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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자격: 고씨 부자의 유럽 42일 생존기 고형욱,고창빈 공저 | 사월의책 |
아빠와 아들, 절친이 되다! 대책불가 사춘기 아들을 변하게 한 아빠의 고군분투기 요즘 아빠는 돈 버느라, 아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 보는 게 전부이고, 가족 간의 대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대로 괜찮을까? 아빠는 결심한다. 사춘기 아들을 위해 선물을 해주기로! 바로 아빠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이었다. 그것도 42일간의 긴 서유럽 일주. 1,000시간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다 보면 아들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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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라스트로에 갔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500년이 넘은 벼룩시장이다. 마드리드의 온갖 잡동사니들이 라스트로로 몰려든다. 창빈이도 말로만 듣던 벼룩시장이라 잔뜩 기대에 차 있다. 생애 첫 벼룩시장이 500년 넘은 곳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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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 라스트로의 아침 풍경 | |
여덟 시밖에 안 됐는데도 어떤 구역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거리면서 장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소매치기 많다, 카메라 조심해라, 구구절절 잔소리를 하면서 곁눈질로 싸고 괜찮은 물건이 없나 뒤져본다. 글쎄, 그다지 탐나는 물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드리드뿐 아니라 요즘은 유럽 어느 도시를 가나 벼룩시장에 제대로 된 ‘낡은 것’들이 별로 없다. 누구나 원하는 싸고 좋은 것들은 중국인들이 현찰을 주고 트럭도 아니고 배로 싹 쓸어간다. 책도, LP도, 골동품도 그래서 가격이 올라버렸다. 그나마 런던의 포르토벨로나 파리의 방브 정도가 낭만적이고 고풍스러운 벼룩시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보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라스트로가 썰렁하니 설명도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잘 봤지? 이런 게 벼룩시장이야.”
그냥 형식적인 이야기만 해준다. 창빈이라고 보는 눈이 없을까, 다 알지. 벌써 관심이 없어진 창빈이가 대답한다.
“그런데 아침 산책치곤 좀 멀리 왔네. 배고프다.”
에구, 이놈의 밥!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알았어. 돌아가는 대로 밥 먹을 거야.”
나는 그저 옛날 기억들만 떠오른다. 10년 전만 해도 벼룩시장에 나오면 살 만한 물건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유럽 어느 도시에 가나 그랬다.
갑자기 궁금한 게 한 가지 떠올랐다.
“너 빨래는 어떻게 했냐?”
“뭐?”
화들짝 놀란 표정이다.
“빨래!”
“가방에 있는데…?”
“빨래 안 할 거야?”
“해야지… 그래도 팬티랑 양말 하나씩 남았는데?”
혹시 팬티 거꾸로 입었나?
“안 돼. 너 빨래해. 빨래하고 일기 써. 아빠는 투우장에 표 끊으러 갔다 올 테니까. 빨래 안 하고 일기 안 쓰다가 밀리면 나중에 너만 고생이야. 팬티 다 빨아, 알았지?”
그래서 아침 식사를 먹고 창빈이는 세면장으로 나는 투우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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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 포스터들 | |
티켓을 사서 숙소로 오던 길에 혼자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미술관에 들렀다. 고야의 그림도 널려 있고 수르바란의 작품들도 여러 점 걸려 있다. 그런가 하면 흔치 않은 아킴볼도의 작품도 한 점 있다.
아들을 떼어놓고 오니 이렇게 편한걸. 처음으로 나름의 여유를 갖고 그림을 둘러본다. 아무리 아들이지만 가끔 혼자이고 싶은 아빠의 낭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불편한 점을 창빈이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혼자 있으니까 둘이 하는 여행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와 닿는다.
함께하는 여행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와 만나고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화를 많이 나누는 부자는 처음 본다고 말한다. 여행 와서 말 한마디 안 섞는 가족, 신혼여행 왔다가 찢어진 커플… 별별 경우가 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눈 대화라고 해봐야 하루 저녁 술자리에서 친구와 나눈 이야기만큼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이놈이 투우는 재밌게 보려나?
점심을 먹으면서 투우 보러 간다는 얘기를 꺼냈더니 다른 여행자들이 자기네도 같이 가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프라도 미술관을 거쳐서 간다고 했더니 다들 같이 가겠단다. 프라도로 가는 길은 이제 친숙하다. 창빈이가 앞장서서 걸어간다. 애가 앞장을 서니까 사람들은 자못 신기한 표정이다. 네 번째로 가다보니 길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말이다.
미술관 안에서도
“벨라스케스 쪽에 가자” “고야 보러 가야지” 주문대로 길을 척척 찾아낸다. 창빈이는 길을 안내하고 나는 간략하게 그림을 설명해주었다. 사람들은 내가 들려주는 설명보다 창빈이가 길을 찾는 게 훨씬 더 신기한 모양이다.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니 창빈이도 평소보다 관심을 갖고 설명을 듣는다.
졸지에 미술관 가이드 부자 콤비가 되어 여행자들에게 프라도 미술관을 소개해주게 되었다. 길을 찾는 거라도 창빈이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주니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 걸 보면 나도 천생 ‘한국 아빠’다. 아이가 미술관 길 좀 찾는 것 갖고 괜히 기분이 좋다. 신나고 자랑스럽고 그냥 웃음이 계속 나온다. 마드리드에 눌러앉아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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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미술관. 무료 입장 시간이 되어서 한 번 더 둘러보러 갔다. | |
“너 여기 앉아서까지 게임이나 해야겠니?” 미술관에서 좋았던 마음이 금세 날아갔다. 창빈이는 투우장에 앉자마자 갤럭시S를 꺼내서 게임을 한다. 축구 게임이다. 며칠 새 무척 능숙해졌다. 레알 마드리드를 자기편으로 삼아서 게임 속 프리메라 리가에 빠져 있다. 스페인의 수문장 카시야스가 골키퍼다. 요 녀석, 스페인인 줄은 알고….
“시작할 때까지만 하면 안 돼? 딴 거 할 일도 없는데….”
“알았어. 시작할 때까지야. 투우 시작하? 사진 좀 찍어라. 그래야 돌아가서 친구들 보여줄 거 아냐!”투우를 보러 오긴 했지만 막연한 설명만 들었지 구체적으로 투우가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가이드북에 쓰인 내용이랑 실제 상황은 너무 다르니까.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고 소들이 성질을 부리면서 사람들을 쫓아다니자, 바라보던 창빈이가 갑자기 미소를 짓는다. 쫓고 쫓기는 꼴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이다.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웃고 있다.(현지 음식 먹을 때랑 아이스크림 먹을 때는 제외하고 말이다.) 미술관이나 교회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너, 웃네?”
“응?” 갑자기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너 웃는다고, 재밌는 모양이다?” 어색하게 웃는다.
“뭐, 괜찮네.” …솔직하게 표현을 못 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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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의 화를 돋우는 수습 투우사들. | |
투우는 재밌다. 여행에 심드렁한 아들이 처음으로 즐겁게 웃을 정도로 구경하는 맛이 있다. 하지만 나는 투우보다 창빈이 표정에 관심이 더 많다. 창빈이에게는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다. 새로운 걸 보는 표정을 관찰하는 게 절세미녀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즐겁다. 그게 아빠의 마음이다. 아침 일찍 티켓 끊으러 온 보람이 있다. 아들 웃음 한 방에 여행 나온 낙이 생긴다.
그런데 투우사 한 명이 그만 소에 받쳤다. 푹 하고 쓰러졌다. 갑자기 머리가 시리다. 아찔하다. 관중들 기분을 알 것 같다. 피를 본다는 게 어떤 건지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긴장감이 더해진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어느새 꽉 쥔 주먹 끝에 힘이 들어간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도 아니고 실제 상황이다.
투우사가 용케 일어선다. 어떤 심정일까. 소뿔에 받치는 건 투우사 인생이 끝장나는 거랑 별다른 차이가 없는 거 아닐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절망감이 동시에 밀려올 것 같다. 투우사는 억지로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을 물린다. 자기가 처리하겠다는 거다. 그러나 이미 제 컨디션이 아니다. 햇볕은 쨍쨍거리고 오금이 저려올 텐데. 다리도 약간 풀린 것 같다. 집중력이 떨어질 텐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소뿔에 다시 받친 투우사는 멀리 날아가 쓰러지고 말았다. 소뿔에 채이니 사람이 저만치 날아간다. 먼지가 뿌옇게 날린다. 사람들이 뛰어가서 소를 다른 쪽으로 끌어내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런 투우를 보고 나니 정상적인 게임은 재미가 없다. 투우는 피를 봐야지, 하는 표현은 그래서 쓰이나보다. 헤밍웨이가 오죽하면 투우장을 무대로 오후의 죽음』을 썼을까. 맞아, < 피와 모래 >라는 옛날 영화도 있었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잔인함에 더 열광하는 게 인간의 본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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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냉장고 안에 들어가고 친구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랑 눈이 마주치니까 자기네도 웃긴 모양이다. | |
창빈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아니, 사실 나도 투우가 좋다. 하지만 선택하라면 미술관부터라는 얘기다. 하긴 열다섯 살 아들에게 미술관이 뭐가 그렇게 흥미롭겠는가. 아이에게 그림이란 때로 오래된 박제에 불과할 거다. 아이가 여행에 재미를 붙이려면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투우를 보면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 창빈이가 좋아할 만한 일들을 몇 가지라도 더 찾아보자는 것. 맛있는 현지 음식과 달콤한 아이스크림, 그리고 투우. 또 뭐가 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