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을수록 몽근하게 온기가 전해지는 말이 있다. 가령 1995년부터 지금까지 월간 PAPER 편집장을 맡고 있는 황경신의 새 책 『생각이 나서』권두에 적혀 있는 문구가 그렇다. ‘생각이 나서 생각을 하면 환합니다.’ 지난 2월 18일, 홍대 네스카페 2층에서 진행된 저자와의 티타임도 그렇게 환하게 생각하는 자리였다.
“멋있는 얘기를 잔뜩 준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들통이 날 거라는 생각에 편하게 진행하려고 해요. 생각했던 것보다 멍청하고 빈틈이 많다, 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청중웃음). 맞습니다. 저 그렇게 어려운 여자 아니에요. 쉬운 여자예요. 대신 선물을 많이 준비했고, 웃겨드리기 위해서 노래도 부를 예정입니다.”
저자는 “전문 사회자나 출판사 편집자가 대신 진행해주는 만남은 뭔가 오글거리고, 통역되는 느낌”이라며 직접 두 시간동안 어떻게든 꾸려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때때로 말문이 막힐 때, 이날의 사회자이자 저자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낭독이었다. “누가 이렇게 조언해주더라고요. ‘쑥스러울 때는 읽으면 돼.’”
생각이 나서. 난 이 말을 참 좋아해요. 왜 전화했어? 용건이 뭐야? 왜 주는 건데? 이렇게 물어보는데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오늘은 세 번 생각이 나서 문자 보내요. -네 생각이 나서 샀어. 이런 대답이 돌아오면 따뜻하고 부드러워져요, 갑자기, 온 세상이.
수가 몰래 놓고 간 딸기맛 비타민C, 여리가 주고 간 헤어 에센스와 색색 가지 초들, 양이 갑자기 싸 들고 온 밑반찬들, 티가 보내준 앨범과 사진, 누군가가 슬쩍 밀어놓고 간 마음 한 조각, 그렇게 작고 예쁜 것들을 생각하면 나날이 크리스마스 같아요.
언젠가 나는 당신이 생각이 나서 빵을 구웠죠. 밀가루를 반죽하고 시간을 들여 발효시키고 옥수수가루를 듬뿍 뿌려서. 당신은 결국 그 빵을 먹지 못했지만 내 작은 방은 지금도 그날의 빵 굽는 냄새를 기억해요. 희망과 꿈이 버무려진, 천국의 향기를. (p.129~130)
“어떤 분께서는 이 책 『생각이 나서』가 역술계에 한 획을 긋고, ‘주역’을 능가하는 책이라고 말하시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질문을 갖고 책을 펴면 답이 나온다’는 말이었어요(웃음). 이 책을 사고 아침마다 책을 펴보면서 오늘의 운세를 끊었다는 분(청중 웃음). ‘뭐가 답이냐’, 이제는 되레 저한테 묻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분들께서 다시 책을 폈더니 ‘연습하면 다 돼’가 나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꾸 사진만 나와서 그냥 처음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마침 목차 바로 뒷부분에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해요. ‘대답 없음도 대답이다’(청중 웃음) 저도 준비 없이 나와서 폈는데, ‘생각이 나서’가 나왔네요(웃음).”
사랑은 영원하지만 ‘어떤’ 사랑은 끝이 난다
책에는 짧은 이야기 뒤에 날짜가 붙습니다. 날짜들이 정말 그 글을 쓴 날인가요?
“맞아요. 일기처럼 쓰던 것 중에 너무나 사적인 걸 빼고, 그리고 연도도 빼고 수록하게 되었어요. 수록된 사진도 제가 직접 찍은 것이죠. 결코, 잘 찍은 사진이 아니죠. 조그만 자동카메라로 찍은 것이기도 하고요. 저는 사진 찍는 것보다 보는 걸 좋아해요. <페이퍼>에 사진을 밤낮으로 찍는 분이 주변에 계셔서 그런지 막상 저는 별로 안 찍게 되더라고요. 여기에 수록된 사?이 좋아 보인다면, 모두 디자인을 해주신 분의 몫이죠. 디자이너가 실린 사진들의 ‘뽀샵’처리를 잘해주셨어요.”
글은 주로 어디서, 어느 시간대에 쓰시나요?
“아이패드나 랩탑을 들고 카페에서 쓴다고 얘기하고 싶으나, 그러지는 않아요(웃음). 카페에 잘 가지 않는 편이에요. 얘기를 하다 보니, 여기가 네스카페네요(웃음). 술집을 많이 가는데 그곳에서 쓸 수는 없지 않잖아요. 집에서 주로 쓰게 되요. 회사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아무데서나 쓰는 편이죠. 밤에는 자느라 바쁘고 낮에 주로 씁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으려고 해요. 이 역시도, ‘모두가 잠든 시간에 쓴다’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그렇지가 않네요(웃음).”
어떤 글을 좋아하시나요?
“몸이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품을 좋아해요. 말하자면 글을 쓰게 한다거나, 음악을 듣게 한다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싶게 만드는 작품. 글이라는 게 그런 거 같아요. 저 역시도 몸이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릴케의 말을 믿는다. ‘끝이 나면 쓸 수 있다’보다 ‘씀으로써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로 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 슬픔 자체는 끝이 없지만 ‘어떤’ 슬픔에는 끝이 있다. 사랑은 영원하지만 ‘어떤’ 사랑은 끝이 난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p.303)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결정적인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나요?
“저 역시도 이 제목이 너무 좋아요. 제가 지은 제목은 아니에요. 에세이집은 처음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불친절한 글이잖아요. 처음 출판사에서 제의가 왔을 때, 망설인 것도 정작 제가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다음날 출판사에서 계약금이 입금되는 바람에 쓰게 되었습니다(웃음). 책의 디자이너가 페이퍼 창간호 때부터 같이 일하던 친구인데, 처음으로 단행본 디자인을 해주었어요.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생각이 나서’ 와 ‘기적처럼 만났으면 해’를 뽑아준 것이죠. 오글거리고, 달착지근하고, 드라마틱한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전자로 결정했죠. ‘생각이 나서’라는 말은 적절한 애틋함이 있어서 좋아요.”
메모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나요?
“메모하는 습관이 없어요. 그 순간을 스쳐 보내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치명적인 단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생각도 씨앗과 같지 않을까 싶어요. 산불이 났을 때 나무를 새로 심죠. 대개는 산에 기본적으로 씨앗이 있다고 합니다. 가만히 놔두어도 천천히 나무가 자라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미관상의 이유 등으로 재빨리 심은 나무는 잘 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생각도 그런 거 같습니다. 어떤 씨앗은 지나가지만, 그러다 불현듯 씨앗의 싹이 트면 그 때, 그렇게 쓰게 되는 것이죠. 명상도 그런 거 같아요. 걱정도 명상과 같은 종류이고요. 메모도 중요하지만, 씨앗에 계속 물을 줘서 생각을 성장시키는 것이 저의 경우에는 더 중요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리하여 지금은 외롭지 않습니까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별거 없는 거 같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잖아요. 늘 행복하고, 언제나 가득 차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재니스 조플린이라는 가수가 기억에 남습니다. 마약으로 인해 27살에 죽었죠. 수천 명의 관객과 사랑을 나누다, 호텔 방에 와서 혼자가 되면 그 외로움을 그녀는 감당할 수가 없었죠. 외로움에 대한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요. 선배 중에 문득 모든 것을 정리하고 LA로 간 선배가 있어요. 어느날, 그 선배에게 물었죠. 외롭지 않느냐고. 그랬던 선배는 이렇게 답하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외롭지 않아.’”
모든 것은 너무나 순간적이고 모든 것은 너무나 쉽게 지나가고 불과 몇 분 전의 일은 과거가 되어 영영 잊힙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이 생명은 무엇에 기대어 지속됩니까. 당신과 나, 진심은 조금도 전하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낡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몇 시간을 달려와 잠깐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 보던, 어두운 골목길에서 약속도 없이 한참을 기다리던, 그 어린 연인은 어디로 갔을까요.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역에서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묻고 싶었습니다. 외롭습니까. 그리고 그리하여 지금은 외롭지 않습니까. (p.279~280)
이날, 저자는 이날 루시드폴의 「봄눈」과 「문수의 비밀」을 불렀다. “잘 부르지 않는 게 컨셉”이라며, “루시드폴 노래를 너무 좋아하시는 분은 귀를 막아달라”고 웃으며 부탁한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노래는 감미롭고 즐거웠다. 가야금과 거문고 그리고 해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스(IS)의 무대가 이어졌다. 저자는 이들의 노래 중 「미몽」의 노랫말을 썼고, 러시아 민요 「백만송이 장미」에 가사를 고쳐 썼다고 전했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나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 참석한 모든 이들의 삶이 결국, ‘생각이 나서’의 연속이며, 우연일 것이라는 생각. 그러고 보니 저자는 책날개에 이런 말을 남겼다.
‘변하고 사라질 것들에 너무 무거운 마음을 올려놓지 않으려 한다. 내일이면 변할지도 모를 사랑을 너무 절실하게 전하기 않기로 한다. (……) 그러던 어느 날 지나치는 걸음을 문득 멈추고 조금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로 가벼운 인사만을 건네기로 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러워지고 미안해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리석도록 깊고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말이다. 생각이 나서, 라는 그 말은.’