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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과 하얀 개」이 그림을 보면 더 슬퍼지는 이유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Tate Britain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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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듯이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을 본다. 그의 그림은 유쾌하다. 당대 상류층의 위선을 시원하게 까발리기 때문이다.


런던의 어느 고서점에서 오래된 테이트 갤러리 도록을 산 적이 있다. 1969년 판이라 흑백과 칼라사진이 섞여있는 책이다. 도록을 보면서 옛 테이트 갤러리 풍경은 어땠을까 하는 회상에 젖어본다. 아마도 지금과는 무척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오래 전 테이트 갤러리에서는 영국 미술품은 물론이요, 외국 작품들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현재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하고 있는 피카소 그림들도 테이트 갤러리의 소장품이었다. 지금도 외국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그 숫자는 무척 적다. 그래서 테이트 갤러리에 가면 무척이나 영국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전경

원래는 테이트 갤러리(The Tate Gallery)였지만, 지금은 테이트 브리튼으로 불린다. 2000년 테이트 모던이 문을 열면서 명칭이 바뀌었다. 테이트 모던은 공장을 리노베이션 했고, 테이트 브리튼은 밀뱅크 감옥을 개조했다. 런던을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 흉물이 되어버린 건축물들을 미술관으로 바꾸었다. 테이트 미술관은 그런 시도의 원조 중 하나다. 서울도 국군 수도병원이 국립미술관 분관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논란이 많은 당인리 발전소 같은 건물도 문화 시설로 바뀔지 궁금하다.

템즈 강에 인접해 있다 보니 테이트 브리튼은 수해를 입은 적도 있었다. 다행히도 미술품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2차 대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에서 도버해협을 건너온 비행기들이 런던 폭격을 감행했을 때도 테이트 갤러리는 무사했다. 작품들은 안전한 창고로 옮겨서 보관되었다.

테이트 브리튼으로 가다 보면 약간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버스를 타거나 튜브(지하철)를 타고 가면 꽤 걷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예 날을 잡아서 테이트 모던과 연이어 보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렇게 보면 영국 미술사를 한눈에 바라보는 것 같다. 거기에 보너스가 있다. 두 미술관 사이를 이어주는 셔트 보트를 타고 템즈 강의 낭만까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탬즈강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터너와 라파엘 전파의 작품들을 빼놓고 테이트 브리튼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터너는 천여 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방대한 터너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서 증축한 건물은 클로어 갤러리로 불린다. 1987년에 완공된 건물로 터너의 일생의 작업을 볼 수 있다.

미술관 앞에는 라파엘 전파를 대표하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동상이 서 있다. 개인적으로 라파엘 전파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림들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탐미적이지만 거기에는 무언가 모를 퇴폐와 허무함이 비친다. 과도한 아름다움 때문일까. 그와 정반대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추한 그림들도 있다. 이처럼 미추(美醜)가 강렬하게 교차하는 공간에 있으면 잠시 현기증이 인다. 두 가지 극단적인 표현이 모두 예술가들의 격렬한 내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테이트 브리튼은 영국 미술에 관한 한 최고임을 자부하는 곳이다. 뻣뻣한 영국 신사의 자존심마냥 자기네 미술의 권위를 다른 나라에 내줄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날로 확장되고 있는 테이트 갤러리 네트워크의 중심이기도 하다. 테이트 모던,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를 이어주는 핵심에 테이트 브리튼이 위치하고 있다. 영국 고전에서 20세기 미술까지 아우르면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작품을 감상하고 밖으로 나오면 템즈 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 이곳이 바로 런던이구나 하는 느낌이 밀려온다. 런던 풍경을 그렸던 터너와 휘슬러의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테이트 브리튼은 런던에서도 가장 영국적인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 윌리엄 호가스(1697~1764)의 「거지 오페라」

윌리엄 호가스, 「거지 오페라」
(A Scene from 'The Beggar's Opera' VI), 1731, 51*61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듯이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을 본다. 그의 그림은 유쾌하다. 당대 상류층의 위선을 시원하게 까발리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존 게이의 오페라 「거지 오페라」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노상강도를 재판하는 귀족들을 통해서 그들의 허위의식을 조롱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 연극을 통해서 상류층과 하류층의 생활 방식이 알고 보면 유사하다는 점을 목격하셨을 것입니다.” 번지르르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의 행태도 속을 알고 보면 위선덩어리이기는 매한가지다. 노상강도는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팔짱을 끼고 뻔뻔하게 서 있다. 오히려 여인들이 애원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귀족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윌러엄 호가스의 그림은 통쾌함이 있다.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과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2.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노햄 성, 일출」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 「노햄 성, 일출」
(Norham Castle, Sunrise), 1835/40, 122*90.8

터너의 그림을 보면 모네의 그림이 떠오른다. 터너는 낭만적이었지만,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하기 전에 가장 인상파다운 그림을 그렸다. 터너의 그림 앞에 서면 때로 눈이 부시다. 특히 「노햄 성, 일출」이 그러하다. 빛이 폭발하는 것 같다. 멀리서 노랗게 터지는 햇살을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힘들 정도다. 아침 태양이 세상을 환하게 만든다.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해 세상의 형체는 분간하기가 어렵다. 푸른 그림자처럼 우뚝 서 있는 성채가 있고, 산이 펼쳐져 있다. 언덕과 말 두 마리. 세상은 온통 태양의 황금빛으로 물들어있다. 붓질은 감정적이고 격함이 느껴진다. 빛으로 인해 대기가 요동치는 것 같다. 터너가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빛에 빠져 들어간다.


3.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1828~1882)의 「수태고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수태고지」(Ecce Ancilla Domini! or The Annunciation), 1849/50, 72*42

수많은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그렸다. 프라 안젤리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엘 그레코 등이 같은 주제를 화폭에 담았다. 모두 이상화시킨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로제티의 그림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마리아의 표정은 망설이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처녀의 입장에서 천사의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처녀의 몸으로 메시아를 잉태하는 것이다.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하얀 옷을 입은 마리아에게 흰 백합을 건네주고 있다. 순결함이 더욱 순결하다. 공간은 온통 하얗다. 별다른 꾸밈이 없다. 그림 자체도 평면적이다. 원근법적이지 않은 공간이 미묘한 매력을 던진다. 그러나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는 엄청난 혹평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 시선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로제티나 그림 속의 마리아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보고 있으면 울림이 느껴진다.


4.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오필리아」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Ophelia), 1851/2, 76*112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순간이다. 낭만성과 비극성이 결합되어 숭고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면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같지 않을까 싶다. 셰익스피어를 멋있게 재현해낸 영화는 많다. 셰익스피어의 많은 글은 본질적으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체 중의 한 순간만을 잡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어느 한 순간을 가장 잘 포착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햄릿의 연인이었던 오필리아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아름답기 때문에 더더욱 슬픔을 자아내는 그림이다. 완전히 버림받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밀레이는 영국의 자연을 누구보다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오필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녀의 죽음은 더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그림의 사실성과 작가의 시적이 상상력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보고 나서도 오랜 여운이 남는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아름다운 죽음의 순간이 머리 속에 새겨져 떠나지 않는다.


5. 존 에버렛 밀레이의 「부모의 집에 있는 예수」

존 에버렛 밀레이, 「부모의 집에 있는 예수」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 1849/50, 86.4*139.7

이 그림은 참 불편하다. 뭔가 하다 만 것 같은 어색함이 있다. 열심히 꾸몄는데도 서투른 것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이고 볼품도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답답함에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 처음 보면 전혀 예수의 삶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인물들을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가슴이 사무치게 아프다. 어린 예수는 손바닥에 상처를 입었다. 성모는 세파에 지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아줌마 같다. 나이에 비해 깊은 주름살, 메마른 듯한 광대뼈,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아픔을 달래주려 자기 뺨을 아들의 뺨에 갖다 대고 있다. 요셉은 한 손은 어깨에 얹고, 한 손으로는 가볍게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상처를 보려 하고 있다. 그 옆에 요한이 물을 갖고 온다. 어떡할 줄 모르는 그의 눈빛을 보면서, 살짝 놀라 뒤로 물러선 적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런 감정이 든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보면 볼수록 답답하고 슬픈 애정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6.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의 「샬롯의 아가씨」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샬롯의 아가씨」
(The Lady of Shallot), 1888, 200*153

그녀의 표정은 슬픔을 넘어서 절망이다. 하지만 그런 막막함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배에 올랐다. 샬롯의 아가씨는 태어날 때부터 어두운 탑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 그녀가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은빛 갑주를 입은 랜슬롯을 보고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그녀가 탑을 떠난다는 행위는 목숨을 내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강을 따라 랜슬롯이 있는 캐멀롯으로 향한다. 그녀는 사랑을 향해서,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랜슬롯을 만나도, 그녀는 창백한 주검이 되어서 만날 것이다. 그러니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샬롯의 아가씨와 똑같은 절망을 느끼게 된다. 사랑을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버드나무 잎들 나부끼고, 포플라도 떤다.
캐멀롯으로 흘러내리는
강 한가운데 있는 섬 가를
영원히 흐르는 물결 위로
산들바람이 어두워지며 떤다.”


그녀의 운명을 노래한 테니슨의 시(詩)다.


7. 프랭크 캐도건 카우퍼(1877~1958)의 「루크레시아 보르지아」

프랭크 캐도건 카우퍼, 「루크레시아 보르지아」(Lucretia Borgia Reigns in the Vatican in the Absence of Pope Alexander XI), 1908/14

프랭크 캐도건 카우퍼는 흔히 ‘최후의 라파엘 전파 화가’로 불린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라파엘 전파의 시대는 끝났고 유행이 지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우퍼는 과거의 화려함에 마지막까지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루크레시아 보르지아의 일화는 하나의 스캔들 같은 사건이었다.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난 루크레시아는 교황의 자리에서 만남을 거행하고 있다. 두 명의 귀족이 루크레시아의 드레스를 잡고 있고, 프란체스코회의 수사가 그녀의 신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바티칸에 있는 이 접견실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핀투리키오가 장식한 것이다. 추기경들이 모습도 카우퍼가 실제 초상화를 참고해서 그렸다. 한가운데 모든 것을 조롱하는 것 마냥 원숭이 한 마리가 루크레시아의 발치에 앉아있다. 파란 사과를 손에 쥐고. 화려한 코미디의 순간이 멈춰선 듯하다.


8.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의 「파랑과 은색의 야상곡, 첼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파랑과 은색의 야상곡, 첼시」
(Nocturne: Blue and Silver- Chelsea), 1871, 50.2*60.8

휘슬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차분해진다. 어쩌면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을 듣는다는 게 더 어울리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의 음악이 잔잔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휘슬러는 ‘음악은 소리의 시이며, 미술은 시각의 시이다’라고 생각했다. 음악과 미술이 지닌 추상적인 표현은 본질적으로 닮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템즈 강에서 첼시를 바라본다. 어두운 밤은 푸르르다. 거기에 은색 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강물에 비친 불빛은 피아노 건반 같다. 쇼팽이라면 자신의 야상곡 중에 어느 곡을 연주했을까. 템즈 강의 물결은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거기에 빛이 떨어진다. 미술은 음악이 된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색채의 음악이 잔잔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9.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의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개의 습작」

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1944

베이컨의 그림은 끔찍하다. 그는 회화의 괴물이다. 그는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난 후 그림이 맘에 들지 않으면 다 때려 부숴버리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는 절망을 느꼈다.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고, 기괴한 형상을 한 것들이 출구가 없는 빨간 방에 갇혀 있다. 그들은 절규하고 고함지르고 고통을 받고 있다. 끔찍하다. 이 그림 앞에 서면 할 말을 잃고 침묵 속에 빠져들게 된다. 고통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시대의 아픔을 잊으려던 사람들은 이 그림 앞에 서지 말기를.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행한 것임을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용한 미술관에서 피조물의 고통스러운 외침 소리가 들려온다.


10. 루시앙 프로이드(1922~2011)의 「여인과 하얀 개」

루시앙 프로이드, 「여인과 하얀 개」(Girl with a White Dog), 1951/52

현대를 산다는 것은 불안한 것일까. 그림 속의 여인을 보고 있으면 그 큰 눈에 불안이 스며있다. 한쪽 가슴을 들어낸 허전함을 달랠 수 없는 것일까. 가슴에 손을 얹으니 그 빈자리는 더욱 커 보인다. 그림 속의 여인은 루시앙 프로이드의 첫 번째 부인인 키티이다. 여인의 눈에서 한쪽 가슴을 따라 내려오면 하얀 개의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사선을 따라 눈을 움직이게 된다. 그림 속의 눈과 관람객이 눈이 허공에서 만난다. 「여인과 하얀 개」를 보고 있으면 슬퍼진다. 스산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는 것 같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앙 프로이드가 사망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지난 7월 20일 88세를 일기로 런던에서 죽었다. 그래서일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더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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