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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자격: 고씨 부자의 유럽 42일 생존기 고형욱,고창빈 공저 | 사월의책 |
아빠와 아들, 절친이 되다! 대책불가 사춘기 아들을 변하게 한 아빠의 고군분투기 요즘 아빠는 돈 버느라, 아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 보는 게 전부이고, 가족 간의 대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대로 괜찮을까? 아빠는 결심한다. 사춘기 아들을 위해 선물을 해주기로! 바로 아빠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이었다. 그것도 42일간의 긴 서유럽 일주. 1,000시간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다 보면 아들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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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든 일정을 접었다. 가만히 있기로 한 것은 아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차에 주인장이 물놀이하러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하기에 무조건 오케이 했다. 액상프로방스에서의 물놀이라. 어딘가 모르게 신날 것 같았다. 겸사겸사 창빈이 수영 실력도 볼 수 있겠다. 창빈이는 어릴 때 수영 단체 교습을 받았는데 처음엔 너무나 서툴렀다. 그래서 한두 달 개인교습을 시켰더니 나름대로 폼 나게 수영할 수 있는 솜씨는 된다.
카누를 탈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타야 내려올 수 있는 긴 코스라고 한다. 바쁠 일은 없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이곳은 지나가던 구름이 잠시 쉬고 시간도 잠시 멈추는 프로방스 지방이다. 수영복까지 챙겨 넣고 차를 달렸다. 건넛마을에서 마늘 축제를 한다고 했다. 도착했는데 광장이 조용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마을에 사는 할머니한테 물어보았지만 자기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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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이는 물 속에서 잠수중 | |
주인장의 다른 제안! 인근에 있는 파브르 박물관을 보러 가자고 했다. 창빈이한테 좋은 구경일 것 같다.
“너 파브르 알지? 『파브르 곤충기』 읽었어?” “파브르는 아는데, 『파브르 곤충기』는 읽다 말았는데….” 우리 클 때는
『파브르 곤충기』 정도는 필독서였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렇지 쪾은 모양이다. 그렇게 세리냥 뒤 콩타라는 마을로 갔다. 파브르 박물관이 있다. 정문 옆에 있는 벽에는 파브르가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진이 붙어 있다. 그런데 파란색 대문이 깔끔하게 잠겨 있다. 아침부터 두 군데 모두 허탕이다. 하지만 그다지 아쉬울 건 없다. 시골 유람이니까.
마을 광장에 차를 세우고 파브르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나이 지긋한 양반이 인사를 건넨다. 일요일 아침 미사가 끝난 모양이다. 멋지게 폼을 잡으면서 영어로 인사를 한다. 마을 유지답게. 하우 두 유 두!
“아니! 이 동네에는 웬일로 오셨나?”
“파브르 박물관 보러 왔어요.”
“어디서 오셨나?”
“한국에서요.”
“우리 딸도 뉴질랜드에 유학 가 있는데!” 아무리 시골이지만 뉴질랜드와 한국을 바로 옆 동네처럼 얘기하시는군….
“한국까지는 못 가보고 중국에는 가봤더랬지.” 시골 촌부의 낙낙한 웃음을 본다. 손가락으로 건물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역사를 설명해준다. 유명한 화가가 살았던 곳은 미술관이 되었다는데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화가다. 이 동네에서만 유명한 화가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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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 마을에 있는 파브르 동상 | |
동네 역사에 대해 설명하다가 문을 잠그려는 교회 관리인에게 다짜고짜 문을 열라고 한다. 이 동네까지 왔으면 역사적인 자기네 교회를 꼭 봐야 된다면서 말이다. 파브르 박물관 대신 졸지에 시골 교회 구경을 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 걸린 성화 하나하나까지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시간은 유유자적 흘러간다. 개선문을 스쳐 지나갔다.
“아들, 저것도 개선문이야!”
“어디?”
“저기 보이는 거.”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작아?”
“워낙 오래된 거니까 그렇지. 저 개선문도 로마시대에 지어진 거야.” 파리의 개선문을 보기도 전에 바르셀로나에 이어 두 번째 개선문이다. 그런 걸 보면 파리는 정말 대단한 도시다. 개선문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럽에는 엄청나게 많은 개선문이 있다.
아예 점심을 먹고 유원지로 가기로 했다. 샤토뇌프 뒤 파프 마을에 있는 아담한 레스토랑 베르제 뒤 파프에 갔다. 식사는 일인당 29유로다. 주인장에게 우리가 쏘기로 했다. 예산이 빠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다. 허리띠를 졸라맬 때 졸라매더라도 먹을 때는 기분 좋게. 창빈이는 오리고기와 잼을 같이 먹는다는 사실이 가장 의외인 모양이다. 아무튼 어디 ‘썰러’ 들어가기만 하면 희희낙락이다. 다음번에 올 때는 밥값을 따로 챙겨와야겠다.
차를 타고 계곡을 향해 달렸다. 전망 좋은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정말 절경이 펼쳐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초록이 빛을 발하는 깊은 숲, 대자연이 원색으로 빛난다. 뱀처럼 휘어진 강을 따라 마치 색종이를 뿌려놓은 듯 형형색색의 카누들이 하류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다. 론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 중 하나일 뿐인데 경치가 정말 좋다. 세잔의 그림 「생트 빅투아르 산」에 나오는 하얀 암석들을 보는 것 같다. 하긴 이 동네가 전부 세잔의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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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많은 카누들이 잠시 계곡에서 쉬다가 다시 하류를 향해 내려간다. | |
처음에는 물에 들어가는 데 시간이 참 오래 걸린다. 항상 창빈이를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빠릿빠릿한 모습이 전혀 없다. 무슨 일 하나를 하더라도 더디다. 제일 빠를 때? PC방 갈 때다. 그때 걷는 속도는 정말 빠르던데…. 창빈이는 오리발에 수경까지 끼고 완전무장해서 물로 들어갔다. 사장님의 격려를 들으면서 열심히 물장구 중이?. 나는 나무그늘 아래 앉아 쉬다가 물로 몸을 적시고 신선놀음 중이다.
피라미를 한 마리 잡아서 보여준다. 팔뚝만한 놈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게 보인다. 이 계곡은 낚시가 금지되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씨가 말랐을 텐데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관리를 철저하게 한다. 계곡에는 당연히 민물고기가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물고기가 없는 계곡을 어찌 계곡이라 부를 것인가. 인간이 자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는 것, 그것이 삶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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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 한 마리를 잡았다! | |
계곡이 깊어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 같다가도 넘어가기 시작하면 금세 사라져버린다. 수영하러 왔던 프랑스 사람들도 전부 돌아갔다.
사장님이 음식까지 준비해오셨다. 버너에 불을 피우고 고추장 양념에 재워둔 닭을 볶기 시작했다. 닭도리탕이다. 아마도 론 강 계곡에서 닭도리탕 끓여 먹은 한국인 여행자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투박한 스타일의 론 와인도 한 병. 씁쓰름한 타닌이 혀에 쫙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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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강 유원지에서 먹은 닭도리탕 | |
창빈이는 큰 수건으로 몸을 휘감고 맛있게 냠냠이다. 수영하느라 지치고 배도 고팠는지 먹는 속도가 총알 같다. 물놀이 후의 포식이다. 강물에 담가두었던 배도 후식으로 꺼냈다. 어제 서리한 배다.
옆 마을 카페에 가서 앉았다. 맥주를 한 잔 마시는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페에 물어보니 마을 축제를 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호기심이 많은 주인장이 구경 가자고 얘기를 꺼냈다. 저기도 구경 가면 어떨까 싶은 우리 마음을 어느새 읽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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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에 보이는 불꽃놀이 | |
다리를 건너 언덕길을 올라갔다. 생 쥘리앙 드 페롤라라는 아주 작은 시골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광장으로 나온 것 같았다. 가설무대를 꾸며놓고 지방 무대를 도는 삼류가수들이 오래된 유행가를 부르고 있었다. 아, 이건 완전히 <맘마미아>다. 아바도 부르고 엘비스도 부른다. 그러나 정작 공연을 구경하는 건 아이들뿐이다. 어른들은 광장에 내놓은 탁자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마을 전체에 넉넉한 웃음이 흐른다.
음악에 맞춰서 부둥켜안고 춤을 추는 연인들도 보인다. 시골에서는 춤을 추는 속도도 빠르지 않다. 힙합은 없고 발라드뿐이다. 영화에서 보는 마을 축제 같다. 총을 쏴서 선물을 맞추고 회전목마를 변형시킨 우주선들이 돌아간다. 선물가게에서는 싸구려 기념품들을 판다.
한 잔에 1유로씩 받는 파스티스를 한 잔 마셨다. 독한 술. 프로방스 지방의 특산주다. 밤이 늦었다. 어느새 자정 가까운 시간이다. 온종일 즐겁게 논 하루였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하루다. 유적지를 하나 더 보는 것만이 좋은 여행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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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떨어지고 고성에는 불이 켜지고 | |
오늘 창빈이는 누가 봐도 즐겁게 놀았다. 잘 모르는 동네에서는 책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게 훨씬 낫다. 가이드북이 아니라 동네사람 말을 따를 필요가 있다. 파브르 마을에서 만난 친절한 노인, 계곡에서의 물놀이, 엉성하지만 정겨운 마을 축제.<모나리자>를 보는 것만이 프랑스 여행은 아니다. 미술관 하나는 놓쳤는지 모르나 프로방스의 풍경을 가슴 가득 안았다. 시골에는 시골 나름의 멋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