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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자격: 고씨 부자의 유럽 42일 생존기 고형욱,고창빈 공저 | 사월의책 |
아빠와 아들, 절친이 되다! 대책불가 사춘기 아들을 변하게 한 아빠의 고군분투기 요즘 아빠는 돈 버느라, 아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 보는 게 전부이고, 가족 간의 대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대로 괜찮을까? 아빠는 결심한다. 사춘기 아들을 위해 선물을 해주기로! 바로 아빠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이었다. 그것도 42일간의 긴 서유럽 일주. 1,000시간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다 보면 아들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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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행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어느 뮤지컬을 볼지 고민했다. <맘마미아>는 한물갔고 <빌리 엘리어트>는 서울에서도 공연을 해서 당기지가 않았고 <위치>는 다른 여행자들이 재미없다는 바람에 접었다. 요즘 가장 인기가 높은 공연은 <워 호스>라고 한다. 모두의 강력 추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화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런던의 마지막 저녁을 확실한 공연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티켓을 끊으러 레스터 광장으로 나갔다. 티켓 부스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처음 들린 곳에서는 벌써 매진이라고 한다. 이거 큰일이네. 다른 부스로 들어갔다. 여기 직원도 매진되었다는 얘기를 하더니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한다. 극장 쪽에 알아보는 모양이다. 티켓 부스 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말 한 마리가 보인다. <워 호스> 포스터다. 잠시 있으니 직원이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티켓을 구했다고 한다. 휴,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갔다. 세 번째 오니 창빈이도 자유자재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느꼈던 것들을 내셔널 갤러리에서도 똑같이 느끼게 된다. 이렇게 몇 군데 장소를 반복적으로 집중 공략하니까 거리감이 사라진다. 오늘은 무슨 그림을 자세히 보여줄까. 그래, 베르메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두 점의 베르메르 그림을 보았고 내셔널 갤러리에도 두 점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다시 여행을 온다면 그곳은 런던은 아닐 것이다. 유럽에 온다고 해도 이번에 방문하지 않은 도시로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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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 로비 | |
베르메르를 본다는 것은 다음 여행에 대한 준비이자 기약이기도 하다. 빈에 가면 <회화의 알레고리>를 볼 테고 암스테르담에 간다면 <델프트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베를린에 가면 진주귀고리 소녀의 맑은 눈동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의도적이다. 다음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해주는 것. 나중에 커서 혼자 여행할 수 있도록.
런던 도착 나흘 만에 대영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내셔널 갤러리가 아니라 대영박물관에 더 자주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박물관에는 미술품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다채로운 전시품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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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 앞에서 창빈이. | |
BBC 방송과 대영박물관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100대 유산을 선정해서 번호표를 붙여놓았다. 흩어져 있는 유물들을 찾아 탐험에 나섰다. 넓은 박물관에서 선정된 유물들을 하나하나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마치 낙동강에서 오리 알 찾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나씩 찾아 구경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유물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창빈이 학교 친구들이랑 다 같이 모아놓고 보여주면 정말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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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바꾼 100대 유산 중 1번으로 선정된 이집트의 유물. 헤누트메히트의 금박 내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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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레이드 기념관. 신전 한 채를 완전히 옮겨와서 다시 복원했다. 대영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 | |
100대 유산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도깨비기와다. 이렇게 한 점이 100대 유산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한국관은 썰렁하다. 한옥 한 채를 옮겨다 지어놓았고 도자기며 병풍, 불상, 항아리 등이 있지만 일본관이나 중국관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런던에 오면 누구나 방문하는 대영박물관. 여기에 우리나라 정부가 투자를 해서 더 좋은 공간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현재의 한국관은 우리나라의 개인 사업가가 투자를 해서 이 정도를 갖춰놓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관을 보여주면서 자부심도 들지만 동시에 씁쓸하기도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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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도깨비 기와.실크 로드와 관련해 고대 문명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선정된 모양이다. | |
땅거미가 질 무렵 <워 호스>를 보러 갔다. 작지 않은 극장인데도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니까 좁아 보일 정도로 관객들이 많다. 현재 런던에서 티켓 구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얘기가 농담이 아니다. 의자에 앉아서야 이 작품이 뮤지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 이거 뮤지컬 아니고 연극이네?”
“영어로 하는 연극?”
“그러게 말이다. 아빠도 아무 생각 없이 뮤지컬이겠거니 했는데 연극이네.” 노래가 아니라 대사를 들으면서 두 시간을 보내야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카탈로그를 사서 열심히 뒤졌다. 스토리 라인을 읽어보고 창빈이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왔다가 뒤늦게 호들갑이다. 연극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시골 소년과 말의 우정에 관한 내용이다. 그나마 공연 시작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으니 다행이지.
불이 꺼지자 극?에는 새들이 날아다녔다. 배우들이 장대 끝에 새를 매달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굴렁쇠를 굴리듯이 쇠막대를 밀면 오리가 달려간다. 처음에는 유치해 보였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이런 장치들조차 감정이입이 된다. 말은 세 명의 배우가 안에 들어가서 움직인다. 극이 진행될수록 배우들은 안 보이고 말의 감정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인형극의 활용이나 연출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 때문에 헤어진 말 조이를 찾아서 어린 나이에 입대한 주인공 앨버트는 천신만고 끝에 죽을 뻔한 조이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따뜻하면서도 감동이 넘치는 드라마였다. 영어 듣기 때문에 고민했지만 창빈이는 웃다가 진지해졌다가 하면서 <워 호스>에 푹 빠져 있다. 수준 높은 영국의 무대 예술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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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무대인사를 하러 나온 배우들. | |
내셔널 갤러리도 좋고 대영박물관도 좋지만 여행은 도시의 현재를 보아야 한다. 런던에서는 축구와 뮤지컬, 연극까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재래시장도 도시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마드리드의 투우, 리스본의 파두, 그라나다의 플라멩코, 베네치아의 콘서트… 이런 것들이 여행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준다. 과거의 유물들과 함께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는 것, 그런 것이 진짜 여행이 아닐까. <워 호스>를 보는 창빈이의 표정을 보면서 여행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