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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진짜 중도가 필요하다” - 『해방일기』 김기협

중도란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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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점철된 대한민국史에 중도라는 존재가 과연 있었던가? 『해방일기』의 저자 계명대학교 사학과 김기협 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진정한 중도가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중도는 회색이다?

치우치지 않은 것이 좋은 것. 중용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어떤 문제에 있어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자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도는 회색분자나 기회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남북 이념 전쟁을 거치며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는 정치적 분위기는 항상 흑과 백, 혹은 좌와 우의 문제에서 O, X의 대답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끌리고 쏠리고 들끓지 않고, 가운데를 지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제대로 가운데에 서는 일은 어느 한 입장을 정하지 않은 망설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정확한 입장이다. 그러니까 일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좌우로 점철된 대한민국史에 중도라는 존재가 과연 있었던가? 『해방일기』의 저자 계명대학교 사학과 김기협 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진정한 중도가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중도는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것은 김기협 교수가 역사학자로 공부하고 말하는 데에 있어 추구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해방일기』는 그야말로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의 시각에서 일기로 써나간 해방정국의 상황이다. 이미 해방정국에 관해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해놓은 결과물을 김기협 교수가 포장하고, 유통한다. 밝혀진 사건을 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한쪽에 치우쳐져 있는 팩트나 의견은 아닌지 검토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중도의 입장을 세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보통사람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고,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진보나 보수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입장에서 얘기하면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를 비판 하더라도 ‘진보의 이름으로’ ‘보수의 입장에서’ 비판한다는 전제부터 내세우니, 상식의 기준에서 비판하는 얘기조차 나올 발판이 없다.”

그는 평범한 사람의 대표주자로, 이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족지도자 안재홍을 화자로 내세운다. 이념보다 이성을 앞세워 읽어나간 1945년 8월 1일부터 10월 29일까지의 일들이 『해방일기』에 담겼다.

 



“오늘의 문제, 해방공간에서 답을 찾다”


우선 해방 직후 3년을 촘촘히 보겠다고 기획한 까닭이 궁금하다. 무엇을 의도하고 돋보기를 들이댔나?

“우리 사회에 이런 얘기가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성실히 연구하고 공부하면 함께 사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게 있겠지, 이렇게 믿고 공부하는 역사학자로서의 의무감도 있었다. 살면서 파악한 사회의 문제들이 있잖나. 우리는 그 문제에 분노하기도 하고, 항의하기도 하는 식으로 어떤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기 이전에 문제를 깊이 보고 근본적인 노력의 비중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봤다. 어떤 부정한 문제가 터졌을 때, 부정을 처단하려고 달려드는 것은 피상적인 반응이다. 왜 그런 부정이 횡행하게 됐는지, 그 이유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때, 그 현상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대응책을 간구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기존에 서술된 역사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댄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이 망할 줄 정말 몰랐나? 미국과 소련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나? 이런 질문들을 접하며, 이제껏 역사를 너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에서 ‘사이언스’는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을 문(問)자가 들어간 것이 학문(學問)의 본질에서 아주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이라는 것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질문을 찾아내는 일이다. 주어진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테크놀로지’지 ‘사이언스’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해답을 좋아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해답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건 본성에 가깝다. 학자들은 ‘양극화가 문제야. 평등이 답이야.’ 이런 해답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답이라고 내린 명제에 질문을 던지고, 아쉬운 점을 찾아내는 데에서부터 학자의 역할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고 지나칠 뻔 했던 질문들, 의미 있는 질문들을 찾게 되었다는 얘기는 참 반갑다.”


 


“우리 사회의 문제, 좀 더 깊게 보자”


역사에 빈 곳이 많으니, 여러 부분 추측과 판단으로 서술되고 있다. 일기라는 형식도 한몫 한다. 역사학에서 가정(if)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역사학에서의 가정법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가정이 적용될 범위를 벗어나 맹목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역사학의 생산적인 영역, 새로운 팩트를 파악해가는 작업에 있어서는 가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역사책을 읽으면 저절로 ‘만약에~’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무조건 금기시하는 풍조도 있는데, 자연스러운 선에서는 가정을 용납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저자 나름의 추측에 문제 제기나 응답을 해온 사람은 없었나?

“그 동안 이 글을 블로그에도 올리고 프레시안에도 연재를 했다. 댓글도 달리고, 그 중에는 도움이된 이야기도 많았는데, 나는 지금보다 훨씬 피드백이 많길 바란다. 오늘부터 오프라인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이다. ‘길담서원’ 운영하는 분이, 회원들 중에 『해방일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은데 강의를 해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 원고 쓰기도 바쁜데 강의는 어렵겠다고 했다. 하지만, 세미나 정도라면, 작업하다가 떠오른 생각들을 주고 받기 좋을 것 같더라. 홈페이지에서 독자를 모집했는데 열댓 명 오시지 않을까 싶다.”

당대의 느낌과 감흥을 전달하는 게 이번 집필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했다. 21세기에 해방 전후를 추체험하는 일을 통해, 독자들의 어떤 반응을 기대하나?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를 두고 이런 저런 식으로 제기하고 비판하잖나. 그게 좀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좀더 심층화되기를 바라는 거다. 심층화가 되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몇몇 사람의 비 양심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가 어떤 틀에 짜여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문제 인식을 심층화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해방공간에서 빚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굳어져버린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혹시 여러 사건을 다루고 생각하면서, ‘만약…!’하는 가정법이 가장 아쉽게 남았던 사건이라면 무엇이었을까?

“그런 마음이 작업하기 전에는 많았다. 하지만, 작업 중에는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원리의 가정법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 올린 연재 분에 좌우 합작 얘기를 했다. 46년도에 여운형, 김규식이 중심이 돼서 좌우합작 노력을 벌였는데, 그걸 찬양, 미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이런 사람들의 노력이 좋은 성과를 얻었으면, 실제로 일어났던 참혹한 비극을 피했을 텐데…… 이렇게 마음이 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노력을 만병통치약처럼 떠들기 보다는 가급적 냉정한 자세를 지키면서 검토했다. 거기에도 나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 걸 테다. 냉정한 눈으로 비판적인 검토를 한 후에도 뭐가 남으면, 그것은 거품 없이 가치 있는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자칫 거품이 들어가서 미화하게 되면 잠시 기분풀이는 될 지 몰라도, 그때부터 지속되어 온 지금의 문제를 비춰볼 만한 거울을 삼기 어려울 수 있다. 냉정하게 본다는 건 그 거울을 닦는 다는 거다.”

 


“진짜 중도?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합리적인 입장”


이 책은 중도파를 수면위로 끌어내려고 한다. 좌우가 분명한 우리 사회에서는 중도파라는 개념이 생소하다.

“70년대 이철승이라는 사람이 중도통합론을 주장했는데, 웃음거리가 됐다. 해방 공간에서 그 사람이 아주 악성 극우파였거든. 그런 사람이 30년 뒤에 자기의 정치적 입장을 세우겠다고 중도통합론 이런 얘길 하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냉소할 수 밖에 없었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까 중도라는, 부정적인 정의에 그치게 된 거다. 해방공간에서 중도는, 원칙과 상식에 입각해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을 뜻했다.

30년 후 유신시대, 양극화가 극단적인 시대에서 중도 얘기가 나왔을 때도, 중도는 단지 폼 잡는 데에만 쓰였다. 원래는 중도가 사회의 정치적 태도의 주체이고, 극좌와 극우는 거기에 기생하는 주변적 존재였다. 해방시점에는 그렇게 시작했는데, 점차 극우, 극좌가 비대해지면서 중도의 입지가 사라져버렸다. 오늘날에 와서도 진보/ 보수라는 대립적 인식이 너무 치우친 면이 있다고 본다.”


해방일기를 계속 연재하고 계신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해방시대의 일기를 쓰는 감흥이 남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 소감을 듣고 싶다.

“65년 전 일을 돌아보는 마음이 어둡다. 이렇게 안됐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을 대목대목에서 금할 수가 없다. 살펴보면 65년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 극복했어야 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것이 많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적 단초들이 그 지점에 많이 있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 더 낑낑대고 해방공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이것은 사회 개선이나 문제 극복을 위한 노력의 출발점 정도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정리를 해 두면, 이런 문제들이 그 뒤에 전쟁을 통해 얼마나 악화되고, 그 뒤에 찾아온 독재 상황 속에서 어떻게 고착되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방일기』에 관심있는 독자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추천해주면 좋겠다.

“연구서 중에는 정병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를 권한다. 일반 독자들이 읽을 만한 것으로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을 만큼 잘 정리된 연구서다. 또 이 책을 집필하는데 아주 좋은 참고가 된 책이 유종호의 『나의 해방 전후』였다. 회고록으로 훌륭한 전범을 세웠다고 본다. 그 시대에 대해 전체적인 느낌을 얻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또 『임꺽정』을 추천해주고 싶다. 홍명희라는 인물이 해방공간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이 책은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담겨있는 셈이다. 해방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이 저자가 해방공간에서 어떤 거취를 취했는지 알고 보면, 더욱 음미할 거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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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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