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바나나박사 물리학에 쪼인트 맞다
두발단속 걸려서 머리 박박 밀고 등교했더니
희망버스는 물리적으로 삐뚤어지지 않은 저항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나 우박을 직접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야구 헬멧을 쓰고 다닌다 해도 위험하다. 다행이 공기라는 저항이 있어 내리는 빗방울이나 우박의 속도를 늦춰준다.
고등학교 때 두발단속에 걸린 적이 있다. 걸린 다음날 머리를 박박 밀고 학교에 갔더니 더 얻어터졌다.
“너 인마 반항하냐!”
모멸감이 느껴진 것이고, 학교가 강압적이라고 생각된 것이고, 때는 사춘기여서 주는 것 없이 밀어붙이는 갑갑한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단순히 반항으로 본 것이다. 그 대가로 머리카락이 다 자라도록 범죄자 취급을 받고 살아야 했다. 두발단속을 한다고 교권이 올랐을 터인가, 학습 성취도를 한 단계 더 올렸을까 생각해본다. 인격적 자율이 아닌 소모적인 원칙이 만든 굴레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들이 지금까지 자율화로 정리되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과연 세상이 진정으로 소통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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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가 삐뚤어지면 문제가 생긴다
사회적인 대립 역시 다르지 않다. 작용과 반작용의 소통의 틀에서 벋어난 일방적 상황은 갈등으로 남는다. 부당하게 해고되었다든지,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든지, 차별을 받았다든지, 부당한 체벌을 당했다든지 했을 때 반작용은 다른 에너지 형태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한진 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이나 희망버스는 원인에 대한 또 다른 물리적 반작용일 수 있다.
이런 반작용에 대한 물리적 대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변환은 소통의 한 과정으로 봐야 한다. 틀어막고 있고 강압적으로 누르고, 일방적으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고 반작용이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다. 그 반작용이 다른 에너지 형태로 변환되었을 때 핵심을 잃어버린 또다른 물리적 역사적 전환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실연의 반작용 역시 다르지 않다
실연에 대한 반작용은 예측할 수 없는 반작용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다. 반작용으로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린다든지, 대인을 기피한다든지, 전혀 반대의 상대와 응징의 사랑을 시작하기도 하고, 반작용의 한계가 모호해지기도 하고, 삶이 염세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반작용 역시 실연이라는 원인이 제공한 물리적 반작용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은 치유의 과정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주일 걸리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 시간의 양은 사랑한 만큼 감당해야 할 반작용의 시간적 과정인 것이다.
에필로그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나 우박을 직접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야구 헬멧을 쓰고 다닌다 해도 위험하다. 다행이 공기라는 저항이 있어 내리는 빗방울이나 우박의 속도를 늦춰준다. ‘저항’이라는 고마운 존재가 있어 우리가 안전한 것이다.
이렇듯 저항의 핵심은 안정된 평형상태를 위해 필요한 물리적 상황이라는 이야기다. 모든 저항하는 것들엔 이유가 있다. 그 속에서 소통을 찾고 힘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 물리적으로 안전하다는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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