너무나도 컸다. 일본 정부는 브라질 정부에 요청하여 이민자를 보내기로 약속한다. 경작된 농토와 집을 주고, 삼모작까지 가능한 천혜의 자연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꿈에 젖어 이민을 결정한다. 마침내 1960년대 초반, 4만 여명의 일본 이민자들이 브라질 밀림으로 향한다.

그러나 엉터리로 진행된 이주 계획은 사기였다. 외무부 직원은 승진하기 위해서, 알선 업체는 돈을 벌기 위해서, 순진한 농민들을 아무 것도 없는 정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무상으로 주어진 땅과 집은 있었다. 하지만 땅은 강산성이었고, 우기가 되면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풍토병이 돌면 수십 명씩 죽어나갔다. 밀림의 과일과 물고기로 연명한다 해도, 학교 등 기반시설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낙원이 아니라, 정글의 지옥이었다. 일본 정부는 4만 여명의 국민을 밀림 속으로 방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밀림에서 원주민처럼 살아가거나, 밀림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빈민으로 살아가거나 뿐이었다. 하지만 밀림을 빠져나오는 것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풍토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에토는 일본 정부에 항의하기로 결심하고 도시로 떠난다. 겨우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지만 영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비참한 실태를 본국에 알리려는 계획이 실패한 에토는 악착같이 일하여 성공을 거두어 10여년 만에 마을로 돌아간다. 하지만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었고, 친구의 아들 케이만이 원주민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에토와 케이가 짐승처럼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 때, 일본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일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에토는 결심했다. 우리를 버린, 우리를 속이고 죽음으로 내몬 그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와일드 소울』은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1장은 에토의 일대기를 그린다. 그들이 왜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내몰렸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1장을 읽고 나면, 에토와 케이의 복수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진다. 그들이 피해자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책임자들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꼴이 너무나 화가 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이 없고, 국가를 위해서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인간, 조직을 보면 너무나도 짜증이 난다. 가키네 료스케는 그런 조직형 인간들을 질타한다.


1966년생인 가키네 료스케는 이런저런 회사를 다니다가 2000년 『오전 3시의 루스터』 로 산토리 미스터리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4년 세 번째 작품인 『와일드 소울』이 오오야부 하루히코상, 요시카와 에이지 신인상,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을 받았고 다음 작품인 『너희에게 내일은 없다』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받았다. 나오키상은 받지 못했지만, 대중적인 문학에 주는 웬만한 상은 다 받은 셈이다. 『너희에게 내일은 없다』는 해고전문회사의 직원이 구조조정 대상인 직원들과 면담하며 벌어지는 이야기고, 『히트 아일랜드』는 거리의 청년들과 폭력조직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그린 액션 소설이다. 가키네 료스케는 본격추리보다는 인간 군상의 다사다난한 풍경과 액션을 그려내는 ‘모험 소설’ 작가쪽이라고 할 수 있다.

가키네 료스케의 유명한 취미 중 하나는 비 앵글로색슨계 나라들을 여행하는 것이다. 즉 미국과 영국, 유럽 국가 일부는 제외하고 주로 남미와 아프리카 등을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소재로 담은 『와일드 소울』에서도 브라질을 묘사한 장면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브라질과 일본을 비교하며 풍자하는 시선도 예리하다. 이를테면 브라질인들은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만, 일본인들은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면서 아닌 척 한다는 것. 일본은 선진국이 되었지만, 사람들도 과연 그만큼 자유롭고 진정한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을 『와일드 소울』은 던진다. 다소 낭만적인 시선도 비치지만, 팍팍한 도시의 일상에만 젖어 있는 사람에게 브라질의 훈풍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다. 모든 것을 합리적 이성과 효율로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삼바 음악처럼 내키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 케이를 사랑하게 된 여인의 흔들리는 마음처럼, 『와일드 소울』의 브라질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에토와 케이의 복수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그토록 삭막하게 만든 이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자들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모순을 아무리 고발해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세상에는 인정된 범죄보다, 인정되지 않은 만행들이 더욱 많다. 그런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을 받을 수도 없고, 사과를 받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끊임없이 호소하고, 청원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까? 가끔은 이 세상에, 정당한 폭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국가에 대한 폭력적인 저항 같은 것. 전경을 때리는 게 아니라, 국가에 정면으로 맞서는 어떤 방법 같은 것들.

물론 폭력은 나쁜 것이다. 그건 진실이지만, 때로는 필요악도 존재한다. 모든 폭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폭력이 무엇인지를 가릴 줄 아는 눈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에토와 케이의 행동에 대해서 ‘테러’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원칙이 있다. 무고한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라는 전제. 타겟을 정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무고한 불특정 다수를 희생시키지 않는 것. 그렇다면 정당한 테러가 성립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일제 시대의 안중근 의사를 생각해보자. 한일합병의 책임이 있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한다. 그것은 강자인 일본의 입장에서는 테러라고 부르겠지만, 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호소할 방법조차 없는 조선인에게는 유효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입장에서 의거가 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요즘에는 한국에서조차 안중근과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테러가 반드시 없어져야 할 행동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테러와 함께 사라져야 할 것은 전쟁이다. 강대국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전쟁, 힘으로 위협하여 약소국이나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희생시키는 상황이 존재하는 한 테러 역시 사라질 수가 없다. 『와일드 소울』의 복수 역시, 거대한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소수의 저항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공인된 범죄가 아닌 ‘공적인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운 국가나 기업의 만행에 복수하는 것은,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다. 그래서 『와일드 소울』의 에토와 케이를 보고 있으면, 처절하고 슬프다. 복수를 한다 해도, 여전히 국가는 다시 법적으로 허락된 범죄를 저지를 것이니까.

그렇다면 유일한 도피처는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케이에게는 돌아갈 브라질이 있었기에, 『와일드 소울』은 완벽한 하드보일드가 될 수 없었다. 국가에 대한 복수는 결코 낭만적인 도취가 아니다. 그건 최후의 비명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에게 도피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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