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다가와서인가요, 모지락스럽던 한낮의 해가 풀죽은 듯합니다. 이 선생, 혹시 돌아봤나요. 주고받은 우리의 편지글이 벌써 열 통째입니다. 매화꽃 스러지던 봄날에 시작해 지겨운 장맛비를 건넌 편지가 어느 결에 가을 들머리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엽신(葉信)은 잎사귀에 쓴 글과 같아서 청청한 녹음에 매달리기보다 가을 낙엽과 함께 지는 것이 어울릴 성싶군요. 마지막 편지를 보내려니 적이 서운합니다. 제 감상이 열없는가요. ‘춘녀사(春女思) 추사비(秋士悲)’라 했잖아요. 봄날의 여자는 그립고 가을날의 남자는 슬퍼져요. 제가 앞당겨 가을앓이를 하나 봅니다.
오늘은 어떤 그림으로 실마리를 잡을까 머뭇거리다 ‘거룩한 아름다움’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하필 이 주제에 닿은 까닭은 좀 삼갈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지요. 지금껏 제가 너무 경박한 작품들을 가지고 떠든 게 죄밑이 된 모양입니다. 음풍농월에 빠지는 제 심성이 어디 가겠습니까만, 마무리는 경건하게 지어야 욕을 덜 먹는 방편이 되겠지요. 변명을 그만 거두고 그림을 찾아보렵니다.
거룩하다 하면 이 선생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아마 성인(聖人)이 아닐까요. 저도 마찬가지인데, 그분이 어머니입니다. 하늘의 집무에 바쁜 하나님 대신 내려보낸 존재가 어머니라지요. 모성이 성스러운 것은 다 압니다. 페미니스트 중에 ‘모성’ 운운하면 싫은 내색을 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여성의 몰주체성을 떠올리게 한답니다. 저는 ‘부성’이라고 하면 남성의 몰주체성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모성이나 부성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이 고결한 것은 희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고, 모성은 희생 위에 꽃핀 사랑이라서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그 희생을 자청하잖아요.
18세기 화원 신한평의 작품을 보여주려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신한평, 좀 낯선 화가지요.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라고 하면 아, 하실 겁니다. 신한평은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참여했던 화가입니다. 아들 못지않은 솜씨였지요. 산수화는 간결했고 화조화는 치밀한 기량을 자랑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그의 풍속화가 바로 「자모육아(慈母育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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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평, 「자모육아」, 18세기, 종이에 담채, 23.5x31cm, 간송미술관 | |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이죠. 어머니 곁에 있는 자식부터 볼까요. 두 손으로 복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딸은 쪽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어요. 딸에 비해 어머니의 치마는 색이 낡았네요. 딸은 아들보다 철이 일찍 드는지 조신합니다. 아들은 징징대며 눈물을 훔치고 있죠. 뭣 때문에 골이 났을까요.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겨서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막내아들을 감싸 안은 어머니의 낯빛이 세상 누구보다 자애롭습니다. 아랫도리 훌렁 깐 채 젖을 빠는 막내는 아기치고 살이 나우 토실합니다. 모유의 우수성을 실감합니다. 이 그림의 모델은 화가의 가족이라고 하네요. 신한평은 이남일녀를 두었는데, 신윤복이 장남이었죠. 그렇다면? 저 찔찔 우는 아이가 신윤복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한 천재화가의 숨기고픈 신상을 털었습니다.
잠깐, 엇나가는 얘기라도 하고 가겠습니다. 옛날,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는 그림이 명화로 전해졌답니다. 성종 임금이 이 그림을 보고선
“내다 버려라”고 했다네요. 까닭을 묻자 성종이 말합니다.
“손자에게 밥을 먹일 때는 할아버지의 입도 덩달아 벌어지는데 이 그림은 입을 다물고 있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관찰입니다. 내리사랑이 무릇 그렇습니다. 신한평의 작품에 그게 보입니다. 고개를 지그시 숙여 눈을 맞추고, 아이가 편하게끔 팔뚝으로 머리를 받치며, 허벅다리에 놓인 엉덩이를 연신 토닥이는 어머니의 저 푸근한 품새를 보세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는 결이 다른 조선판 성모(聖母)의 아이콘입니다. 놀라운 게 또 있습니다. 아이의 손을 유심히 보세요. 엄지와 검지로 조물조물 엄마의 젖꼭지를 만집니다. 하도 만지작거려 젖꼭지가 빨갛게 성이 났어요. 이 선생, 기억나십니까. 우리는 젖을 빨며 한손으로 늘어진 어머니의 가엾은 젖가슴을 더듬고 꼬집었지요. ‘아얏, 이 놈’ 소리 한번 없이 어머니는 마냥 인자한 웃음을 흘렸지요. 그림 속에서 아이가 잡아당기는 엄마의 젖꼭지, 오늘따라 저 젖꼭지가 새삼 사무치게 그립습니?.
이 선생은 많이 보았겠지요. 서양화에 나오는 유두는 거룩한 모성과 무관한 것이 대부분이지요. 얼른 기억나는 게 아뇰로 브론지노의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인데요. 큐피드가 검지와 중지 사이로 비너스의 유두를 그러잡은 모습은 아무리 사랑에 대한 16세기적 우화라 해도 심히 발칙합니다. 작자 미상의 17세기 그림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자매」는 또 어떤가요. 언니의 유두를 느닷없이 잡는 동생의 의도는 민망함을 넘어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운 미스터리입니다. 더 이상 사례를 드는 짓은 경건한 주제와 어울리지 않아 그만 접습니다. 모자 사이만 도타운 건 아닐 테지요. 할아버지와 손자도 흐뭇한 사랑이 오갑니다.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라는 작품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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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앙간비금도」, 16세기, 종이에 담채, 22x22.5cm, 개인 소장 | |
제목 뜻은 ‘날아가는 새를 쳐다보다’죠. 조손(祖孫)이 다정하게 마당에 나와 키 큰 나무에 막 깃들이는 새들을 부르고 있지요. 둥근 지붕이 순하고, 처마보다 더 둥근 산이 포근하고, 암수탉이 짝을 지은 모습이 정겨운 그림입니다. 그림 옆에 푹 익은 행서체로 쓴 글씨가 있네요.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 곧 ‘한가롭게 옛 사람의 책을 본다’는 뜻입니다. 쓴 사람의 이름도 적혔군요. 누가 쓰고 그렸는지 알면 놀랄 겁니다. 허난설헌의 작품이랍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이자 중국에서 가장 높이 치는 16세기 여류시인이 곧 난설헌 아닙니까. 서애 유성룡은 그녀의 시재(詩才)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지요.
‘허공의 꽃과 물 위의 달빛처럼, 가을 연꽃이 못에 솟은 듯, 봄날의 구름이 하늘에 아련한 듯, 맑고 빼어나다.’ 시만 그런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이 그림은 그리 잘 그리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다정하게 그려내기는 어렵지요. 고까옷 예쁘게 차려입은 손자는 고개를 뒤로 한껏 쳐들었지요. 그리곤 손을 흔들어 새들을 반깁니다. 손자에게 밥 떠먹일 때는 할아버지 입이 절로 벌어진다 했지요. 이 할아버지는 어떤가요. 손자를 따라 함께 하늘을 보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그의 시선은 오로지 손자의 거동에 붙박입니다. 기우뚱하고 넘어질세라 손을 꼭 잡은 것도 모자라 들고 있는 지팡이로 곁부축까지 하며 살피고 보듬어요. 이게 할아버지의 진정 어진 마음입니다.
자, 마지막 그림입니다. 거룩한 사랑 중에 자비와 은총이 있습니다. 자비는 왠지 부처님의 입김이 풍기고 은총은 자꾸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존재에 대한 가엾음에서 자비와 은총이 피어나기 때문이지요. 크기를 비교할 수 없어도 그 바탕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너그러움과 다를 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가여운 마음이 자비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그림이 그것을 보여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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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이 잡는 노승」,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3.9x17.3cm, 개인소장 | |
18세기 선비화가인 관아재 조영석이 그렸는데, 언뜻 익살맞은 광경처럼 여겨지지요. 등장인물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요. 나무 밑동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노인, 하는 짓이 어째 수상합니다. 길고 헐거운 옷차림에 짧은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이 신분을 말해주는데, 머리를 박박 밀지 않아서 그렇지 스님이 틀림없죠. 왼손으로 장삼 윗도리를 잡아 맨살이 보이고 오른손으론 옷 안쪽에 붙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시늉인데, 뭘 하자는 심산일까요.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뻗은 손가락질에서 짐작이 갑니다. 스님은 이를 잡고 있어요. 그림 제목이 ‘이 잡는 노승’인데, 사실은 잡는 게 아니라 털어냅니다. 엄지로 잡으면 힘에 눌려 이가 죽을 수 있으니 살살 비질할 요량입니다. 생긴 모습이 우락부락해도 해로운 미물에게조차 자비를 베푸는 너그러운 스님이지요.
이 절묘한 장면을 포착해낸 조영석은 늘 다리품을 팔면서 현장 스케치하기를 즐긴 화가였지요. 그는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이 그림도 자신이 육안으로 확인한 장면일 거예요. 스님의 코믹한 표정에 실감이 넘칩니다. 안타깝게도 그림 속의 스님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네요. 그나마 다행은 이 그림 옆에 조영석이 따로 써서 붙인 글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울창한 나무 아래에서 하얀 승복을 풀어헤치고 이를 골라내는 것은 선(禪)의 삼매에 들어가 염주를 굴리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화가는 이를 살리는 행위와 염불하는 마음이 마찬가지라고 여겼지요. 따져보면 알 일입니다. 이는 해충이긴 하지만 생물입니다. 살아있는 목숨붙이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서 어찌 부처의 길을 걷는다 하겠습니까. 살생을 멀리하고 상생에 마음 돌리는 자비심이 해학적인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참으로 곱살스러운 우리네 풍속화입니다.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긍긍하는 모성, 우리네 어머니들은 곁을 스치기만 해도 눈물겹습니다. 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애(仁愛)는 다함이 없지요. ‘석안유심(釋眼儒心)’이라, 석가의 눈과 공자의 마음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의 사랑도 가장자리가 없다지요. 정 없는 세상은 살아갈 도리가 막막합니다. 그 끝 간 데 모를 너그러움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이 사회 구석구석에 미친다면 그야말로 현세가 낙원이겠지요. 모쪼록 베풀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이 선생, 조락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의지가지를 잃은 낙엽이 거름 된다지요. 우리의 엽신들이 무슨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더불어 지나온 이 봄과 여름 한철은 벅차게 새기렵니다. 다시 만나도 여전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