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성, 너무 말랐다 - 『아주 보통의 연애』백영옥
「아주 보통의 연애」는 원래 제목이 아니었다?!
『아주 보통의 연애』 출간을 기념한 백영옥 작가의 아주 특별한 낭독회가 지난 4월 4일, 신촌 산울림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아주 보통의 연애』 출간을 기념한 백영옥 작가의 아주 특별한 낭독회가 지난 4월 4일, 신촌 산울림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날 자리에는 2008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한 이영훈 소설가가 함께했다.
2편의 장편소설 발표 후에 첫 번째 단편집입니다.
“국내에서 출간하는 대부분의 단편집의 실리는 소설은 한 번씩 발표를 했던 소설들이잖아요. 2006년 등단작부터 2010년 여름 발표작까지를 모은 책이고, 책이 출간한 해는 2011년이니 저로서는 5년의 궤적이 기록된 셈이죠. 장편소설은 한 번에 토해내는 것이라면 단편집은 시간의 궤적에 의해 쌓여가는 느낌이라 특별해요.”
데뷔하신지 이제 육 년째가 되어 가시는데요. 처음에 소설을 쓰실 때와 다른 점이 있으신가요.
“쓰면 쓸수록 어려워져요. 독자분들도 ‘이정도면 나도 쓰겠다’ 하고 생각을 하실 때 있지 않으신가요?(청중웃음) 저도 그런 생각을 하며 독자시절을 보냈고, 문청시절을 보냈습니다. 기성 작품을 읽을 때도 냉철한 독자 중 하나였죠. 소설을 쓰면 쓸수록 제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게 되요. 소설가라는 직업을 넘어서서 삶의 방식이나 태도와도 연결이 되기 때문이죠. 소설을 쓴다는 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니까요.”
표제작 「아주 보통의 연애」의 원래 제목은 ‘아무도 모른다’ 였는데요. 제목을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제목이 바뀐 이유는, 그게 정말 신기한 건데요. 소설을 쓰고 제목을 붙였는데 백퍼센트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현대문학엔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었고요. 그다음은 ‘영수증’이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뀐 게 지금 제목이에요. ‘보통’이라는 명사가 필요했어요. 알랭 드 보통의 보통이냐, 노멀의 보통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중의적인 의미도 살리고 싶었죠. 정말 희한한 연애를 하는 사람을, 그런 연애를 보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라는 제목의 소설도 있었죠. 흥미로운 기표로 작용하는 문장이었고, 이 책에서는「가족드라마」로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그 말이 나온 배경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문장의 댓글이 유행처럼 번졌던 적이 있었죠. 일종의 정치적인 놀이였죠. 노 전대통령이 서거하시고, 지금은 그때 상황과는 많이 바뀌었죠. 소설 자체는 정치적인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고, 일종의 상징으로 쓰인 문장이에요. 이 소설을 빼야하나, 고민도 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저의 궤적이고 능력이고 경험치였기 때문에 넣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쓰신 소설은 「푹」입니다. 추리소설이자, 범죄소설인데요. 잔혹한 행위의 전말이 밝혀지고 난 뒤에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도 원래 제목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죽였다’라는 제목이 강원도 인제의 산 그림자를 보면서 지금의 제목으로 바꾸셨다고 했는데요.
“작년에 눈이 참 많이 왔었죠. 인제에도 정말 눈이 많이 왔습니다. 눈에 잠겨있는 경관을 보고 있자니, ‘푹 잠들었다’, ‘푹 가라앉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푹’이라는 단어가 주는 질감 같은 것이 좋았어요. 눈이라는 순백의 느낌이 주는 처연함 같은 것도 연상이 되고요. 원래는 아주 스트레이트한 추리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설 제목을 먼저 정해놓은 몇 안 되는 희귀한 단편이었죠.”
엄마의 진짜 꿈은 로맨스소설 작가였다. 하지만 나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내가 없었으면 꿈을 이뤘겠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후회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어린이만 꿈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나쁜 편견이야.”
열두 살짜리 딸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게 엄마의 교육방식이었다. 아빠가 없다는 것도 내겐 비밀이 아니었다. 가족 간의 은밀한 비밀이 아이를 얼마나 소외시키고 황폐하게 하는지 엄마는 잘 안다고 했다. 그러니까 엄마는 경험에서 배운 대로 내게 모든 걸 말해주었다. 귀를 막아봐야 들릴 게 뻔했고 욕을 할 수도 없는 나이였다. 나는 무슨 얘기든 들어야 했다.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의 성공한 대체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연애라도 해야 한다는 끝도 없는 엄마의 지론 말이다.
“사람들은 남의 인생 따윈 조금도 관심 없어. 자기 얘기를 쓰고 싶어하지. 노친네들도 종종 말하잖니.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백 권도 더 쓴다. 알지?”
응, 이라고 대답했지만 알 게 뭔가. 열두 살짜리가 알고 있는 건 대답을 안 하면 엄마가 더 집요하게 물어본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보통의 연애」, p. 18)
이 부분을 낭독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여기는 소극장이잖아요. 스토리가 연계되는 부분을 읽고 싶었어요(웃음). 제 가슴속의 주인공은 하진이란 딸과 엄마이기도 해서, 골랐습니다.”
대필 작가 이야기가 나오는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누군가에게 말씀하시는 편인가요?
“대필 작가의 경험은 없어요. 책이 나오진 않았지만 어떤 분의 이야기를 함께 작업한 적은 있죠. 소설을 구상하면 이 이야기가 소설로서 가능성이 있을지 물어보는 작업을 하는 편이에요. 남편한테 주로 물어보죠. 굉장히 귀찮아합니다(웃음).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풀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야기를 많이 하면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주의하죠. 이야기가 고일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깊은 맛을 내기 위해서 지켜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서울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종로서적은 사라졌고, 서울을 떠나기 전 <백 투 더 퓨처>를 봤던 대한극장도 멀티플렉스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리엔 비슷한 간판을 단 음식점과 제과점, 화장품가게가 즐비했다. 쉬지 않고 걸었다. 걷고 있어도 멈춰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무빙워크 중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길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오래 걸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리모컨을 들고 있어서, 내가 서 있는 길의 속도를 점점 올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걷다가 계단을 내려오던 사람과 부딪혔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렇게 종종 길을 잃었다. 처음 J와 만나기로 한 파리크라상도 건너편 파리바게트로 착각할 정도였다. 파란색 간판이 비슷한 그곳에서 J를 기다렸다. 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 비슷한 얼굴을 가진, 동일한 리듬의 말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청첩장 살인사건」, p. 90~91)
서울이란 도시에 대해서, 소설의 화자처럼 느끼는 면이 있으신가요?
“97, 98년도에는 정말 그렇게 느꼈어요. 제가 캐나다에 잠시 체류하다가 돌아왔을 때였죠. 홍대 등지에 인디밴드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들도 생기고 서울 연극제, 부산영화제도 그 때 생겼던 걸로 기억해요. 제일 놀랐던 것 중에 하나는 서울 여자들이 정말 말랐다는 점이었어요(청중 웃음). 캐나다에서 9킬로 정도 쪘었는데, 현지에서는 그것도 몰랐었죠. 서울에 와보니 너무나 날렵하고 날씬한 초 미녀들이 많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언어 이외에는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죠.”
‘백영옥 미용실’이 ‘강묘희 미용실’로 바뀌게 된 이유
광고 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한 여성 독자가 세 번째 낭독을 맡았다. 백영옥 작가의 소설을 통해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그녀. 그녀가 읽은 부분은 「푹」의 첫 번째 페이지였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한태주는 ?담한 얼굴이었다.
“제 기억이 정확한 건 아닙니다.”
그의 왼쪽 손등에는 스테이플러 마크 같은 금속성 손톱 자국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청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옆구리를 찔렀는데, 그다음부터는 생각이 나질 않아요. 깨어났을 때, 알코올 냄새가 강하게 났어요. 머리가 굉장히 아팠습니다. 누군가 절 흔들고 있었고, 수 많은 눈동자들이 동시에 위에서…… 빌어먹을! 그 눈동자가 전부 절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게 더 끔찍했습니다.”
붕대를 감은 한태주의 손가락은 푹, 꺼져 있었다. 눈곱같이 보이는 눈 밑의 작은 사마귀는 질질 비어져나오는 눈물에 불어 금세라도 떨어질 듯 너덜거렸다. (「푹」, p.177)
이 소설집에서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든 소설을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강묘희 미용실」이에요. 저는 대학 1학년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했어요. 매번 잘 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다니고 다시 신춘의 계절이 찾아오면 썼어요. 제가 일했던 직장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편이었죠. 직장 생활이 딱히 싫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글을 쓰면서도 직장에서 쓰는 글은 온전히 내 글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죠. ‘나는 작가들을 인터뷰만하고, 소설을 쓰지는 못하고 소설을 리뷰 하는 일만 하고 있구나.’
그래서 어느 날인가 포털에 제 이름을 쳤어요. 경상도 사천에 백영옥미용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미용실을 찾아 가기로 했습니다. 대개 문학적인 이야기지만, 저에게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소설에 나오는 얘기지만 머리통을 자를 수는 없어서, 긴 머리카락을 자르러 간 거죠. 사천에 내려갔지만 결국에 백영옥 원장님을 뵙지는 못했어요. 사천의 원래 지명이 삼천포라는 것이 재밌었어요. 원래는 백영옥 미용실로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너무 실례가 될 거 같았죠(청중 웃음).”
H가 출간한 여섯 권의 책은 모두 내가 만든 것이었다. 두 번째 책의 성공으로 그가 선물한 독일 산 에스프레소 머신은 일찌감치 고장났지만, 아직까지 내 방 테이블 위에 오래된 기념품처럼 놓여 있었다. 의리란 말은 용도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한 그였지만, 내가 출판사를 두 번 옮기는 동안 H도 출판사를 두 번 옮겨 책을 냈다.
그를 대신해 전화를 받고, 연락할 사람의 전화번호를 메모하고, 그의 말을 대신 전하는 사람,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을 고치고, 작가가 되는 대신 작가를 보필하며, 쉼표와 마침표를 잘못 끼워넣어 뻑뻑한 문장을 뜯어내고, 못질하고, 최종 마침표를 찍는, 완벽한 ‘대신’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였든 가을에서 겨울로 스러지는 길목이었든 중요치 않다. 다만 언젠가 나도 내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점점 시들어갔다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만기가 된 주택청약부금이나 의대에 들어간 아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야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던 순간의 밤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강묘희미용실」, p. 155)
작가님의 말씀처럼 한때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부분 같네요. 이 심정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었나요.
“무모함 같아요. 제가 대학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종종 있는데, 건방지게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백번 넘게 떨어졌거든요. 정말 미련하고 무모하죠. 그 정도 되면 ‘나는 안 되나 보다.’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목표와 꿈의 차이인거 같아요. 목표라는 건 도저히 안 되면 낮추기도 하잖아요. 근데 소설가가 되는 게 내 꿈인데, 조금 낮춰서 방송작가에 도전해 볼까, 이런 게 아니니까요. 열망의 힘인 거 같아요. 운이 좋아서 서른셋에 멈춘 것이죠. 문학동네에 감사드립니다(청중 웃음). 되지 않았다면, 계속했을 것입니다. 팔십구세 백영옥 할머니 최고령 등단. 훗날 이런 기사를 보실 수도 있었을지 모르죠(웃음).”
독자들의 아주 특별한 질문
글을 쓰고 싶은 고등학생입니다. 작가님은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셨나요.
“무척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학교 집 독서실을 왔다갔다하는. 후회가 되긴 해요. 작가로서 좋은 시절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그 ?이 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수성이 있을 테니까요. 저의 경우는 엄격한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어요. 글을 쓰고 싶으시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세요. 연애도 해야겠죠. 작가로서의 좋은 유산도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들이 모이면 특별한 이야기를 할 거 같습니다. 감성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시나요?
“(웃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랑 누구 사귄대.’ 류의 이야기를 많이 하죠(청중 웃음). 최근에 일산에서 천명관 작가와 박민규 작가 그리고 김언수 작가와 회동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도 저희들의 가장 큰 이슈는 ‘나는 가수다’ 였어요(청중 웃음).”
조금 전 말씀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끈기 있게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살면서 많은 실패를 하잖아요. 아주 가끔씩 성공하고 대부분 실패하죠. 어떤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인 거 같아요. 부러울 때 확실하게 부러워하는 것도 용기인 거 같아요. 멋진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값어치가 큽니다. 『스타일』당선 이후가 제 인생에서 가장 안 좋았던 시기였던 거 같아요. 성공과 성취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우리 사회가 ‘다르다’와 ‘틀리다’, ‘성공’과 ‘성취’를 혼용해서 쓰고 있잖아요.”
동료 작가들에게 혹은 비평가들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될 때도 있으실 텐데, 어떻게 이겨내시는지요.
“우선, 상처를 받죠. 『스타일』의 경우에는, ‘내 인생 최고의 글이다’와 ‘내 인생 최악의 글이다’로 평이 엇갈렸어요. ‘칙릿’이라는 장르로 인해 많이 맞았죠. 이번 단편집을 읽고 어느 독자 분은 실망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바로, 『스타일』때의 초심을 잃었다는 이유에서 였죠(청중 웃음). 소설을 쓰면서 굳은살이 생겨요. 『스타일』에서 받은 평들이 단단하게 깔려있죠. 약간의 오기도 생겼고요. 그래서 더 다양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쓰다보면 작품이 더 좋아질 거란 생각을 해요. 어디선가 제 작품을 읽고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힘을 내죠.”
상상력의 원천이 어디인가요.
“관심인 거 같아요. 세상에 대한 관심이겠죠. 소설은 답이 아니고, 질문이니까요. 소설은 견고한 질문들의 고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소설가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상상력의 근원은 질문의 방식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파하는 능력일 수도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