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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술이 탈이다

일탈: 겸재 정선이 설마 19금 그림을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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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술이 탈입니다. 술탈이 곧 일탈입니다. 해서 안 될 말과 해서 안 될 짓이 술 때문에 튀어나오죠.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죠. 우리 산하의 참맛을 살려낸 진경산수화의 대가 아닙니까. 그가 그린 금강산을 떠올려 보세요. 산악의 뼈대와 힘줄과 살갗이 또렷하고 활력이 펄떡거립니다. 관념적인 산수화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리얼리즘 정신은 비록 소박하지만 시대적으로 매우 귀하게 평가 받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경(眞景)을 그리되, 살고 싶은 진경(珍景)으로 번안해내는 겸재의 창의력은 후대 화가의 귀감입니다. 그래서 ‘그림의 성인’, 곧 ‘화성(畵聖)’으로 불린 겸재입니다.

성인이라 해서 마냥 엄숙하진 않겠죠. 공자와 퇴계도 유머 감각은 있었지요. 겸재가 어느 날 심심했던지 장난삼아 그림 두 점을 그렸습니다. 「어촌도」와 「관폭도」입니다.

(우) 정선, 「어촌도」, 종이에 수묵, 18세기, 26.6x39cm, 개인 소장
(좌)정선, 「관폭도」, 종이에 수묵, 18세기, 27x39cm, 개인 소장


「어촌도」는 해 저문 서녘 하늘에 초승달이 희끗하게 보이는 포구 풍경인데, 갯가에 배 두 척이 정박해있네요. 수양버들 사이로 솟은 깃대는 주막이 있다는 표십니다. 「관폭도」는 봉우리가 잇대어 있는 주산 아래 폭포가 쏟아지는 산골 장면이죠. 폭포 앞에 정자가 섰는데, 선비가 거기 앉아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겸재의 장난기가 들어있다고 했지요? 다시 보세요. 큰 바위와 폭포가 야릇한 형태입니다. 무엇을 닮았나요. 이 선생, 금방 못 맞추시네요. 제 입으로 말해야겠군요. 남근(男根)과 여곡(女谷)입니다. 설마 겸재가 남녀 성기를 그렸겠느냐고요?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겸재는 주역에 밝았어요. 그의 산수화에 남녀의 음양을 떠올릴 만한 요소가 더러 있거든요. 눈썰미 좋은 사람은 찾아내더군요. 그것들에 비해 이 그림은 노골적인 편입니다.

「어촌도」와 「관폭도」를 소장한 어른을 제가 압니다. 그 분은 방 한 가운데 이 그림을 좌우로 나란히 걸어두었어요. 그리고선 남에게 말하길 “제목이 ‘음양산수도’랍니다.”고 해요. 아닌 게 아니라 두 그림은 붓질이나 먹색이 똑 같습니다. 한날한시에 짝으로 그렸다는 얘기지요. 그림의 성인이 참 무람없이 놀았다고요? 그건 모르지요, 낮 겸재와 밤 겸재가 달랐는지 누가 압니까. 겸재의 진지한 그림과 달리 좀 엇길로 나아간 작품이긴 해요. 저는 우스갯말로 이런 그림을 ‘일탈휘지’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일탈’입니다. 선비정신으로 똘똘 뭉친 겸재라고 해서 통념을 깨는 짓이 전혀 없었다고 말 못합니다.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제가 고른 그림은 일탈을 소재로 한 것들입니다. 이 선생에게 ‘일상 탈출’을 줄이면 ‘일탈’이 된다고 제가 말한 적 있죠. 물론 농담이었죠. 일탈(逸脫)은 탈선처럼 부정적인 말뜻이 짙습니다. 목적과 정도에서 벗어난다는 거죠. 영어로 ‘Deviance(일탈)'는 Perversion(변태)과 상통하기도 했다면서요. 우리 옛 그림은 그렇게 심하지 않습니다. 과격한 일탈이 별로 없어요. 화끈하기보다 조촐한 쪽입니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빨래터에서 여인의 맨다리를 훔쳐보는 선비가 있고,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몸 씻는 여인을 눈으로 탐하는 까까머리 동자들이 나오거나 기생을 껴안고 더듬는 장면까지 있기는 합니다. 하여도 무례할 뿐 패륜은 아닙니다. 해학에 가깝죠. 성애(性愛)의 일탈을 그린 춘화는 예외입니다만 그런 그림은 접어두렵니다. 그저 상식에서 벗어나고 얌전치 못한 충동을 그린 그림만 보겠습니다. 섭섭해 하지 마세요, 이 선생.

예나 지금이나 술이 탈입니다. 술탈이 곧 일탈입니다. 해서 안 될 말과 해서 안 될 짓이 술 때문에 튀어나오죠. 술의 신선이라는 이태백조차 탄식했습니다.

칼 뽑아 물을 베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 들어 시름 씻어도 내내 시름겹네
抽刀斷水水更流
擧杯消愁愁更愁


술을 마셔 시름을 가라앉히려 하지만 들이켜 봤자 시름은 위벽을 타고 다시 올라옵니다. 좋은 술은 있어도 착한 술은 ?지요. 탈 없이 마시려면 주법을 지켜야죠. 송나라의 도학자 소옹이 귀띔합니다.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 뒤
예쁜 꽃 보러가노라, 반쯤만 피었을 때
美酒飮敎微醉後
好花看到半開時


바로 이겁니다. 적당히 마신 술이 양생을 도우고 반쯤 핀 꽃이 향기롭습니다. 소옹의 말은 방중술(房中術)에도 딱 들어맞는데, 이 선생은 아시나요. 또 모르시는군요. 어쨌거나 만취하면 만사 다 그르친다는 뜻입니다.

18세기 화가 김후신의 그림 「대쾌도(大快圖)」를 볼까요.

김후신, 「대쾌도」, 종이에 담채, 18세기, 33.7x28.2cm, 간송미술관


제목만 ‘크게 유쾌한 그림’이지 목불인견입니다. 단풍이 물든 가을 숲이죠. 술 취한 패거리가 느닷없이 들이닥쳤어요. 갓쟁이 넷이 뒤엉켜 간데없는 난장판입니다. 술배가 곯았기로서니 양반 차림에 무슨 뒤끝이 이토록 망상스럽단 말입니까. 상툿바람에 해롱거리는 작자가 골칫덩이로군요. 그는 갓을 내팽개친 채 까짓것, 악다구니를 쓰고 있네요. 덜 취한 술꾼들이 딱하게 됐습니다. 꼭지가 돈 친구를 미느라 끄느라 생고생을 합니다. 정신 줄 놓고 해찰하는 놈을 누가 말립니까. 뒤에서 떠받치는 사람 꼴 좀 보세요. 힘에 부쳐 고꾸라질 지경인데,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자빠지는 순간 중치막 자락이 바람에 휘날립니다. 재미있는 건 나무들의 표정입니다. 줄기에 움푹 파인 옹이가 얼마나 한심했던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켜보는 것 같죠.

화가는 나라에서 내린 금주령을 어기고 저희들끼리 퍼마신 양반들의 추태를 풍자했습니다. 딴에는 무슨 시름이 겨웠던지 몰라도 저 꼬락서니가 되면 신분에서 한참 벗어난 일탈로 손가락질 당합니다. 진나라 때 죽림칠현 아시죠. 인간세상의 시비를 떠나 고담준론을 나누던 일곱 선비를 말합니다. 그들 중에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는 술꾼이 유영입니다. 유영은 술 마시러갈 때마다 삽을 든 하인을 대동했답니다. 왜냐구요? 자기가 술 취해 쓰러지면 바로 그 자리에서 끌어 묻으라는 거죠. 모름지기 술꾼은 이런 마음먹이를 가져야 마땅합니다. 유영도 술 마시면 일탈행동을 했겠지요. 하지만 그라면 뭔 짓을 해도 일탈이 아니라 초탈 아니었을까요.

「대쾌도」는 그나마 낫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유곽쟁웅(遊廓爭雄)」은 하는 짓거리가 참으로 점입가경입니다.

신윤복, 「유곽쟁웅」, 종이에 채색, 18세기, 28.2x35.6cm, 간송미술관


‘유흥가에서 영웅을 다투다’는 게 본디 붙인 제목인데, 차라리 ‘웅(雄)’ 자의 뜻을 살려 ‘수컷을 다투다’로 번역하는 게 어울릴 성싶네요. 초가집 나지막한 서울의 골목길입니다. 어떤 사단인지 뻔합니다. 장죽을 들고 있는 여인은 기생입니다. 기방 앞에서 벌어진 난투극이죠. 주먹다짐이 막 끝났습니다. 갓을 줍는 사내를 보면 얼마나 싸움이 치열했는지 짐작됩니다. 갓 테두리인 양태와 볼록한 대우가 아예 떨어져 나갔습니다. 모자 주인인 사내는 윗자락이 벗겨진 채 여태 분이 덜 풀렸는지 시근벌떡거리는데, 마치 염소수염이 부르르 떨리는 듯합니다. 뜯어말리는 사람도 부산합니다. 노란 초립을 쓰고 푸른 속옷 위에 붉은 철릭을 걸친 사내는 방망이를 들고 제지합니다. 그는 기방을 관리하는 별감이죠. 뒷모습에 위세가 잔뜩 실렸네요. 얘기가 옆길로 갑니다만, 혜원의 채색 감각은 정말이지 감탄스러워요. 별감의 관복에 돋보기를 대고 보면 놀랍게도 옷이 3D처럼 솟구칩니다. 한번 해보세요. 모니터에서도 그런 효과가 날지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별감이 쫓아왔기에 싸움판이 멈췄지요. 둘 사이에 끼어 풀어진 고름을 묶는 사내는 이런, 귀때기가 새파랗네요. 서책을 들고 파도 시원찮을 나이에 어쩌자고 청루를 기웃댔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치심은 남았는지 열없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게 다 기생을 두고 질투심에 못 이겨 벌어진 사건입니다. 기방에 흔히 써 붙이는 글귀가 있대요.

‘천하태평춘(天下泰平春)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천하는 태평스런 봄이요, 사방에 별일 하나 없다는 말입니다. 업태와 어울리는 캐치프레이즈이긴 해요. 하지만 미색을 차지하려는 왈패들끼리 노상 시끄러운 곳이 기방입니다. 한량기가 있다 해도 그림 속 인물들은 어엿한 양반 아닙니까. 역시 술 때문에 생긴 일탈행위입니다. 이 양반들, 망신 살 만큼 사놓고 어느 염치로 술 탓을 할까요.

괴테가 말했지요. 세상에는 하고 싶지만 해서 안 되는 일 그리고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이 있다고요. 일탈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는 똑바로 기어갈 수가 없고 사람은 똑바로 걷기가 힘듭니다. 다행히 양식이 있어 발걸음을 잡아주지요. 법과 양심을 범하지 않는 일탈이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조롱 속에 갇힌 새는 날기를 꿈꾸고 고삐에 매인 말은 달리기를 원하는데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인간이야 물을 바 없지요. 예술은 일탈에서 태어나지요. 예술 같은 일탈을 생각하면 저는 가슴이 떨립니다. 똑 소리 나게 걷는 이 선생에게 권할 일은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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