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어머니가 내게 위탁한 유언 같다” - 도쿄대 강상중 교수『어머니』: 일본 독자들도 감동한 어머니의 존재
도쿄대 강상중 교수가 말하는 “우리가 잃은 가치들”
당신이 흑인으로, 백인으로 태어나는 문제는 선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중동이나 미국에서 태어나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는 운명적이다.
당신이 흑인으로, 백인으로 태어나는 문제는 선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중동이나 미국에서 태어나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는 운명적이다. 우리나라에 사는 당신이 인종차별이나 테러의 문제보다 학벌차별, 지역주의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일견 운명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난 운명으로 일찌감치 정체성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부모 아래에서 ‘나가노 데쓰오’라는 일본 이름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고민은 깊어졌다. “항상 대상에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신조로 삼는 태도는 이런 성장과정에서 비롯됐다.
“재일한국인은 일본인의 역사에서 가장자리로 쫓겨났고(중략) 동시에 한반도 역사의 일부이면서도 탯줄에서 잘려나간 '디아스포라'적 '반(半)일본인'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나의 고민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귀속되는가? 나는 어디에 근거해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와 만나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 믿을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고민하는 힘』 중)
숙부의 권유로 1972년 처음 한국을 찾은 그는 ‘나는 해방되었다’고 할 만큼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때부터 일본 이름을 버리고 한국 이름 ‘강상중’을 쓰기 시작한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나가노 데쓰오’로 살아온 청춘과 결별하고, 새로운 각오로 인생을 걸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한국 사회의 문제와 재일 한국인이 겪는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해왔다.
출처: 강상중 교수 홈페이지(www.kangsangjung.com)
1998년 귀화하지 않은 한국 국적자로는 최초로 도쿄대 정교수가 되어서 화제가 되었고, 현재 도쿄대 정보학 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주목 받는 지식인이다. 치열한 고민과 관계 맺음의 가치를 일깨우는 책 『고민하는 힘』은 출간 직후 100만 부를 돌파했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그의 냉철한 면모와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 호소력 강한 목소리로 일본 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다.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단지 일본에 사는 코리안으로서 이 사회와 공존해 살아가면서, 한국과 일본이 조금씩 좋은 관계로 다가가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습니다.”
그의 많은 저작에서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삶의 문제,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항상 드리워져 있다. 그것이 재일동포인 그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문제 속에서 발견하는 사회의 문제는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리고 강상중 교수는 당신이 누구건, 어디에서 태어났건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들고 왔다. 어머니. 바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한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오마주
출처: www.japantimes.co.jp
“한국의 남쪽 바닷가 진해에서 태어나 16세 때 전쟁이 한창이던 일본으로 건너와서 살았던 ‘식민지의 여자’(어머니)는 그때부터 반세기 이상을 규슈의 구마모토 땅에서 보냈다. 사실상 ‘문맹’이었던 어머니는 괴로울 때나 슬플 때, 또는 몸이 고단할 때면 항상 기도를 했던 것 같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준 기도의 세계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치를 알고 합리적인 언어를 구별한다는 나, 혹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무엇을 잃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이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은 것, 그것은 어머니가 늘 붙잡고 있었던 ‘기도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 대한 통절한 안타까움이 이 책을 쓰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p.8)
강상중 교수가 재일교포 1세였던 어머니의 삶을 픽션으로 복원한 이야기 속에는 식구들에 대한 근심으로 두 어깨가 무겁고 단단한 그의 어머니가, 우리의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물론 추억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자이니치 1세대의 삶을 통해 결국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며, 독자에게 ‘잊고 살았던 가치’들에 대해 질문을 건넨다.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이 메일로 보냈다. 그는 서면으로 짧은 답을 보내왔다.
사실, 그에게 『어머니』라는 책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는 일찍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해왔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근원까지 통하는 깊은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전후 일본 사회의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면서도 인간답게 살아온 부모님. 즉 재일교포 1세들. 그들의 기쁨과 슬픔, 감정의 기억 같은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작년 일본에서도 34만 부나 판매되었다. “이 책은 재일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를 불문하고 어떤 한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라는 존재의 오마주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한 일본인 독자가 ‘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 어머니가 그리웠다’는 감상문을 보내왔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이 책이 글을 모르는 어머니가 글을 아는 자신에게 위탁한 유언 같다”고 밝혔다. “이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응어리가 동시에 되살아났는데, 세월이 갈수록 우울한 감정을 걷어내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픽션이라는 형식이 나의 정신세계에 신비로운 작용을 가져다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올 3월, 일본을 뒤흔든 대참사를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그는 어머니의 기도를 다시 떠올렸다. 한때는 ‘저승과 교감하면서 기도를 바치는 모습’이 주술적인 미신으로만 보이기도 했던 기도였다.
“어머니의 기도와 노래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행과 재난을 당했을 때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바치던 모습입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신성하고 엄숙한, 그러나 인간다운 생명의 용솟음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슬픔과 기쁨 등 강한 감정이 내 안에서 솟구칠 때는 어디선가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이니치 1세대의 삶을 복원하면서, 그는 기억 속으로 사라진 여러 사람들을 불러와야 했다. “일본에서는, 인생은 꿈이요, 환상 같은 것이라는 말들을 곧잘 하곤 합니다. 나도 환갑의 나이를 지나면서 사랑하는 주위의 1세들이 지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는 것을 바라보면서 인생에서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긴 게 아니구나 하는 감개에 젖어 들기도 합니다. 사라져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갈수록 강해집니다.”
재일교포 입장에서 바라보는 일본과 한국
“1세에 비하면 나와 같은 2세들은 대부분 학력도 높아졌고 사회진출의 기회도 매우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체성의 혼란으로 더 깊게 고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재일교포라는 남다른 입장이라 언저리에서 일본사회의 중심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동시에 독일 유학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강 건너’에서 일본과 재일교포, 그리고 한국을, 부감(俯瞰)하듯 응시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 자신의 특이한 입장이 현재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반영이 된 것이겠지요.”
그에게 지금의 한국과 일본은 어떤 인상으로 다가오는지 물었다. “내 입장에서 현재 한국은 예전의 일본에 가까워지고 현재의 일본은 예전의 한국 같은 이미지에 가까워지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 ‘교차’의 의미를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TV토론이나 칼럼에서 던진 이야기들이 이슈가 된다.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이 재일교포로서 문제를 던지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가 던지는 문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일 터. 누구에게나 정체성의 문제, 타인과 외부와 관계 맺는 문제는 바쁜 사회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숙제다.
“최근 젊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고민에 빠지기도 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이 근대화를 이루면서 ‘자아로서의 나’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의 의문에 대해 미리 정해진 대답이 없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답을 찾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는 여정 중에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독자들은 내 책을 읽고 내 의도와는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하고, 또는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 이외의 포인트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그런 엇갈림과 차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라는 작품은 나 개인뿐 아니라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내 작품을 읽고 요즘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힌트를 발견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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