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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자격: 고씨 부자의 유럽 42일 생존기 고형욱,고창빈 공저 | 사월의책 |
아빠와 아들, 절친이 되다! 대책불가 사춘기 아들을 변하게 한 아빠의 고군분투기 요즘 아빠는 돈 버느라, 아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 보는 게 전부이고, 가족 간의 대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대로 괜찮을까? 아빠는 결심한다. 사춘기 아들을 위해 선물을 해주기로! 바로 아빠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이었다. 그것도 42일간의 긴 서유럽 일주. 1,000시간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다 보면 아들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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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 미술관의 회랑.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하루 종일 늘어서 있다 | |
파리의 루브르,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마드리드의 프라도 등과 더불어 우피치는 서유럽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은 ‘우피치 데이’로 정했다. 오전 내내 우피치 미술관에서 르네상스의 숲속을 산책하기로 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그런데 막상 보여주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학생들 같은 경우도 사전 준비를 하지 않고 우피치 미술관에 오면 무얼 봐야 할지 모른다. 이 그림이 그 그림 같고 그 그림이 저 그림 같다. 르네상스가 유럽 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고대 로마는 영화나 만화에서도 자주 다루었지만 르네상스에 관한 이야기들은 청소년용이 거의 없다.
자주 와서 보면 좋겠지만 그러기도 어렵다. 이탈리아에서는 미술관 입장료도 만만치 않거니와 학생 할인 혜택도 거의 없다. 브레라 미술관에서 느낀 답답함이 우피치 미술관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혼자 다닐 때는 피렌체가 정말 좋았지만 아들과 같이 다니니 비싼 물가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너무 비싸다!
전시실을 차례대로 보여주긴 하지만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고민의 강도는 더 커진다.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예술세계를 이해하려면 중세의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맥락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단순하게 그리스 신화를 조금 안다고 해서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먼저 보티첼리의 방으로 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인 「비너스의 탄생」은 어디서나 복제화를 볼 수 있다. 진품을 본다는 감동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그것은 아는 게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아이들에게는 똑같은 그림, 흔한 그림이 한 점 더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감동은 아는 만큼 느낄 수밖에 없다. 갑자기 보티첼리의 아름다운 그림이 난해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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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 |
보티첼리의 방을 지나 다빈치의 방으로 건너갔다. 피렌체가 다빈치의 고향이나 다름없고 그가 피렌체에서 도제 생활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면 다빈치의 소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아는 다빈치란 루브르에 있는 「모나리자」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알려진 「암굴의 성모」 아닌가. 자신이 없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창빈이가 더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과 창빈이 사이에 무언가 거리감이 있다.
다빈치의 방을 지나서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건너편 날개로 넘어갔다. 미켈란젤로의 「성가족」을 본다. 이미 「천지창조」를 본 창빈이에게 자그마한 원형 그림이 눈에 들어올까? 라파엘로의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을 본다. 이미 바티칸에서 「아테네 학당」을 봤는데 마음에 찰까? 게다가 바티칸과 팔라티나 미술관에 널려 있는 게 라파엘로가 아니던가.
문화적인 다양성과 깊이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중학생에게 보여주기에는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상파 화가들은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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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가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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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 | |
교과서가 만들어내는 선입견도 있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이 미술 교과서의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왜 많은 관광객들이 피렌체를 반나절 코스 정도로 관광만 하고 그냥 지나쳐 갔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복도 끝에 있는 「라오콘」 군상 복제품을 보고 메르카토 누오바의 멧돼지 조각 원본도 보고 카페테라스에 앉았다. 멀리 두오모의 돔이 보인다. 차라리 우피치 미술관보다 시내 풍경을 보여주는 게 더 나을까? 그게 아니면 오히려 토스카나의 풍요로운 자연과 식탁을 즐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른 그림들은 전부 피티 궁전에 대여해주었지만 우피치 미술관에도 카라바조의 작품 한 점은 남겨두었다. 「메두사」다.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메두사의 모습을 원형 방패에 그려놓았다. 평소에는 벽 쪽에 걸어두지만 이번 특별전에는 유리로 만든 장식대 안에 넣어 모든 면을 다 볼 수 있다. 그래도 창빈이한테는 「메두사」가 가장 신기한 모양이다.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라 입체적이니까. 아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카라바조가 처음으로 볼거리를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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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메두사’ | |
우피치 미술관은 이 정도로 끝내자. 더 깊이 들어가려고 했다가는 아빠와 아들, 둘 다 너무 힘들 것 같다. 피렌체에 남아 있는 카라바조의 마지막 한 작품이 있다는 빌라 바르디니에 가기로 했다. 같은 이름의 갤러리도 있고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건물도 있어서 한참을 찾아 헤맸다. 빌라 바르디니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미켈란젤로 언덕 정도 높이의 비탈길을 등산하듯이 걸어 올라갔다. 언덕 꼭대기에 카라바조의 「도마뱀에 물린 소년」으로 만든 플래카드가 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다.
관람객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피렌체의 웬만한 데는 다 안다고 자부하던 나 역시 처음 와 보는 장소다. 골목 자체가 처음 들어와 보는 길이다. 중턱쯤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살았던 집도 있다. 빌라 바르디니는 사설 미술관이다. 그림 하나를 보는 데 관리 직원만 세 명이 딸려 있다. 우리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안내를 해준다. 그림을 볼 때도 우리 옆에 조용하고 우아하게 서 있는데 마치 유령이 옆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음이 편치 않을 정도로 과잉 친절이다. 내부 사진을 찍는다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다.
카라바조의 「도마뱀에 물린 소년」과 카라바조의 화풍을 따른 후계자들의 그림 몇 점이 빌라 바르디니에서 소장하고 있는 중세 미술 컬렉션의 전부였다. 겨우 이걸 보러 올라왔나? 규모에 실망하고 있던 차에 관리 직원이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다른 쪽 통로로 안내해준다. 그러곤 테라스로 데려갔다.
전망이 정말 아름답다. 두오모의 장밋빛 지붕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보인다. 레너드 코헨 콘서트를 했던 산타 크로체 광장도 바로 앞에 있다.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미켈란젤로 언덕과는 또 다른 절경이다. 이왕 피렌체의 경치를 즐기기로 했으니 두오모에도 올라가기로 했다. 아르노 강 남쪽에서 경치를 봤으니 시내 중심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면 창빈이도 피렌체가 얼마나 예쁜 보석 같은 도시인지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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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에서 바라본 메디치 예배당과 중앙시장 | |
“너 혹시 『사랑과 열정 사이』 알아?”
“몰라. 왜?”
아, 중딩은 아직 이 소설을 모르나?
“안 읽었니?”
“뭔데? 소설이야?”
“아니다, 그냥 올라가자.” 숙소에서 여자 여행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게 영화 < 사랑과 열정 사이 >를 찍은 코스였다. 많은 여성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소설이라 그 로케이션 현장을 보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특히 두오모의 463계단을 걷고 싶은가보다. 서울에 돌아가면 창빈이에게 한번 읽혀봐야겠다. 피렌체에 대한 흥미를 심어주기엔 적당하니까.
두오모엔 한 10년 만에 올라가는 것 같다. 아들 덕에 경치 좋은 곳은 다 보고 있다. 혼자 왔으면 귀찮아서 안 올라갔을 텐데 말이다. 운동 삼아 걷는다. 중세에 지어진 교회라 계단은 무척이나 좁았다. 올라가지 못하고 종종 교통체증이 벌어지기도 한다.
창빈이는 전망 좋은 곳에 올라가는 걸 좋아한다. 씩씩하게 걷고 있다. 누구나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경치 좋은 곳에 올라가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던가. 피렌체의 중앙에서 사방을 바라본다. 바르젤로 옆으로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도 보인다. 손가락으로 빨래가 걸려 있는 옥상까지 가리키면서 설명해줬더니 창빈이는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정도까지 구분할 수 있다면 피렌체가 얼마나 아담한 도시인가. 두오모에서 내려다보면 옆집 숟가락 숫자도 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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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상징. 웅장한 두오모 | |
저녁식사는 피렌체에 오기 전부터 미리 예고를 해두었다. 진짜 피렌체다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식당에 갈 거라고. 하도 뜸을 들였더니 도대체 어디기에 아빠가 큰소리를 뻥뻥 칠까 하는 눈치다. 일 라티니. 언제 가도 제대로 먹는다는 느낌이 드는 집이다. 피렌체의 명품 스테이크 비스테카를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는 식당이다. 언제나처럼 일 라티니 앞에는 문을 열기 전부터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창빈이는 황당한 모양이다.
“외국에서도 이렇게 줄 서는 집이 있어?”
“아마 여기가 피렌체에서 젤 인기가 높을걸!”
“그래도 유럽에서 줄 서서 먹는 집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맞아, 여긴 예약도 안 받아. 그러니까 다들 와서 기다리는 거지.” 일 라티니는 손님들이 오는 순서대로 완행열차처럼 같은 의자에 옆으로 앉힌다. 창빈이 왼쪽 옆에는 중년의 호주 남자가 오른쪽에는 젊은 이탈리아 여자가 같이 앉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손님들이 한 테이블에 앉는다. 잔칫집에 온 사람들처럼 떠들고 있는데 스테이크가 나왔다. 순간 침묵. 고기 두께를 본 창빈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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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라티니 입구. 천장에 프로슈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큼직한 고기를 보며 흐뭇해하는 창빈이. | |
저 만족스러운 웃음이라니. 치사한 녀석, 맛있는 게 나오면 저렇게 순수한 웃음을 짓는다. 칼질 하는 속도 봐라! 엄청난 크기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하는 아들의 힘찬 모습. 평소에 저런 표정과 속도로 여행을 다녀주면 얼마나 좋을까. 황소가 투우사에게 달려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것 같다. 아, 우리 아들! 정말 잘 먹는다. 그 큼직하던 스테이크가 뼈만 남았다.
“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니!” 저 포만감. 식당에서 처음으로 그런 대답을 들은 것 같다. 어디서 뭘 먹든지 살짝 모자라다는 표정이었는데 말이다. 처음으로 양식을 양껏 먹인 것 같다. 창빈이가 한참 먹을 때 보면 혼자 고기 4~5인분은 거뜬히 해치우는 것 같던데, 오늘 나온 스테이크가 혼자 그 정도 양은 된다. 다른 데서도 괜찮다는 표정 정도는 지었지만 오늘처럼 배가 불러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다. 가끔은 한 끼 식사가 모든 걸 바꿔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피렌체의 밤거리가 오늘따라 더 시원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